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입 시험 결과 발표 _ 불합격의 기로에 섰을 때
그런데....
대자보에 붙은 합격자 명단. 분명히 거기 있을 줄 알았던 내 이름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수험번호 그리고 내 이름 석자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히 17명의 합격자 명단이 맞는데, 그 안에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 다른 과에라도 잘못 올라갔나 싶어, 다른 학과들의 명단도 모조리 훑었다. 동명이인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 석 자가 보이길 간절히 바랐다. 이름이 어디 숨겨져 있나 싶어 지저분한 게시판 뒷면까지도 확인하려고 게시판 뒤를 돌아갔다.
햇빛이 닿지 않아 음침한 게시판 뒷길, 포장되지 않은 발밑 흙길엔 쓰레기며 담배꽁초가 나뒹굴었다. 게시판 정면의 화려하고 깔끔한 느낌과는 다르게 뒷면은 음침함과 지저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서 나무판자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낙서라도 뒤적이며 내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집요하게, 간절히 내 이름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시험을 꽤 잘 봤다. 객관식 문제들이었고, 무난하고 평이한 수준이었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차분히 문제를 풀었고, OMR 카드도 두 번이나 확인했다. 시험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모든 문제를 확실하게 풀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550명이라는 경쟁자들 속에서도, 합격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 이름이 없는 걸까.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용기를 내어 뚜벅뚜벅 행정실을 찾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기... 오늘.... 편입 합격자 발표... 때문에요..."
"아, 나가셔서 정면에 보이는 중앙 게시판 확인하세요."
"거기... 제 이름이 없어서요."
"학생, 그건 떨어진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정신이 멍해졌다. 바보다. 나도 안다. 떨어졌다는 걸. 그런데 왜 행정실에 갔을까.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을까. 어쩌면, 아직 이 현실이 믿었지지 않아서 누군가로부터 다시 한번 불합격임을 확인을 받고 싶었던 걸까?
행정실 직원은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자신의 모니터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교에 품었던 기대와 희망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몸에 힘이 풀렸다. 행정실 건물 앞, 시멘트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 바닥의 차가움이 엉덩이로, 허리로, 뼛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머릿속도, 몸도 차갑게 얼어붙은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벽에 몸을 기대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내 생각도, 감정도, 몸도, 시간까지도...
덜덜 떨리는 몸, 딱딱 부딪히는 이. 못 견디게 추워질 무렵, 내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드르륵... 드르륵...
삐삐. 집 전화번호였다. 엄마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결국 삐삐를 보낸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너 어떻게 된 거니?"
"엄마... 내 이름이 없어. 뭔가 이상해."
"... 떨어졌나 보네. 어서 집에 와. 밥이나 먹자."
짧고 담담한 엄마의 말이 이상하게 야속하기도 했지만 나름 안심도 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며칠간 나는 심한 몸살과 고열로 앓아누었다. 사경을 헤맬 만큼 끙끙 앓고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영어 편입 시험 문제를 다시 풀어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틀린 걸까. 나는 분명 다 맞았을 텐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뒤,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듣더니 친구가 갑자기 흐느끼며 울음을 터트렸다.
"야... 내가 떨어졌는데, 네가 왜 우는 거야?"
"나 알거든. 진짜로 알거든! 네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근데 네가 좌절할까 봐, 네 인생에서 자신감을 잃고 살게 될까 봐... 너 괜찮아? 너 마음 진짜 괜찮냐고!"
그때서야 알았다. 그 친구가 얼마나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친구의 속 깊은 걱정 어린 물음에, 처음으로 나는 내 감정을 돌아보았다.
나 괜찮은 걸까?
놀랍게도, 나는 더 이상 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내가 문제를 풀 때, 어떤 문제에서 실수가 있었을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빠르게 정리됐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같은 후회는 조금도 없었다. 작년 한 해 정말, 더 이상 쥐어 짤 힘도 없을 만큼 모든 걸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결과 앞에서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을 계속 응원하고 있었다. 아쉬운 결과였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떠한 절망이나, 좌절도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이만큼 해냈고, 이 정도의 치열한 노력을 다 했기에 앞으로도 어디서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까지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친구가 내게 걱정했던 그런 감정은 일체 들지 않았다.
더 이상 학교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복학을 결심하고, 1년간 먼지 쌓인 불어 전공 책을 다시 꺼냈다. 첫 페이지를 펼쳐 불어 알파벳부터 다시 읽었다. 아, 베, 세, 데…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예전엔 죽어도 못할 것 같았던 불어. 그런데 이번엔 겁이 나지 않았다. 영어처럼, 이 언어도 정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고, UN 국제기구에 도전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도 정신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한참 불어공부에 재미가 붙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OO대학교 행정실입니다. 축하드립니다. OOO님, 추가 합격되셨습니다."
"... 아,...... 네......"
믿기지 않았다. 왜 이제야 연락이 온단 말이지?
어리둥절하고 시큰둥하게 들렸을 내 반응에 직원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학생, 등록하실 건가요?"
"네... 언제까지죠?"
이렇게 해서, 나는 희망했던 학교를 뒤늦게 입학했다.
불과 일주일 사이, 불합격과 합격을 모두 경험했던 이 과정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리 인생에서 합격이 성공이고, 불합격이 실패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성공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낸 나의 치열한 노력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강하고 단단한 자신감과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해피엔딩이 되기는 했다.
이렇게 입학하게 된 나의 대학 생활은 남달랐다. 1년간 다져진 공부 습관대로 대학에서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냈다. 새벽 6시부터 도서관에 가 있었다.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공부도 많이 했지만 대학 때에만 누려 볼 수 있었던 모든 경험과 활동들도 후회 없이 누렸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해 겨울을 떠올리곤 한다.
진심을 다한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의 평가나 인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믿고 지지할 수 있는가 하는 믿음이었다. 그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삶의 필수 요소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자신감이라 부른다.
자신감은 일시적인 타인의 위로나 인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 자신 스스로가 매일매일 쌓고 경험해서 이루어 가는 것이다.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흔들리지 않는 용기, 1프로도 후회 없었던 최선의 삶.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열심히 살아냈을 때의 성취감과 그 뿌듯함의 경험은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은 부분이다.
오늘도 나는 그때의 경험과 용기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냈다면 그 후에 있을 결과나 보상과는 별개로 우리는 이미 인생의 멋진 성공 조각을 이루어낸 것이다.
#불합격과 합격#대학편입#치열한 영어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