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강간 05: 생존 서약서를 썼다

생존자가 될 수 있을까

by 유리


전세계약 사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정치에 배신당해 사람이 죽는다. 댓글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강간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가벼운 강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피해자들이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했는데 내 피해에는 너무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밥을 먹고 싶으면 밥을 먹고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그걸 구매하고 산책을 하고 싶으면 산책을 하면 되는데 죽고 싶을 때는 죽어야 하는 걸까. 가해자가 아닌 내가 왜?라고는 하지만 법적으로 가해자에게 어떤 위협도 미칠 수 없는 상황에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걸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걸 멈추면 눈물이 흐른다. 어제도 세 시간가량을 마냥 울고 오늘 퇴근 후 볕을 받았는데 그냥 문득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버스를 타고 성폭력 상담센터를 가는데 다시 눈물이 흘렀다. 상담 시간 내내 울다 지하철을 타는데 금방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결코, 그러니까 집에서 가만히 잠을 자다가 누군가 창문을 깨고 들어와 나에게 칼을 휘두르며 위협한 후 강간을 저지르고 도망가는 일 따위를 당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왜 이렇게 오버를 하는 걸까. 하지만 삶의 의지가 생기지 않는 건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다. 내 피해를 구제하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브런치를 가입하고 강간 피해를 이겨내는 과정에 대해 쓰고 싶다며 작가 신청을 한 건데, 그걸 나열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힘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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