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단체기합으로 각인된 나의 운동 트라우마
지난 한 주간 3일 연속 혼자서 PT를 갔다. 내가 이렇게 운동에 진심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여태껏 인생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 거 같다. 이제는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며 헉헉거리는 고통도 잘 이겨내고 있고, 새로운 기구를 배울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근육통도 잘 견디고 있다. 나 스스로도 신기하고 대견해서 쓰담쓰담해주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동안 운동을 그토록 싫어했던 걸까? 내가 단순히 몸치이거나, 귀차니즘이 많은 게으름쟁이어서는 분명 아니었던 거 같다.
나에게는 운동자체가 늘 두렵고 부끄럽고 이상하리만큼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대체 그게 무엇 때문이었을지를 요 며칠간 내내 고민을 했다.
갑자기, 떠올리고 싶지 않은 힘든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체육 시간이다. 체육복을 깜빡한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당황해한다.
"오늘 체육복 안 입은 사람 다 나와!"
굵은 목소리로 외치는 분은, 오늘도 어김없이 긴 당구대 같은 지휘봉을 들고 야구모자를 쓴 건장한 체육 선생님이다.
몇몇의 아이들은 주눅이 든 채 서로 눈치를 보며 앞으로 나선다.
"지금부터 운동장 다섯 바퀴! 실시!"
어김없이 운동장 달리기로 체육 수업이 시작된다. 두세 바퀴쯤 뛰었을까, 지쳐가는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가 저 멀리서도 들리는 듯하다. 뜨거운 태양이라도 있는 날이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몸짓들로 흐느적거리기 시작한다.
몸에 좋다는 유산소 운동, 그 달리기가 내게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벌과 훈계를 주는 수단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가벼운 달리기 벌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생님의 기분에 따라 단체 기합이라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두 "엎드려뻗쳐"를 해야 했다. 2~3분쯤 지나면 운동장 바닥의 돌가루들이 손바닥에 콕콕 박히며 아픔이 밀려왔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자세가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누구든지 당구대 같은 막대로 매를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요즘엔 전신 운동으로 각광받는 플랭크 자세를 볼 때마다, 내 기억 속엔 늘 이런 섬뜩했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실내에서 단체로 받는 벌은 하필 늘 ‘투명의자’였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거나, 반 평균 점수가 낮거나, 준비물을 안 가져오거나, 교실이 더럽거나 등의 이유는 다양했다.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우리는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 말없이 자세를 잡았다. 기마자세라고도 했다.
50명 이상을 단번에 통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버티지 못하고 먼저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 아이는 대표로 나가서 매를 맞고 우리 반 모두의 기합은 끝이 났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 자세가 ‘스쿼트’라는 최고의 코어 강화 운동이라는 것을.
그냥 무섭고 두려웠다. 내게 스쿼트 자세는 벌과 징계로 인식되어 있었다.
근육을 만든다는 대부분의 운동 자세는 하나같이 고통을 동반했다. 그래야 근육의 힘이 길러진다 했다.
하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숨이 가쁘고 힘듦 보다는 이 운동들은 어릴 적부터 내가 경험하고 보아왔던 벌과 징계의 수단으로 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고스란히 수치심과 두려움의 감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운동을 운동자체로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들었다. 헬스장에 늘어선 기구들은 형무소의 고문기계처럼 보였고, 몸풀기로 하는 플랭크나 스쿼트는 내겐 어김없이 단체기합을 받는 장면들이 기억나게 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PT 선생님조차, 순간순간 무서운 교관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선생님 표정을 자주 살피면서 눈치를 봤고, 동작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주눅이 들면서 죄책감이 밀려왔다.
왜 그랬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의 트라우마에 꽉 잡혀서 늘 불안했던 것 같다.
다행히 선생님은 새로운 운동을 할 때마다 어떤 근육이 단련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셨고, 항상 바른 자세가 되도록 교정해 가며 운동을 도와주셨다. 수업이 끝나면 괜찮은지 남편과 나의 기분과 뒷 감정들을 살펴주시면서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셨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따라 했지만, 집에서 하라는 코어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건 왠지 모르는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내가 운동을 안 해서 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즈음, 꿈속에서 PT선생님은 회초리까지 들고 나타나셨다. 난 여전히 운동하는 분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꿈속에서도 두려움에 떨었고, 이젠 나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난 이제 주 1회씩 스스로 운동을 가기 시작했다. 주 1회 운동이 뭐 자랑이냐고 여전히 비웃음을 받았다. 내겐 엄청난 용기였었다. 혼자 스트레칭을 하고 기구들을 사용할 때마다 혹독한 고문과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이 불편한 감정까지 다 이겨내야 했으니깐.
나만의 기준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다. 내게 늘 한 단계 뛰어넘도록 도전할 거리들을 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혼자 가서 자꾸 시도해보곤 한다. 15킬로는 가능한데 20킬로는 아직도 지옥 같다.
수차례 도전을 하지만 여전히 또 실패다. 몸이 후덜 거리고 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있다. 그래도 내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나쁘진 않다. 다음날 재도전 욕구가 생겨서 다시 가서 시도해 본다. 언젠가는 내 몸에 근육 힘이 좀 더 생기면 성공할 거라는 믿음도 가져본다.
그 변화 속에서 내 삶도 이젠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실 선생님께 약속했던 숙제 인증을 하기 위해, 불안감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억지로 했었다.
그런데 ‘벌’이라 여겼던 코어 운동도 매일같이 하다 보니 자세가 꼿꼿하게 펴지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지 않을 때 느꼈던 불안감과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지니, 자신감도 생겼고, 아이들과의 수업도 훨씬 활력이 생기고 즐거워졌다. 나를 살피고 사랑하게 된 계기도 된거 같다.
내가 PT를 배울 때마다 스스로 부족한 학생임을 느끼다 보니, 내게서 배우는 아이들의 마음도 더 잘 헤아리게 되었다. 역시 무슨 직업을 갖든 간에 사람은 늘 평생을 배우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지난주 수업 때는 선생님께 폭풍 칭찬을 받았다. 자세가 훨씬 더 안정되고 열심히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고 해주셨다.
운동을 할 때마다 막연히 올라왔던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이 결국 오랜 시간 묵혀있던 어릴 적 과거의 트라우마였음을 깨닫는 순간 그토록 복잡했던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 감정의 뿌리를 하나씩 찾아서 브런치에 글로 정리를 하니, 이제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운동을 즐길 수 있게 된 거 같다.
나를 운동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PT선생님께 오늘은 이글과 함께 감사의 표현도 전해 봐야겠다.
혹시 누가 알랴...
내가 이러다 운동 홀릭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몸에 기름을 바르고 근육을 자랑하는 보디빌더 사진 한 장을 브런치에 띄우게 되는 날이 올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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