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강간 01

나는 강간을 모른다

by 유리


테스트기 주세요.
뭐라구요?
테스트기요.
어떤...?
임....
아, 네. 밑에 있어요, 보라색이 정확한데 연하게 나오고 나머지는 보통이에요.


2000원


질외요? 어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거 피임 안 돼.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초음파나 테스트기에서는 전혀 없다가 피검사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어. 정 불안하면 한 번 해 봐요. 근데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요. 할 거야? 그래요 그럼. 밖에서 잠깐 대기하고 있어요.


48,080원


병원을 다녀오셨다고요? 선생님 자책하지 마세요. 강간이 맞았는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선생님이 느끼는 게 맞아요. 네, 연락이 계속 왔지만 차단을 했고, 친구 통해서 연락한 경우는 아니고, 네 그렇군요, 신변에 위협이 있는 상황은 아니네요.


14분


8월의 뙤약볕에서 도합 58,080원을 사용하고 14분을 보낸 후에도 나는 나의 강간을 알지 못했다. 무지 상태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터넷에 ‘강간’을 검색했다. 강간에서 수도 없이 세분화됐다는 것을 처음 제대로 알았다. 성폭행, 성추행, 유사강간, 준강간, 그리고 강간. 사회과학 학도로 오랜 기간 살며 페미니즘에 목소리를 높이고 범죄자 중심 사고를 버리자는, 나름대로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부심이 무참히도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법에 적혀 있는 강간을 모두 공부하고도 나는 나의 강간을 몰랐다.

언론인으로서,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접한 무수히 많은 강간 피해를 보며 분노하고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에 대해 비판했지만 피해자는 주로 피해 후 임신의 위협까지 입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나의 2000원짜리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두 줄이 찍혔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신이 아니었으나 그날의 공포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한 여름인데도 온몸이 주최할 수 없을 만큼 벌벌 떨렸다. 테스트기를 휴지로 말아 버리면서 생겼을지 모를 새로운 생명에게 “내 인생 망했다”고 중얼거렸을 때, 그때 어렴풋이 이게 강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산부인과를 나와서 직장인들로 빼곡한 길거리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다시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문득 ‘해바라기 센터’가 머릿속을 스쳤다. 어떤 정신으로 번호를 찍어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화 속 상담자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왜 그 호칭이 그렇게 마음속 깊이 들어왔을까. 희한하게 안정이 됐다. 내가 강간 피해자든 아니든 존중해 줄 의향이 있다는 의중으로 받아들여졌다. 후끈거리는 대낮에 사람이 그득한 길거리에서 나는 14분간 지속적으로 흐느끼면서 상담을 마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담당자를 연결하고 꽤 시간이 지연됐다. 그 사이 임신이 아니라는 확답을 듣고 다시 강간에 대한 생각이 흐려졌다.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가벼운 한 잔을 했다. 만취가 아니었고 지극히 가벼운 음주였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다시 해바라기 센터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휴대폰 액정이 축축이 젖을 때쯤 상담자가 그렇게 말했다. “우선 집에 들어가시고, 천주교 성폭력 상담 센터라고 있어요. 그곳에 연락을 취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왜 자꾸 강간에 대해 함구했을까. 학구적인 궁금증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내 사연‘이 되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엄격하게 내 상황을 검열하기 바빴다.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터넷을 접속해 익명 사이트에 개략적인 나의 사연을 적고 ‘이것이 강간이 맞느냐’고 물었다. 대번에 열댓 개의 댓글이 적혔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댓글들 중 유독 인상 깊은 글이 있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만취 상태였나. 확실하게 싫다는 의사를 표했나. 강압적인 정황이 있었나. 피해 후 증거는 확보했나.

나는 그중 어떤 것에도 제대로 해당하는 게 없었다. 상당히 취한 상태였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렇지만 분명하게 취한 상황이었기에 강압적인 정황이었는지 아닌지 분간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분위기에 눌려 완강하게 싫다는 표현도 못했고, 증거는 커녕 대화방을 모조리 삭제하고 연락처를 차단해버리기까지 했다. 다시 강간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 그 상태에서 천주교성폭력상담센터를 처음 방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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