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이 필요없는 단어

그냥

by 기록하는최작가

매일 책을 읽고, 매일 글을 썼다. 이제는 그 모든 문장이 과거형이 되었다. 손에 남아 있던 키보드의 감촉도, 문장 하나를 완성했을 때의 묘한 안도도, 어느새 기억 속으로 물러났다. 그때의 나는 글을 쓰고 사유하는 일을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놀이’라고 불렀다. 규칙이 없는 놀이, 정답이 없는 놀이. 마음이 가는 대로 문장을 세우고, 생각이 닿는 만큼 세계를 확장하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글은 나에게 숨을 쉬게 했고, 생각은 나를 가볍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가끔 그 놀이가 몹시 하고 싶어진다. 아무런 목적 없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없이, 오직 나 자신을 위해 문장을 늘어놓던 그 시간. 밤이 깊어지는 것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다 문득 떠오른 문장을 메모하던 순간들. 삶이 아직 다 굳지 않았고, 생각이 아직 말랑하다고 느끼던 시절의 풍경이 그리움처럼 찾아온다.


그러나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하기 싫은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붙들고 싶다면, 싫어하는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삶은 늘 이런 식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달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씁쓸한 것을 삼키라고. 놀이를 지키기 위해 노동을 감당하라고.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기 싫은 일을 하려면, 그 일이 어느 정도는 하고 싶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고 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거나, 스스로에게 이름을 하나 붙여주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꺼내 드는 단어가 있다. 아주 짧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 바로 ‘그냥’이다.


‘그냥’이라는 말은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유를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되고, 결심을 거창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말. 나는 요즘 이 단어를 지팡이처럼 짚고 하루를 건넌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을 그냥 한다. 좋아하지 않지만 미워하지도 않으려 애쓰며, 의미를 묻지 않고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왜’ 대신 ‘그냥’을 택하는 순간, 삶은 조금 덜 무거워진다.


이 시간이 언젠가는 글감이 되리라는 믿음이 나를 버티게 한다. 지금은 밋밋해 보이는 하루, 감흥 없이 반복되는 일정,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 순간들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문장이 될 것임을 안다. 삶의 대부분은 기록되기 전까지는 평범하고, 문장으로 옮겨진 뒤에야 비로소 얼굴을 가진다. 일상의 모든 것은 결국 글감이 된다. 충분히 지나오고, 충분히 견디기만 한다면.


그래서 나는 말하지 못한 말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당장 꺼내지 않아도 괜찮다. 익지 않은 생각은 침묵 속에서 발효된다. 언젠가 적절한 온도와 시간을 만나면, 지금의 무력함과 망설임조차도 깊은 맛을 낼 것이다. 넘쳐나는 말들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삶을 정리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은 언제나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무엇을 잠시 미룰 것인가.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꿈을 먼저 두고 현실을 뒤로 미루고, 어떤 이는 책임을 앞에 두고 욕망을 뒤로 숨긴다. 방식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다.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중요함’이라는 단어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꾼다.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기 싫은 것을 먼저 해내는 일이다. 놀이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놀이를 지키기 위해서다. 글을 멀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글로 돌아오기 위한 준비다.


나는 지금,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글과 무관한 시간은 아니다. 오히려 이 침묵과 정체, 이 망설임과 체념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문장들의 원재료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놀이처럼 글을 쓰게 될 날이 온다면, 나는 이 시간을 조용히 불러낼 것이다. 하기 싫은 것을 그냥 해냈던 날들, 의미를 묻지 않고 하루를 통과했던 시간들,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오늘도 나는 ‘그냥’ 산다. 그냥 하고, 그냥 견디고, 그냥 넘어간다. 이 또한 글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니, 이미 글감이 되고 있음을 알면서. 삶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문장을 준비해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