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배려에서 시작되는 더 나은 세상
[원문장] <질서 너머>, 조던B.피터슨 저
질서 너머로 나아가는 것은 언제 행동해야 합당한지를 아는 것이다. 당신은 틀에 박힌 사회적 의무 대신 양심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나의 생각]
물결처럼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자주 생각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권리’라는 이름 아래 행동한다.
그 말은 얼마나 설득력 있고 또 얼마나 무력한가.
당연하다고 믿는 권리를 내세울 때, 우리는 흔히 양심의 목소리를 뒤로 미룬다.
조용히 속삭이던 마음속 요구는 권리의 소란에 가려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틈에서 묻는다.
사회의 공기가 흐려진 탓인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애초에 소신이 없었던 것인가.
가장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
아침 출근길, 혹은 퇴근 무렵의 지하철 안. 빼곡한 사람들 틈 사이에서 간신히 자리에 앉은 나는 이따금 주위를 살핀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어르신, 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 혹은 부풀어 오른 뱃속을 안고 숨을 고르는 임산부가 눈에 들어올 때. ‘비켜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다. ‘먼저 앉은 사람도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내 권리였다고, 나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차지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하철 안에는 분홍색 좌석이 있다.
임산부 전용석이다. 그곳은 비교적 쉽게 비워진다.
누구도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를 꺼려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표시가 없는 좌석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앉은 자의 권리가, 먼저 차지한 사람의 우선권이 양심보다 더 단단하게 뿌리내린다.
결국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는 점점 예외가 되어버리고, 당연하다고 여겨야 할 배려는 특별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된다.
마음속에서 ‘양보하라’는 속삭임이 들려도, 그보다 먼저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언제나 ‘내가 먼저 앉았잖아’다. 그렇게 우리는 매번, 조용한 양심을 져버린다.
이쯤에서 다시 묻게 된다.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진다. ‘누가 나를 알아주랴’, ‘남도 그렇게 하니까’. 이런 말들이 우리 일상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소중해지는 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타인의 시선이나 판단이 아닌, 내면 깊숙이 울리는 작은 물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혼란한 세상에서 잃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이다.
어떤 행동이 옳은가를 판단할 때, 그 기준은 법이나 권리 이전에 양심이어야 한다.
나는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권리는 나를 보호하지만, 양심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권리는 내가 누리는 것이고, 양심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다.
권리는 나를 위해 존재하지만, 양심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둘 사이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양심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했을 때, 그것은 그저 사소한 친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 이 도시도 조금은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눈빛이, 누군가의 걸음이 덜 날카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세상을 믿고 싶다.
법으로 강제되지 않는 선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온기, 그런 것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세계를 꿈꾼다.
그것은 멀고 어려운 이상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지금 당장 내가 자리를 양보하는 그 작은 순간에서 시작될 수 있다.
결국,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묻는다.
권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양심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사람인가.
권리는 나를 증명하지만, 양심은 나를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아주 작고 조용한 물음을 듣는다.
“지금, 그 자리에 앉아도 괜찮은가?”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신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