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오현 Nov 21. 2021

입생로랑, 천재의 꿈

패션의 민주화


천재가 성숙한 철학을 가지면 그가 만든 결과는 역사가 된다. 고서로 전해지는 위인들이 그러하지 않던가. 위인들은 재능을 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 그 목적에는 타인을 향한 관심과 존중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세상에 남긴 흔적은 아름답다. 패션 디자이너, 입생로랑은 타고난 천재였다. 그가 색연필로 흰 종이에 옷을 그리고 옷감을 가위질하면 전에 없던 패션이 탄생했다. 패션에 대한 그의 철학은 각별했다. 그에게 옷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주는 것이었다. 입생로랑은 '패션의 민주화'를 꿈꾸며 평생을 바쳤다.






과거

1936년 8월 1일. 알제리 오랑에서 입생로랑은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패션에 소질을 보였다. 친구들이 밖에서 뛰어놀 때 직접 그린 종이옷을 인형에 입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입지 않는 옷을 자르고 꿰매어서 드레스를 만들었다. 부모님은 그의 재능을 보고 그가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입생로랑은 중등 교육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곳의 패션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 본인의 의상 스케치를 출품했다.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한 입생로랑 (가운데). ⓒMusee YSL Paris


1953년 공모전에서는 3등, 1954년 공모전에서는 드레스 부문 1등을 차지했다. 파리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는 입생로랑의 출품작을 보고 감탄했다. 그의 스케치가 크리스찬 디올이 자신에게 보여준 스케치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스케치는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브뤼노프는 입생로랑이 인재라고 직감했고 그를 디올에게 소개했다. 디올은 그 자리에서 입생로랑을 조수로 채용했다. 입생로랑이 18살 때의 일이다.


입생로랑은 디올을 도우며 고전적이고 우아한 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입생로랑은 그 우아함 속에 '남성 편향'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잘록하고 입고 벗기가 불편하고 화려하기만 한 여성의 의복이,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여성성에서 비롯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입생로랑은 그 편향을 깨려고 과감한 시도를 했다. 1957~1960년에 그는 모피로 장식한 가죽 자켓, 폭이 좁은 스커트 등 젊은 감각을 더한 옷을 선보였다. 기존 고객들은 불편함을 내비쳤다. 부유층이었던 그들은 보수적이었다. 자신들의 멋의 권리를 다른 세대는 누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남성 편향 따위의 개념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론은 그들 편에 서서 입생로랑을 비난했다. 디올의 매출은 하락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디올 경영진은 입생로랑을 프랑스 군대로 보냈다.




업적

1960년, 프스령이었던 알제리는 독립 전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은 참혹했다. 고향 사람들이 전투 현장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입생로랑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인간을 향해 총칼을 겨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신경 쇠약에 걸려서 군 병원에 입원했다. 심지어 병상에서 자신이 디올에서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유를 위해 알제리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았다. 여성들은 여성다운 옷을 강요받았다. 기득권을 위해 집단이 택한 처사는 불평등했다. 입생로랑은 자유와 평등이 없으면 현실이 비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표현하는 옷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군 병원에서 퇴원하고 1962년에 입생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Yves Saint Laurent을 설립했다.



생로랑 리브 고쉬

프랑스의 디자이너 브랜드 대부분은 고급 여성 맞춤복,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를 만들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옷이기에 가격이 비쌌다. 60년대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경제 수준이 올라갔는데, 그럼에도 오뜨 꾸뛰르의 벽은 높았다. 입생로랑은 한 계층만 소비하는 여성복 시장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66년, 생로랑 리브 고쉬라는 기성복 라인을 출시했다. 합리적인 가격대와 고급스러운 을 자랑했다. 리브 고쉬의 등장으로 평범한 여성들도 고급 패션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입생로랑은 여성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옷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시작을 알리는 컬랙션은 두 가지가 있다.



