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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너머의 사람

프레임을 벗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by 기록하는최작가

[원문장] <프레임>, 최인철 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내 선입견이 먼저 내 행동을 바꾸고, 그 행동이 타인의 행동을 바꾸는 이 위험한 순환을 인식할수록 우리는 지혜로워질 것이다.



프레임 너머의 사람

나는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살아온 가치관, 나만의 호불호, 익숙한 말투와 사고방식까지.
그 모든 것이 나를 나이게 만들어주는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을 대할 때의 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마주할 때의 나. 모두 똑같은 ‘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의 ‘나’로 존재한다.

행동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변화한다.
마음속 깊이서는 스스로 일관된 사람이라 믿고 싶어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상대에 맞춰 말투를 바꾸고, 표정을 바꾸고, 심지어 사고방식조차 바꾼다.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조심스럽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가 선의로 대했던 이가 어느 날 나를 곤란하게 만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다시 의심하게 되고, 그에 따른 나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프레임’이 있다.
무의식의 렌즈. 우리는 매순간 사람을 해석하고 판단한다.
매일 수업시간에 조는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게으른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그 이후엔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무심코 흘려듣게 된다.
반대로 평소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현명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진다.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진다.
심지어,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가장하게 되는 자신을 보며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쉽게 사람을 규정하려 하는 걸까?
왜 누구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걸까?
우리는 무의식 중에도 끊임없이 사람을 구분한다.
피부색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출신 지역으로, 직업과 연봉, 타는 차, 사는 집, 그가 다니는 학교와 회사로 말이다.

어쩌면 이 사회가 우리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쳐 왔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판단하고, 분류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효율성 뒤에 숨겨진 것은,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무기력함이고, 그로 인한 관계의 왜곡이다.

모든 사람은 단편으로만 보인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한 사람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가 품은 고민, 감정의 깊이, 과거의 상처와 꿈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단정하고, 때로는 외면한다.

사람에 대한 프레임은 어쩌면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 프레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떤 렌즈로 이 사람을 보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렌즈를 조금씩 벗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말한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 이 사람도 나처럼 무언가를 감추고 살아가는 하나의 인격체다.”
이 문장은 어떤 특별한 도덕이나 이상이 아니라, 단지 나의 오만함을 누르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작은 노력이다.
그 주문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만든 프레임의 모서리가 둥글게 닳기 시작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진정 필요한 태도는, 판단보다는 이해, 비교보다는 존중이다.
사람을 단정 짓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사회에서 가장 단순하고도 어려운,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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