쇼핑고자탈출기 8 - 영원한 을, 세입자의 집 쇼핑
똑부러질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런 허당 또 없는 나는 그중에서도 쇼핑에 있어서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구다. 옷, 신발, 가방 등 의류를 살 때마다 왠지 가게에서 기가 죽고 늘 을의 쇼핑을 하는 것은 기본, 일반적으로 '이런 건 어디서 사야 한다'라는 쇼핑 지형화 능력 자체가 부족하다. 그런 나에게도 잘 사는 것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집을 잘 구한다.
영원히 고통받는 세입자로 살면서 좋은 집을 구해서 계약을 하는 건 정말 생각만 해도 골칫거리다. 집을 구하고 발품을 팔면서 느끼는 위화감. 부동산에서 보여준 서너 채의 집을 돌아보고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의 수많은 집들 중 왜 내 한 몸 뉘일 집은 없단 말인가. 게다가 예산이 타이트하면 할수록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집들을 많이 보게 된다. 게다가 월세가 제아무리 싼 집이라 하더라도 다른 물건을 살 때보다 목돈이 드는 품목이니, 혹시나 사기를 당하진 않을까, 혹시나 속고 계약하진 않을까 두려움도 크다.
올해 초 한국으로 귀국해 여동생과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다니던 어느 날. 여동생이 "언니. 우린 둘이 같이 다녀야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아. 부동산 중개인들도 같이 다녀야 더 좋게 봐." 하면서 운을 뗐다. "언니 기억나? 우리 ㅇㅇ동에 이사 올 때 언니가 말 잘해서 부동산 아저씨가 복비 안 받았잖아." 난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복비를 안 받았다고? 동생의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언니 부동산만 가면 얼마나 입을 잘 터는지. 레퍼토리가 있지. 부모님 시골에 사시고 동생들이랑 공부 열심히 해서 다 서울 올라오고. 그러다 보면 중개인이 막 홀리듯이 언니 얘기 듣잖아." 나는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했는데, 아마 나의 생존 본능이 내 입을 지배했나 보다. 어떻게든 좋은 집 조금 더 싸게. 우리가 착실하고 집 안 어지럽히고 믿을만한 세입자라는 것을 어필하면서.
내가 구한 제일 첫 집은 계약을 하고 보니 집은 너무 오르막에 있었고 분명 들어올 땐 1층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반지하인 구조였다. 왜 집 보러 올 땐 몰랐지? 다시 복기해보니, 부동산 아주머니의 자가용을 타고 여러 집을 보러 다니느라 오르막인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는 서울 딸 내 집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올라왔다. 수업 중이던 나를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엄마와 여동생 둘 만 후문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우리 집까지 걸어가던 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거세지는 빗줄기 때문에 가게 차양 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는데 하필 그 가게가 부동산. 부동산 아저씨는 어떤 오지랖이셨는지, 미래고객 중 한 명이라 생각하셨는지 엄마와 여동생에게 잠시 가게로 들어와 비를 피하라고 하시며 커피를 내주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작된 엄마와 아저씨의 즉석 토크. 큰 딸이 여기 학교를 다니고, 집을 구했는데, 언덕이고, 들어가 보니 반지하고... 엄마에 지지 않는 헤비 토커 신 부동산 아저씨. "xxx번지에 산다구요? 거기 주차장 불법 개조해서 1층에 방 만들었겠구먼. 다음에 구할 땐 우리 부동산으로 와요. 제가 이 자리에서만 부동산은 3x 년을 해서 이 동네는 꽉 잡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땅에서 정착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어떤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그걸 인연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부동산 아저씨에게 우리 엄마 비 피하게 해 주셔서 고맙단 말과 함께 인사를 하러 가 밑밥을 깔았다. "제가 몇 달 뒤에 이사를 하려 하는데요, 이 근처에 괜찮은 매물 없나요?"
입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늘 내가 가진 예산은 그 동네 그 시기 평균 방값 이하였다. 그래서 더 필사적이었다. 물론 이상한 집주인을 만난 적도 있고, 곰팡이와 동거하기도 했고, 날파리 알이 깨처럼 생겼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등 서울의 여러 셋방을 전전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주위 시세보다 싸게 구하고 나서도 영 마음에 차지 않아 서글픈 마음에 잠을 설친 이사 첫날밤들이 여럿이다. 그래도 열심히 발품과 입품을 팔아 구하고 정 붙이며 산 집들이라 그런지 우연히 그 동네 그 집을 지나가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