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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오 Sep 06. 2020

'하반신 마비'에서 배운 근성 (2)

10대의 마지막에서 경험했던 극복의 정신


"코지오님과 보호자 가족분들께선 진료실로 들어와 주세요."




  간호사가 나와 우리 가족을 진료실로 안내해주었다. 들어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환대해주었고 나에게 말했다.


"긴장되시죠?"


"네..."


  혹시라도 나쁜 결과가 나왔을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


"일단 두 가지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과, 더 좋은 소식이죠."


  나와 가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코지오님의 허리를 보니까 신경이 모두 손상되진 않았어요. 다행히 여기 보시면... 끝에 살짝 신경이 살아 있습니다. 잘 성형해서 관리하고 열심히 재활 운동을 하면 2%의 확률로 다시 걸을 수 있어요. 아마 전에 검사했던 곳이 너무 낮은 수치니까 그냥 그렇게 흘러 보낸 듯합니다.


여기까지가 좋은 소식이고요. 더 좋은 소식은 코지오 근육량이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아주 오래 걸릴 수 있는 재활 훈련도 잘하면 단축시킬 수도 있고요. 재활 성공률이 2% 라서 낙담하실 수 있는데요. 사람일은 모르는 겁니다. 전 이 정도면 정말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요. 코지오님, 우리 얼른 다시 걸어볼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때의 말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온몸의 털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할머니께선 의사 선생님의 손을 연신 흔드시면서 감사하다고 하셨고 선생님께선 그런 할머니를 따뜻하게 다독여주셨다.


  2%가 뭐가 문제인가. 0.002%라도 해야 했다. 왜냐하면 0% 가 아니니까.






  다시 입원 절차를 밟고 다음 날 바로 허리 신경을 회복할 수 있는 여러 시술을 받았다. 그 후 회복 기간을 거치고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과 운동을 시작했다. 다들 친절하시고 상냥하셨다. 다리에 아예 힘을 주지 못하는 내가 단계적으로 따라올 수 있게 다양한 훈련들을 진행하셨다. 중간중간에 염증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도 복용하고 주사치료도 병행했다.


  생각보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동안 굳은 몸과 손상된 근육 및 인대, 힘줄을 건드리니 누가 망치로 척추를 후드려 때리는 기분이었다. 재활 운동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땀범벅이었고 중간에 구토 증상으로 고생했었다. 너무 아픈 나머지 어금니를 꽉 깨무니까 치아 보호를 위해 '마우스 피스'까지 착용하면서 버텼다.


  끝까지 버텼다. 내 가슴을 있는 힘껏 때리면서 고통을 참았고 또 참았다. 내가 잘 따라올 수 있게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도 옆에서 응원해주셨고 같이 고생하셨다. 주중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재활에 참여했으며 주말은 회복에 힘썼다. 매일매일 가족들과 찍은 사진과 친구들이랑 장난치며 찍은 사진을 보며 참았다. 마음속으로 2%가 200%가 될 수 있다고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의 내 마음이 하늘에 전해졌었던 것일까. 골반 주변의 감각이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과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이 기뻐하셨고 계속 이대로 가자고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나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한 달하고 일주일, 이주일이 지났고 골반까지 돌아온 신경이 생식기를 지나 오른쪽 허벅지까지 이어졌으며 두 달이 넘어섰던 날에는 오른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이건 거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기쁨에 취하지 않고 오직 목표에 집중했다. 나의 목표는 '모든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부지런히 계속 훈련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재활센터에서 그 어떠한 환자보다 열심히 치료사 선생님들에게 협조하며 함께 운동했다. 이런 나를 그들은 변함없는 친절함과 에너지 넘치는 칭찬으로 이끌었다. 오랜 시간 신경 치료와 재활을 같이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 온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돌아온 겨울.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재활 치료사 선생님, 우리 가족, 내 절친한 친구 몇 명이 보는 눈 앞에서 난 두 발로 일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 걷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의 감정과 느낌이 10년이 흘렀지만 생생하다. 이뤄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다 같이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희박한 2%의 개선 확률을 정말 200%로 바꿨다. 병원에서는 이런 경우는 정말 몇 없는 케이스라서 학회에 보고할 가치가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고생했다며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그동안 나를 지도해주었던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나의 손을 잡아주었고 앞으로 아프지 말고 건강하라는 말을 건넸다. 내가 아파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절친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진심으로 모두에게 고마웠다. 무엇보다 긴 시간 고통스러운 터널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날 보살펴준 우리 가족에게 정말 고마웠다. 내 손을 잡고 다시 볕이 나는 밖으로 데리고 나와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날 난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끌어안아드렸다. 특히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리고 눈물을 흘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내 10대의 마지막 19살 때 일어났다.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을 경험해보니 '어려움을 극복하는 근성'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떻게 정신력을 유지하며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 지를 뼛속 깊이 배우게 된 계기였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었나 보다. 이런 경험을 하게 돼서 그런지 어지간히 아프거나 힘들지 않으면 별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건 사회생활을 하면서 무척 도움이 되는 지혜였다. 정신과 몸이 튼튼해졌달까(웃음).


  그리고 성격이 밝아졌다. 죽을 것 같이 아프고 비참한 삶을 살아보니 그전에 내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했던 것들,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상처를 줬던 사람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자식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밝게 다가갔고 마음껏 감정을 표현했다.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괜찮다, 걱정마라 등의 표현을 서슴없이 했다. 친구들과도 더 사이 좋 지내려고 했고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친절하게 맞이했다. 이런 내 모습을 다들 어색해했지만 어느새 나란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해주었다. 성격이 바뀌니 전에 보지 못한 '감정'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누구보다 힘들었다. 정말 자살할까란 생각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세상도 다르게 보였다. 그 과정에서 나를 감싸고 있었던 하나의 막이 벗겨졌고 나는 더 큰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도 고난과 역경은 계속 나를 찾아와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것 같다.  


아픈 경험에서 얻은 근성은 지금의 나란 사람을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근성을 바탕으로 내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 이 글을 언제나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시는 할머니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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