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결과 앞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다.
그날은 편입시험 대학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두근거림과 설렘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ARS로 확인할까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ㅇㅇㅇ님, 합격하셨습니다" 전화만 걸면 ARS 기계음으로 이 말이 당장 들릴 것만 같았다. 마음이 자꾸 설레고 두근거렸다.
아니다! 학교 캠퍼스의 중앙게시판 대자보에서 수험번호와 내 이름 석자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먼지가 쌓인 삐삐도 오래간만에 챙겼다.
내가 지원한 학과의 편입정원은 정확히 17명이다. 그해 이 과의 편입 지원생만 무려 750 명이었다. 44대 1의 경쟁률. 그 경쟁률을 뚫고 17명 만의 이름이 지금 명단에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도 분명히 그중에!...
차디찬 겨울날씨라 대학 캠퍼스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뽐내고 있고, 여름엔 푸릇푸릇했을 캠퍼스 잔디 밭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얼음알갱이로 축축이 젖어있는 흙밭이었다.
학교의 랜드마크로도 유명한 캠퍼스 내의 드넓은 호수에는 살얼음이 동동 떠 있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교정은 한적했고, 모든 풍경이 유난히 아름답고 근사해 보였다.
이제 곧 나도 이 대학의 학생이 되어, 당당하게 이 넓고 멋진 캠퍼스를 누비게 될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찬바람에 여미며, 나는 본관 중앙 게시판 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편입을 준비했다. 기존에 다니던 대학은 1년간 휴학 상태였다. 새내기 대학 생활을 해보니, 전공 선택에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선생님께서 수업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불어란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꽂혀서, 나는 대학 전공 선택을 불문학과로 고집했다. 불어불문학과만 들어가면, 내 입에서도 세상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하는 불어가 술술 나올 줄 알았다.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어리석었던 걸까. 1년 동안 아무리 연습해도, 내 입과 코에서는 프랑스 교수님처럼 희귀한 콧소리 비음이나, 목젖 뒤에서 긁어내는 듯한 가래 끓는 소리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 후의 취업 전망도 막연했다. 이쯤에서 진로를 다시 바꿔야겠다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휴학계를 내고 편입을 결심했다. 재수까지 해서 대학을 갔는데 또 이리 방황을 하고 있으니 부모님께 좀 죄송했다. 당시 가장 유명하다는 편입학원을 찾아 기웃거렸지만 비용부담이 적지 않아 혼자 공부하기로 했다. 다행히 대학 편입시험은 토플식의 영어 시험이라 가능할 거 같았다.
모두들 학교로 향하는 새 학기, 나는 홀로 보라매 공원 내에 위치한 청소년 독서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휴관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날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 두 개와 벽돌만한 영어 사전, 그리고 천 페이지 분량의 영어 책 등을 넣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다녔다.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점심 저녁 식사시간을 제외한 하루 총 12시간을 공부시간으로 확보했다. 그 당시 유일한 연락체계였던 삐삐도 인간관계의 유혹들에 흔들릴까 봐 아예 차단시켰다. 그렇게 1년을 오롯이 혼자서 영어 공부에만 매달렸다.
주위사람들은 내가 영어 한 과목을 가지고 어떻게 매일 1년 12시간씩 공부했냐고 궁금해하기도 한다. 공부하다 보면 영어 한 과목이라도 할 게 너무나 많았다.
대체 뭘, 어떻게, 얼마나 공부했길래...
매일 오전 4시간 동안 헤럴드 영자신문을 읽었다. 처음에는 헤드라인만 훑다가, 점차 관심 있는 기사들을 자세히 읽으며 모든 지면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처음엔 다소 버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영어 기사를 접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독해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영자신문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매일 모든 지면을 빠짐없이 읽고, 새 표현과 모르는 단어들을 꼼꼼히 기록하며 학습을 마무리했다.
점심 후,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정확히 4시간은 토플의 문법파트를 익혔다. 난이도가 꽤 있어서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외워야 할 것들은 무조건 단어장에 기록했다.
그리고 저녁 후, 저녁 6시~밤 10시까지는 그날 정한 목표치의 토플 독해와 문제풀이를 했다. 1000 페이지 가량의 토플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끝낼 정도였으니 이 당시 내가 했던 공부량은 어마어마했던 거 같다.
공부하면서 기록한 영어 단어들은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졌다. 뜻뿐만 아니라 발음기호와 품사, 반의어와 유의어, 파생어까지도 모두 찾아서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모든 단어들은 내 하루의 자투리 시간에만 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을 때, 버스를 기다릴 때, 걸을 때의 시간은 오로지 이 단어장의 모든 내용들을 내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이동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내가 직접 만든 단어장을 수십 번, 수백 번씩 반복해서 봤다. 나의 하루는 늘 이 단어장과 함께 잠들었고, 단어장을 품에 안은채 아침을 맞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영어 공부에 푹 빠져 있었다. 영어가 재미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백 개의 단어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쌓여갔고, 내가 외운 모든 것들이 꼬리를 물며 반사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의어, 반의어, 파생어, 관련 문장들까지도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어졌고, 거대하고 복잡한 거미줄처럼 단어들 사이의 연결이 촘촘히 엮여갔다.
영어실력이 최고조에 다다를 무렵, 사람들의 말소리가 자동으로 영어로 변환되어 내 귀에 들려왔다.
만약 내가 입이 두 개가 있었더라면 한 입으로는 한국어를, 다른 입으로는 영어를 동시에 말했을 것이다.
출판사별로 TOEFL 책을 네다섯 권쯤 끝낼 즈음엔, 문제들이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땐 마치 정답이 훤히 보이는 레이저 안경이라도 쓴 듯, 몇 초 안에 정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3~4개월에 한 번씩 치르는 전국 편입 모의고사를 통해 전국에서의 내 위치를 확인했다. 영어 성적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막판에는 몇 만 명의 편입 수험생 중 전국 열손가락 안에 드는 석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전교 10등도 못해봤던 내가 영어 시험 하나로 전국 10위권에 들다니... 이 정도면 이제 어느 학교의 편입학 시험에도 안정권에 들겠다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날의 내 합격 확신은 어떠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그 어떤 허세나 교만도 아니었다. 작년 1년간 영어 공부에만 몰두하면서 나는 엄청난 실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올해 새로운 학교 편입에 대한 기대와 확신도 당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가로 100미터는 족히 될법한 어마어마하게 긴 중앙 게시판 앞에 도착했다.
각과의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는 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기대와 초조함으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합격자발표#편입#영어몰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