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지오 Sep 06. 2020

'하반신 마비'에서 배운 근성 (1)

10대의 마지막에서 경험했던 극복의 정신

"손주분께선...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2009년 5월 내 나이 19살.


나는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의사의 말에 할머니는 쓰러지셨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셨다.


오히려 나는 덤덤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납득이 가질 않아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 사실은 의사 말대로 나는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는 하반신 마비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한테 말한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성격이 밝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에둘러 부모님이 성격이 좋으셔서 나도 그 피를 물려받은 거라고 너스레를 떤다. 내 지인들은 나를 보통 '넉살 좋은 사람', '외향적인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러한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과묵하고 조용했으며 친한 친구들끼리만 장난을 주고받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20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던 나에게 인생에 강한 충격이 오게 된다. 바로 19살, 수능을 코 앞에 두고 겪은 하반신 마비가 그것이다. 대한민국 고3들은 성인 못지않게 종합병원이다. 종일 앉아서 공부하느냐고 소화 불량이며 허리 통증이며 신경과민이며 온갖 질환들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통통했던 시절이라 몸무게도 상당했다. 장 시간 앉아있고 체중도 나갔으니 허리가 시달렸을 밖에.


  그렇게 혹사당한 내 허리는 디스크로 이어졌는데 문제는 이를 초기에 치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다리가 좀 저리고 뻐근해서 허리에 염증이 생겼나 보다 하고 물리치료만 받았다. 시간도 없고 빨리 공부해야 하니까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어코 사고가 터졌다.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한판 했다. 튀어 오른 공을 잡겠다고 점프를 했는데 착지를 하는 순간 세상 느껴보지 못한 통증을 느꼈다. 하늘은 노랬고 시야는 사라졌으며 삐-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그 뒤로 기억이 안 난다. 눈을 떠보니 병상에 누워 있었고 내 옆에는 눈물범벅이 된 할머니와 부모님이 서 계셨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하체에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계산을 하고 있는 와중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세상 무거운 표정과 말투로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간호사 두 명이 병상을 끌고 나를 이 검사실, 저 검사실을 데리고 다녔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전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떠한 기다란 침 같은 것을 내 허벅지에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아무 감각을 느끼지 못했고 검사를 진행하던 분의 표정은 정말 심각했었다.


   검사를 마치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그 의사가 들어오더니 나와 내 가족을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 검사 결과 디스크가 너무 심하게 튀어나와 척추신경을 많이 손상시켰습니다. 손주분께선...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부모님도 주저앉으셨다. 주변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서 할머니에게 달려왔고 그 뒤로 기억도 안 난다. 나충격을 받아 기절을 했던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해 병원 밥상을 들어 엎거나 집히는 데로 마구 던지는 장면을 종종 보곤 한다. 내가 딱 그랬다. 꽃병이며 액자며 아무 데나 던졌고 세상 쌍스러운 욕을 간호사에게 하며 의사를 데려오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쯤 미쳤던 것 같다.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했다. 사지 멀쩡하고 건강했던 내가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것이다. 대소변을 보는데도 감각이 없었고 허벅지를 아무리 피날 때까지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마비 증세'였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때의 내 모습은 악마가 내 몸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고 한다. 눈에 살기가 넘쳐흘렀고 그 모습이 얼마나 살벌했던지 회진을 도는 의사도 감히 내 병실에 들어오기가 꺼려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친 척추에 쌓인 염증은 치료해야 했기에 며칠 병원에 있었지만 그 기간이 나에겐 지옥이었다. 아니 내가 하반신 마비라는 사실 자체가 지옥보다 더했다.


  집안이 불교라 손에 염주를 차고 다녔는데 마비 판정을 받은 그다음 날 있는 대로 끊어버렸다.


  독실한 불교인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이지만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아프기 전에는 할머니 따라서 절에도 놀러 가고 기도도 열심히 드리고 108배도 하며 공을 들였다. 그런데 그에 대한 결과가 하반신 장애니 이 와중에 성인군자처럼 소탕하게 웃을 위인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종교도, 가족도, 친구도, 학교도, 공부도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맨날 눈물을 흘렸고 소리를 질렀으며 악몽에 시달렸다.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보며 가족들도 힘들어했고 가세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할머니께서는 일단 살고 보자며 치료를 마저 끝내자고 설득하셨는데 치료마저 받기가 싫었다. 혓바닥을 깨물고 죽을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할 수 없이 소염제만 잔뜩 처방받고 퇴원했다.


  그렇게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제2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핸드폰도 부셔서 그 어느 누구 하고도 연락하지 않았다. 하체를 쓰지 못하니 밥 먹는 것도 씻는 것도 고역이었으며 할 수 있는 거라곤 누웠다가 앉거나 양 팔을 이용하여 엉금엉금 걷는 것이 전부였다.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일과라곤 종일 누워있다가 TV를 좀 보고 다시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르며 나의 뺨을 때리고, 알 수 없는 대상에게 한 사발 욕을 실컷 하길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쳐 쓰러져 잠들면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반복이다. 정신이 피폐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녘에 갑자기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려고 눈을 감았는데 내 방 밖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기도 소리였다.


"... 무심하시기도 하시지. 그렇게 정성을 다했는데 결국 우리에게 주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차라리 늙은 이 할미의 허리를 가져가지 어찌 저 핏덩이 같은 어린애 허리를 가져가십니까..."


  할머니는 연신 우시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치셨고 결국 목 놓아 우셨다. 옆에는 어머니도 있으셨는데 어머니도 덩달아 같이 우셨다.


  이 기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정말 안 좋다. 아니 안 좋은 것을 너머 슬픔에 치여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누은 채로 두 분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이렇게 슬플 때 기적처럼 하반신이 움직여줬으면 했는데 망할 놈의 하체는 꿈적할 겨를도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와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도 울었더니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아서 몸을 치켜 세운 뒤 심호흡을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살고 싶다"란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내가 처한 비극에 지배당하여 그 어떠한 긍정적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근데 그 날은 갑자기 다른 생각들이 났다.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그랬던 것이었을까. 그저 예전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친구들과 농구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에게 '웃음'이라는 것이 다시 찾아오길 간절히 소망했다.


  할머니와 부모님을 불러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할머니는 나를 껴안아 우셨고 나도 할머니를 안고 울었다.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울며 밤을 지새웠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우리 가족은 디스크 질환으로 유명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지인 소개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검색, 신문 광고, 잡지 등 온갖 정보를 끌어 모았다. 지인의 지인의 지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중에서 아버지 지인들이 한 입 모아 추천하셨던 어느 대형 정형외과 병원으로 방문했다. 내 상태를 보시더니 얼마나 힘이 들었냐면서 같이 공감하고 위로해주셨는데 그동안 쌓았던 서러움이 터지면서 눈물이 났었다.


선생님께선 검사를 확실하게 해 보자고 하셨고 꽤나 오랜 시간을 걸쳐 내 허리와 몸 상태를 꼼꼼하게 검사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몇 분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때 갑자기 한 간호사의 부름을 들었다.




"코지오님과 보호자 가족분들께선 진료실로 들어와 주세요."





- (2) 편에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