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받고 중성 세제를 조금 푼다. 손으로 휘저어 잘 섞은 다음 외출복과 속옷과 양말을 담근다. 옷들은 서로 부대끼며 품고 있던 번뇌를 놓는다. 투명했던 빨랫물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 어두움이 진해질수록 나의 정신은 맑아진다. 손빨래는 참으로 성스러운 노동이다.
손빨래를 한지 거의 10년이 넘어간다. 2010년 때부터 했던 걸로 기억한다. 20살이었던 나는 주변 친구들보다 유독 옷에 관심이 많았다. ‘옷이 날개다’란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멋 내기에 열심히 열중했다. 옷질을 하면서 배운 게 있었는데, 기계 세탁은 옷감을 빨리 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끼는 옷이 세탁기에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 조금씩 해지니까 속상한 마음이 일었다. 그렇다고 더러워진 옷을 빨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것이 ‘손빨래’였다. 미온수에 중성 세제(퐁퐁이나 울샴푸)를 풀고 빨랫감을 담가 조물 거리면 세탁도 잘 되고 옷감도 보호할 수 있다는 글을 읽었다.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날로 집에 있던 울샴푸를 가지고 손빨래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셨던 할머니는 머스마가 웬일이냐며 웃으셨다. 살림에 무지했던 내가 적어도 빨래에는 눈이 뜨게 된 날이었다.
확실히 손빨래를 하니까 옷이 상하지 않았다. 세탁도 세탁기보다 더 잘 됐다. 더운 여름에는 물기만 적당히 짜고 척 걸쳐 널어놓으면 하루면 다 말랐다. 가을 겨울에는 기온이 낮아 빨랫감이 빨리 안 말라서 탈수만 세탁기로 했다. 처음에는 물 온도나 세제 양도 잘 못 맞췄는데 이제는 눈감고도 한다. 손빨래를 한 덕분에 내 옷장에는 6~7년 이상 된 옷들이 많다. 세월의 흔적이 있지만 깨끗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친구들은 내가 입는 옷들이 1~2년밖에 안 된 것들인 줄 안다.
옷감을 보호해주는 것도 있지만, 손빨래는 일기 못지않게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옷에는 먼지뿐만 아니라 나의 고민과 불안과 걱정이 배어 있다. 밖을 나돌며 무의식적으로 들어앉은 생각 및 감정 덩어리들이 섬유 속 깊이 박혀 있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무게를 더한다. 시간이 흐르면 지워지지 않는 번뇌로 변하여 내 몸에 걸쳐진 채로 나를 옥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손빨래를 한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고 욕실로 향한다. 대야에 미온수를 받고 세제를 풀어 그 속으로 내 분신을 담근다. 내 분신에 담긴 무의미한 것들이 불려질 때까지 몸을 씻는다. 씻고 난 후 대야를 보면 물속에 쓸데없는 잡념, 후줄근한 자아, 게걸스러운 욕심 따위 등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번뇌다. 완전히 빼내기 위해 손으로 옷을 주무른다. 번뇌를 보글거리는 거품 안으로 최대한 밀어 넣을 수 있을 때까지 밀어 넣는다. 그리고 맑은 물로 여러 번 헹군다. 더 이상 탁한 것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의 정신은 홀가분해진다. 나는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세탁기가 발명되기 전,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께서도 밥벌이와 양육과 시집살이의 서글픔을 손빨래로 삼키셨다. 여름에는 더운물에, 봄가을에는 미지근한 물에, 겨울에는 차가운 물에 당신들의 고운 손을 적시며, 겹겹이 쌓인 번뇌를 씻어내셨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시며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으셨다. 그 힘으로 가족을 보살피셨다. 우리가 현재에 머물 수 있는 이유다.
지금까지 손빨래를 업신여겨왔다면 이번 기회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직접 해볼 것을 추천한다. 비비고 주무르고 헹구는 과정에서 당신 마음에 쌓인 번잡한 흔적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마음이 온전해야 굴곡졌던 오늘을 멀리 보내고 새로운 다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손빨래는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다. 잡념과 고난으로 뒤엉킨 번뇌를 씻어내는 성스러운 노동이다. 그래서 손빨래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