르 스모킹 / Le Smoking. 1966


르 스모킹을 입고 있는 생제르맹. ⓒBlaastlye


입생로랑은 자기 브랜드의 모델, '다니엘 루케 드 생제르맹'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곡선이 짙은 드레스뿐만 아니라, 직선이 강한 코트도 멋스럽게 소화했다. 거기에서 입생로랑은 '턱시도'를 떠올렸다. 그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턱시도를 여성복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르 스모킹이다. 길게 뻗은 바지와 자켓에 라인을 더해서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여성이 남성 정장을 착용한다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고정관념을 입생로랑이 깼다. 그는 여성도 정장이 어울리고 또 즐길 수 있음을 증명했다. 특정 패션을 두 성별이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르 스모킹의 탄생은 패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사파리 자켓 / Safari Jacket. 1968


입생로랑 사파리 자켓. ⓒMusee YSL Paris


1967년, 입생로랑은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과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서양 남성들의 사파리 자켓을 여성용으로 재해석했다. 다음 해 보그 파리에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가 사파리 자켓을 만든 배경은 프랑스의 '68 운동'과 연관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2차 대전을 치른 후 회복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회 문제가 만연했다.


전쟁 범죄자들이 요직을 차지하여 부와 권력을 남용했고, 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져서 졸업생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으며,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팽배했고, 빈민층이 늘어났다. 프랑스의 젊은 세대는 현실을 묵인하는 기성세대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이들은 사회 문제를 타파한다는 목표로 1968년 5월, 샤를 드골 정부에 맞서 저항 운동을 펼쳤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 독일, 일본 등의 젊은이들도 68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회복을 열망했다. 각국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프랑스 68 운동. ⓒThe Guardian


자유 그리고 평등. 그것은 입생로랑이 추구하는 철학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각국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이러한 이유로 입생로랑의 사파리 자켓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남성만 입을 수 있었던 사파리 자켓을 여성도 입을 수 있게 제작했다. 그에게 패션은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하고 동등하게 누리는 것이었다. 르 스모킹과 사파리 자켓은 입생로랑의 브랜드 하우스를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게 했다. 평론가들은 그가 수직적인 유럽 패션을 혁신했다고 평했다. 입생로랑의 작품들은 혁명의 물결을 타면서 세상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밖에도 입생로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패션의 성별 경계를 허물었다. 영국 해군의 피코트를 여성 코트로 디자인하거나, 여성의 블라우스를 남성 셔츠로 제작하거나, 실크 스카프를 남성 액세서리로 활용하거나, 더블브레스트 정장을 여성 자켓으로 만들거나 하는 등의 시도를 했다. 또한 디자이너 최초로 흑인 모델을 런웨이에 세웠고, 디자이너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패션쇼 마지막에 피날레를 도입했다. 영국의 패션 기자 알레시아 드레이크는 그녀의 저서 <The Beautiful Fall>에서, 입생로랑이야말로 '패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Fashion)'에 기여한 진정한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입생로랑은 늘 자유롭고 평등한 옷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영면하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나는 전 세계 여성들이 정장 바지와 턱시도, 카 코트, 트렌치코트 등을 입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현대 여성들을 위한 옷차림을 창조했다. 패션은 단순히 여성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지위와 권리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다."


2002년 1월 7일 입생로랑 은퇴식 연설




패션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이제는 남성만 입는 옷, 여성만 입는 옷 혹은 특정 계층만 입는 옷은 없다. 패션에서 '젠더리스', '유니섹스', '모든 사람'이라는 용어가 어색하지 않은 시대이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패션은 두터운 편견 안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는 한쪽으로 치우친 이기심이 있을 뿐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무의미했다. 패션은 예술과 상업 사이를 오가는 장르이다. 자유가 있어야 옷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평등이 보장되어야 원하는 옷을 얻을 수 있다. 입생로랑은 무의미하다고 일컬었던 두 가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과 날 선 폄훼가 끝없었다. 그래도 견디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편견은 깨졌고 패션은 진일보했다. 천재의 꿈 이루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컨버스, 나를 표현하는 신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