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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분 Dec 28. 2022

남편전상서



사랑하는 나의 남편,

오늘은 부대껴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당신께 편지를 써요.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지요.

당신은 나의 환한 웃음에, 나는 당신의 다정함에 이끌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혼을 약속했었죠.

부부가 되자마자 우리에게 찾아온 첫째 아이는 어느덧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고, 2살이 채 차이가 나지 않는 둘째 아이는 저를 안아달라며 빼액 소리지를 만큼 컸네요.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아주 밀도가 높았지요. 결혼 3주년에 두 아이와 함께한 사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아주 섬세하면서도 신속하게 손을 놀려 기포가 생기지 않게 붙이는 휴대전화 보호필름처럼, 숨돌릴 틈도 없이 내달려온 우리의 유대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까요.

아이들 입히고 먹이느라 단벌신사가 된 우리, 소고기 먹자며 기세올리다가도 삼겹살로 만족하는 우리, 밥이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해치우듯 식사하는 우리. 어딘가 꾀죄죄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요. 언젠가 아이들이 우리 품을 떠나고 우리 둘만의 시간이 일상이 될 때면, 지금 이 시절이 그리워질 것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매일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지난 하루를 벌써 그리워할 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그 예감은 확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어요.



부모가 되고보니 우리 둘이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혹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알았을 서로의 모습들을 하루가 머다하고 마주했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아마 그 어떤 관계에서보다 가장 빨리, 가장 많은 모습을 보여준 사이가 아닐까 싶어요.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모습들이 참 많았는데, 당신도 그랬을까요?

편지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나의 남편 당신을 생각하며 쓰는 편지인 만큼 우리 이야기에 집중하자고 다짐했어요. 헌데 그러자니 부모로서의 우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그러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길 바라요.



부모가 되어 사는 일은 물이 가득찬 항아리를 짊어지고 눈 덮인 산을 오르는 일같았어요.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은 아이의 새하얀 마음에 선명히 새겨지는 발자국이었고, 이따금 작은 난관이라도 맞닥뜨릴 때면 등 뒤의 물이 왈칵 쏟아질 듯 위태롭게 느껴졌어요.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의 말간 미소는 눈 위로 부서지는 햇살같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노심초사하면서도 이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 하나만으로도 족할 거예요.

우리는 함께 걸으며 어느 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자책을 뒤집어쓰고 울기도 했더랬지요.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는 거겠지요.



선택과 집중.

인생에서 이 두가지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아마 못해낼 일이 없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이것에 능하지 못해서 언제나 크고 작은 후회 속에서 살고 있어요. 대개 충동적인 선택을 하던 버릇은, 내가 택하지 않은 길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한 번 느낀 뒤로는 내 모든 선택을 못미덥게 만들더군요. 그렇게 모든 것에 전전긍긍하게 된 저는 결혼과 두 번의 출산 앞에서 격류에 휩쓸리는 나무토막마냥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제 곁에 당신이 있었지요.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알던 당신. 꼭 내 머릿속에 들어와있는 것만 같던 당신.

그런 당신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는데,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더군요.

당신이 내게 온 마음을 쏟고 있었다는 것, 당신의 하루에는 내가 전부였다는 것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당신의 마음을 미처 가늠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알면서도 마냥 즐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사랑받는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땐 정말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당신에게 못되게 굴었나봐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 잘 해낼 수 없을 것같은 불안함, 막막함같은 것들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을 탓하는 것이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당신이 예전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가 힘든 것이라며 떼를 쓰기도 했지요. 그러다보니 가끔은 원망이라는 감정이 거대한 폭포가 되어 머리 위로 거세게 쏟아지는 것같기도 했어요. 내가 만들어낸 오물이 나를 덮친 셈이지요. 온몸을 적신 그 감정은 쉽게 마르지도 않데요.



마음이란 것은 한정된 자원이어서 아이들이 생기면 당연히 나눠쓰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리 하면서 왜 당신에게는 그러지 말하며 심술을 부렸을까요? 꼭 빚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감사하기만 하면 될 일인데, 무얼 그렇게 욕심을 내고 또 냈을까요. 힘들었지요? 미안합니다. 스스로에게도 부족한 내가 엄마도 되고, 아내도 되려하니 버겁습디다. 못난 줄 알면서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어요. 오직 아이만 보고있고, 그것마저도 제대로 해내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어요. 나는 아마 평생 그럴 겁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서 계속 그럴 것같아요. 사과하려던 것도 맞지만, 참고하시라는 측면에서도 씁니다. 얄미워도 어쩝니까, 이런 내가 당신 부인인 것을. 모쪼록 앞으로도 건투를 빕니다.



내가 당신의 다정함을 늘 목말라하듯, 당신은 당신을 향한 나의 환한 미소가 보고싶겠지요.

그 하나를 위해서 생떼같은 나의 투정과 끝모를 집안일과 더러 숨이 막히기도 하는 육아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았음을 알아요. 서툰 나와 달리 당신은 선택과 집중에 능한 사람이니까요.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필요할 때 인내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 중심에 내가 있다는 것이 여전히 얼떨떨하기도 해요. 나는 대체로 운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편이지만, 삶의 주요 변곡점마다 감사한 방향으로 흘러왔어요. 당신 역시 커다란 변곡점이었지요. 당신은 나를 당신 자신처럼 여기며 나의 기쁨, 슬픔, 설렘, 고뇌, 희망, 두려움까지 모두 나눠가져주었어요. 그러고보면 당신에게만큼은 나의 미소가 아주 비싼 재화였네요.



자기 전 맥주 한 잔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쉬이 행복을 손에 쥐는 당신으로서는, 매사가 어렵고 지나간 시간들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는 내가 의아스럽기도 하겠어요. 때로는 나조차도 내가 당황스러운데 당신은 오죽할까요?

혼자 살 때의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하하호호 파도를 타다가 집에 돌아오면 꼭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생각에 빠져들곤 했어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들은 아무리 해도 늘 새로운 문제집을 푸는 것같았어요.

그렇다고 그 생각을 멈출 순 없었어요. 그 답을 찾아야만 살 수 있을 것같았거든요. 여전히 그 질문은 내 하루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요. 당신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집에서 그 질문에 맞서려니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네요. 고민하는 나야 그렇다손 쳐도, 지켜보는 당신이 겪을 괴로움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니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집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위안을 얻을 때가 있어요. 아이들이 잠든 밤, 왁자지껄하던 거실에 우리 둘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때면 '이것으로 되었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이 생기더라구요. 묘하게도 그런 순간들이 새롭게 생각할 힘을 줘요. 혼자 있던 집에서는 허공을 향해 무엇을 잡아야할지도 모른 채 손을 뻗어대는 기분이었다면,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잡아야할 어떤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아요. 당신에게 한 가지는 약속할게요. 영 포근하지는 못해도, 기쁘거나 힘들 때 생각나는 동반자가 될게요.



나의 집이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난 이사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오래오래 잘 가꾸며 살아보려 해요. 손끝이 여물지 못해 서툰 것이 많겠지만, 혼자가 아니니 크게 걱정은 안되네요. 조금은 걱정된다는 말이기도 해요.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다시 한 번 건투를 빌어요.

사랑해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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