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듯하다.
그는 4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결혼을 생각했지만 아이 문제로 소원해진 상태라고 했다. 너랑 결혼하는 꿈까지 꿨다, 그런 말을 나에게 했다.
엄마는 내 이름을 ‘유리‘라 짓고 싶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작명소에서 받아 온 이름으로 여즉 살게 돼 유리는 서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 됐다. 본명이 아주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중학교 때는 나를 위한 이름을 여러 개 지어보기도 하고, 개명 절차를 알아보기도 했다. 실천으로 이루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내 이름과 마음의 거리를 둔 채 살았다. 이따금 친구들에게 원래 내 이름은 유리가 될 뻔했다고 장난 어린 고백을 했고, 친구들은 나의 날카로운 외모와 유리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며 별명으로 선점해주기도 했다.
나는 강간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강간 피해자는 가명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천주교성폭력상담센터와 통화할 때, 생각도 하기 전에 ‘유리’라는 가명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천주교성폭력상담센터에서 유리라는 이름의 강간 피해자로서 첫 방문을 하게 됐다. 엄마는 내 이름이 이렇게 사용될 줄 꿈에라도 알았을까.
상담을 진행해 준 담당자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종이 한 장을 건네줬다.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사건 경위를 간략하게 작성해야 한다는 설명을 받았다. 작성 양식 중간 즈음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거짓으로 작성할 경우 어떤 지원도 받게 될 수 없으며 받았던 지원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강간을 몰랐던 나는 그 말이 고소를 진행하고 무혐의 판결이 내려졌을 경우를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담당자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법적 근거 없이 말 그대로 허위를 호소했을 때를 의미한다고 했다. 담당자는 나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의 그런 일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이곳을 직접 연락해 내 발로 찾아온 사람이라면 작든 크든 ‘피해’ 사실을 인식했겠구나. 그리고 나도 그랬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이상 강간을 마냥 모른다, 고 하기는 어려웠다.
면담이 시작됐다. 누구에게도 못 했던 말은 아니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미 몇 번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이런 부분이 너무 수치스러웠고 싫었고 거부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 했는데, 이런 점 때문에 내가 정말 강간 피해자인지 모르겠다고 실토했다. 담당자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성관계는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장소, 시간, 사람, 방법 등 어느 한 부분이라도 원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건 강간이죠. 제가 보기에 유리 씨의 일은 강간이 맞아요.
나의 사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강간이 맞다’라고 말하는 담당자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강간을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법으로.
그 말을 끝도 없이 입술 위로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