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아닌 사람을 남기는 일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손끝으로 이름들을 밀어 올리고, 다시 내려보내며, 오래된 인연의 층위를 한 장씩 넘기듯 들여다보았다. 마치 먼지가 내려앉은 서랍을 여는 기분이었다. 그 안에는 숫자들이 아니라, 한때 나와 스쳐 지나갔던 시간들이 들어 있었다.
많다고 좋은 것이 있고, 적다고 나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들이 있다. 전화번호가 그랬다. 숫자는 많아질수록 든든해 보이지만, 막상 전화를 걸어야 할 순간에는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이름은 가득한데, 마음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어떤 날은, 수백 개의 이름 사이에서 한 사람을 찾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다시 내려놓는다.
한때 전화번호부의 숫자를 자랑처럼 여겼다. 그 숫자는 나의 넓이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스쳐 지나간 인연들, 한 번의 인사로 저장된 이름들. 그것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 단단해지는 줄 알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착각,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안도. 그러나 그것은 숫자가 만들어낸 조용한 환상이었다.
어느 날 문득, 휴대전화 속 이름들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최근 통화 목록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 몇 개, 그리고 몇 년째 한 번도 불리지 않은 이름들. 이름들은 그저 고요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닿을 수 있는 이름과 닿을 수 없는 이름. 그 경계는 숫자가 아니라 기억의 온도에서 갈렸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리를 시작했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르는 일이었다.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 , 직급, 부서라는 단단하고 건조한 형식을 하나씩 벗겨냈다.
그 자리에 사람을 놓고 싶었다. 직책이 아니라 표정으로, 직급이 아니라 목소리로 기억되는 사람들로 말이다. 어떤 이는 웃을 때 눈이 먼저 접혔고, 어떤 이는 고향 이야기를 할 때 말끝이 부드러워졌다. 어떤 이는 나보다 먼저 커피를 건네던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말없이 옆자리를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을 다시 이름으로 불러보았다.
그제야 번호들은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특징도, 기억도,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 그저 ‘누군가’로 남아 있는 사람들.
무언가를 적으려다가, 몇 번이나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이름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전화번호부에 있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없었다. 연락처는 있지만, 관계는 없었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이 번호는 과연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 지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로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터치에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지운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능성’을 내려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그 희미한 끈을 스스로 끊어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쉽게 지우지 못했다. 다만, 오래 바라보았다. 전화번호부는 어쩌면 작은 도시와도 같았다.
이름들은 건물처럼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누구의 문을 두드릴지 망설이는 사람 같았다. 불이 켜진 집도 있었고, 오래전부터 불이 꺼진 채 방치된 집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적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와 닮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깊이였다. 얼마나 자주 연락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궁금해했느냐였다. 그 사람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어 했는가. 아니면 그저 ‘알고 있다’는 사실에만 안주했던 것일까.
나는 그동안 많은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을 알지는 못했다. 관계는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쌓인다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과 밀도에 달려 있었다. 전화번호부를 정리하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전화번호부 속에서 어떤 이름으로 남아 있을까.
‘직급’으로 기억되는 사람일까,
‘필요할 때 연락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아무 설명 없이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일까.
나는 누군가의 휴대전화 속에서, 직책도, 역할도, 조건도 아닌, 그 사람의 기억 한켠에 조용히 머무르는 이름으로남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다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정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작은 변화를 알아봐 주는 것,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것.
그 사소한 것들이 쌓여, 이름 하나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몇 개의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대신, 몇 개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숫자를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온기를 남기는 사람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