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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오 Mar 25. 2021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좋더라

비자림의 추억


"오빠, 우리 이렇게 자연이 있는 곳에서 살자."


"좋아, 그렇게 하자. 내가 꼭 이뤄줄게."



2017년 선선한 초가을. 여자 친구와 나는 제주도 비자림에서 우리 마음속에 꿈의 씨앗을 심었다. 듬직한 어른 나무가 되려면 멀었지만, 어느덧 묘목 정도는 된 듯하다. 뿌리가 깊고, 몸통은 두껍고,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나무가 되도록 매일 물을 주고 있다. 우릴 포근하게 감싸줄 만큼 커다란 나무로 자라길 기대한다.






시끌벅적한 곳이 좋았다


20대 초반의 나는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홍대, 가로수길, 강남 등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자주 놀러 갔다. 수다 소리가 넘치고 빵빵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에 있으면 왠지 모를 에너지가 셈 솟는 기분이 들었다. 주말이면 술집, 유행하는 핫 플레이스, 쇼핑센터 등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반대로 미술 전시회나 자연공원, 한적한 카페 거리, 등산 등은 선호하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뭔가를 감상하거나,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로 고민하거나 마음이 불편할 때만 혼자 조용한 거리를 걷곤 했다. 이런 경우가 아니고서야 스스로 정적인 활동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즈넉한 자연을 섬기다


그러던 나에게 변화가 생겼다. 바로 조용하고 자연이 가득한 공간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2017년 11월, 제주도에 있는 '비자림'이란 산림욕장을 다녀온 뒤 장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아직도 비자림 입구에서 경험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신화 속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푸른 나무와 각진 바위들의 모양새가 하얀 한지에 그려놓은 수묵화 같았다.


하늘에선 따사로운 햇살이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와 흙길 군데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자 친구와 나는 돌담 위를 걷듯 동그라미 위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코끝은 흙과 풀내음이 가득했고 돔처럼 굽어진 나무들은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문명의 소리를 막아주었다.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청아한 새소리뿐이었다. 늘 들었던 사람 목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벨소리 등이 안 들리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귀가 조용하다'란 말이 무엇인지 이때 비로소 깨달았다.


숲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아름답고 웅장한 나무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태양과 바람의 말동무였을 것이다. 새들과 곤충의 안식처였을 것이며, 인간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여자 친구와 나는 푹신한 흙길 위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 나무는 나뭇잎을 살랑이며 반짝이는 햇빛 조각을 우리에게 뿌려줬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더 걸어 다녔다. 상쾌한 공기 덕분에 머리도 맑아졌고, 무엇보다 잡념이 사라졌다. 우리 마음을 무겁게 했던 걱정거리를 이야기해보니까 대부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도심에서 지낼 땐 사소한 걱정도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정신없는 환경에서는 대상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풀내음을 맡으며 바다 바람을 감싸 안고, 길을 걷다 나무가 만든 풍경을 감상하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 꽃을 어루만지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발장단을 맞추고,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햇빛을 땅에 묻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으면. 아무리 복잡한 걱정거리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생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다른 차원의 행복을 이곳 비자림에서 느꼈다. 답답한 속세의 번뇌와 불필요한 허상이 말끔하게 씻겨졌다. 우린 나중에 이처럼 아늑하고 자연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신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공간에 여유가 넘치고 주변에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면 인생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행복과 깨달음을, 그리고 새로운 꿈을 선물해준 비자림이 고마울 뿐이다.  






이제는 시끄러운 장소가 편하지 않다. 밥이라도 먹으면 괜히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자림을 다녀온 뒤로 고즈넉한 좋아하게 됐다. 정신없는 장소에 있으면 머리 속도 복잡해진다. 고요한 곳에서 나무, 하늘, 꽃, 흙, 바람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거닐 때 엉켜있던 생각과 고민들이 해결된다. 그래서 요즘은 삼청공원, 서울숲, 연남동 가좌역 방향 쪽, 서울 대공원 등에서 시간을 보낸다. 대체로 한적하고 자연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동네의 신혼집을 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비자림에서 심은 꿈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어린 나무가 됐다. 이 어린 나무는 여자 친구와 내가 4년 전에 다짐했던 조용하고 자연이 가득한 곳에서 살겠다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존재이다. 어른 나무가 됐을 땐 우리만의 숲 속 같은 공간을 갖게 될 것이다. 실내는 예쁜 식물이 있고 창문을 열면 울창한 나무가 반겨주는 그러한 집 말이다.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내가 바뀌었다. 예전처럼 시끌벅적한 곳에 잘 가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마음에 평온을, 인생에 행복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조용하고 수목 가득한 곳을 찾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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