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지 고르기
드라마 ⟪악귀⟫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악귀에 씌어 고통받는 모습이 나온다. 악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한데, 그것은 악귀의 이름을 맞추는 것이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악귀의 이름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감정도 같다. 우리가 감정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우선, 감정의 이름을 맞추어야 한다.
처음 '감정 포장하기' 실험을 시작한 계기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내가 느낀 수치심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의 수치심의 역사는 유구하고도 깊다. 처음부터 악귀의 이름이 수치심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정은 늘 정의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오니까.
'그날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의 눈치 없는 뇌는 끊임없이 수치의 기억을 반복 재생했고 나는 그 소모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참을 씨름하다 생각했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왜 자꾸 생각하는 거야! 그만 좀 하라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어 봤자. 그때뿐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원인을 파헤쳐 보고 싶어졌다. 왜 그토록 내가(나의 뇌가) 당시의 일에 집착하는지.
'그 사람이 나빴던 거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늘 그렇듯, 남 탓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은 급속도로 더 나빠지고 수치에서 분노로 불길이 번졌다. 기억은 오히려 더 진하고 선명해졌다. 사실, 이 과정 속에서 기억은 가공되고 추가되었다. 도마뱀이 티라노사우루스가 된 것이다.
'그날은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하늘 탓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나를 더 집요하게 그날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형사가 수사를 시작할 때를 생각해 보자. '수사는 피해자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피해자의 집, 주변인물 순으로. 모든 것은 안에서 밖으로.'
'왜?' 나는 수첩에 '왜'를 수십 번이나 적었다. 처음부터 사실을 실토할리가 없었다. 취조는 계속되었고 앞쪽의 몇 문장은 역시나 나를 동정하고 남을 악인 화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아니잖아. 잘잘못 때문이 아니잖아! 좀 솔직해져 봐. 소름 끼치게!'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실토했다. '맞아,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다고. 당시의 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그 기억 속 강렬했던 내 감정이 튀어나왔다. 뇌도 나의 감정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기억을 반복재생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악귀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제 그 감정은 더 이상 악귀가 아니라, 리본을 단 고양이처럼 나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