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나, 다른 길을 돌아 다시 아이들 앞에 서기까지
“꼬마야, 넌 꿈이 뭐니?”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선생님이요. 전 선생님이 될 거예요.”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그땐 이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세상은 학교 선생님, 집 앞 마트 아주머니, 문방구 아저씨 정도가 전부였다. 세상에는 선생님과 대통령,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몇몇 직업만 있는 줄 알았다. 당시 내 또래 남자아이들은 대통령이 꿈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나는 혼자 선생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걸 참 좋아했다.
감성이 예민해지던 사춘기 시절에는, 따뜻한 선생님들을 보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선생님’이라는 꿈도 함께 자랐다. 유치원 때는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 중학교 땐 중학교 선생님…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고, 고3이 되어서야 그 꿈은 ‘교대 진학’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다듬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뭐? 교대? 야~ 꿈도 꾸지 마라. 네가 무슨 그까짓 선생이나 되려고…”
당황스러웠다. 왜 엄마는 그토록 ‘초등교사’라는 내 꿈을 반대하셨을까. 엄마가 너무 싫어한다는 생각에 고집 한 번 제대로 부려보지 못한 채 교대지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내가 고3이던 해는 수능 1세대였다. 그 해는 수능이 두 차례 치러졌고, 복수지원이라는 새로운 제도까지 도입되면서 입시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상위권 학생들 대부분이 점수를 상당히 낮춰서 심하다 싶을 정도록 하향 지원을 했고, 그 결과 상위권 대학과 교육대학은 정원 미달 사태를 겪었다.
반면, 최하위권의 학생들이 거의 모험 삼아 지원한 상위권 대학에 합격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당황한 일부 상위권 대학들은 합격 기준 적정선을 황급히 내세우면서 성적 미달의 합격자들을 강제 탈락시키기도 했다.
나는 법대에 진학했다. ‘법대생’이라는 간판이 나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지만, 대학 선배들을 따라 사법고시며 행정고시를 흉내 내듯 준비해보기도 했다. 물론 내 길이 아님을 알았기에, 포기도 빨리 했다. 그리고 7급, 9급공무원 시험과 법원서기보까지 도전하다 결국 공인중개사 자격증 하나 손에 쥐고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너, 수능 다시 봐서 교대 가라. 엄마가 밀어줄게.”
“엄마, 지금 와서 그게 말이 돼요? 내가 지금까지 법대 다닌 건 뭐가 되는데요?”
“다 인생의 경험이라 생각하면 되지. 인생을 길게 보면 뭐 늦은 것도 아니야.”
그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모든 게 억울했고, 교대라는 말에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수능을 준비한다는 건 두려웠고, 지난날의 대학 4년이 모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체하다 보면 기업체의 신입 채용 모집에 연령제한까지 걸릴 것 같아 바로 취업을 선택했다. 그땐 사회가 정한 어떤 기준을 벗어나면 내 인생이 망가질 거라 믿었다.
나는 순간순간 교대를 그리워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고 교대로 편입해 초등교사가 된 오빠가 부러웠고, 오빠의 배우자가 교사라는 사실도 늘 부러웠다. 대학때 되지도 않을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고 교직 이수 기회를 놓친 것도 두고두고 후회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또 한 번 교대를 가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성적이 안되면 지방 교대라도 가보겠다고 다시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수능 영어는 만점이었지만, 수학이라는 높은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공교육 교사의 꿈은 접고, 대신 국제 영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S 테솔(TESOL) 대학원에 등록했다. 임신한 몸으로 매일같이 이어지는 수업 시연과 실습, 발표와 과제를 감당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치열한 과정을 악착같이 버텨냈고, 만삭으로 대학원 수료식이 있던 다음 날 첫아기를 출산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나는 공교육 교사가 아닌, 사교육 현장의 영어 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날. 강당 앞 담임 선생님들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앞에 서 계시는 선생님들이 그냥 너무 부러워서 울었다. 여전히 꿈틀거리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이 입학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면 그렇게 울기까지 하시겠어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는 오래전 알고 지내던 어느 초등학교 남자선생님의 말투가 너무 초등스러워서 목소리도 듣기가 거북했다고 하셨다. 평소에도 늘 어리광이 심했던 내가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면 그런 말투를 갖게 될까 걱정되셨단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엄마는 교대 진학 반대를 늘 후회하며 내게 미안해하셨다.
“네가 그때 교대를 갔어야 했는데…”
그 후로 엄마는 두 아이의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주시며, 내가 어떤 일이든 계속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주셨다.
지금 나는 사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나만의 방식으로 교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성장과 꿈을 이루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
최근 들어 공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고, 교사 기피 현상이 깊어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안타깝다.
아이들은 점점 더 개성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을 이끌며 수업을 균형 있게 있어가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요구할 것이다.
나 역시 한 타임에 고작 여섯 명의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도, 시작 전 분위기를 가다듬고 집중시키는 데 많은 힘을 쓴다. 아이들 6명은 하나같이 자유분방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아이들 20명씩이나 맡고 계시는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은 모든 부분에서 충분히 짐작이 된다.
게다가 극성스러운 학부모님들의 오해와 민원 사례도 끊이질 않을 테니, 그분들이 얼마나 힘드실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공교육 현장의 선생님들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그분들은 어쩌면, 내가 오래도록 그토록 원해왔던 내 꿈을 대신 살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감사하다. 교사라는 직업에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아이들과 보다 행복하게 일하실 수 있기만을 바란다.
그 길을 묵묵히 지키며 우리 아이들을 맡아주고 계시는 모든 교사들께, 고맙고 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교사#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