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언제나 고마운 Lovey야.

2025.05.25.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기에 나의 기억 속에만 아로이 새겨진 Lovey의 20여 년 전 연주 모습. Chat GPT가 그림 그려주었다.)


스마트 폰도 디지털카메라도 없는 시절,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남깁니다.

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녀의 네이트온 아이디는 "Lovey"

메신저 아이디를 받아 적다가 "Lovely도 아니고 Lovey는 뭐야?"는 나의 물음에,

"그냥 귀여워 보여서 쓰는 거예여. Lovely는 너무 티 나게 창피하자나."라고 대답하던 그녀. 아담한 키, 단발머리, 안경을 쓴 큰 눈을 깜빡이며 새침한 모습을 한 전형적인 서울 아이였다.


Lovey와 처음 만나게 된 건, 내가 군휴학+기타 등등으로 4년 만에 3학년으로 복학하게 된 20여 년 전이다.

대학 3학년이면 편입이나 전과, 복학 같은 개인 사정으로 인해 보통의 학과 소속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인간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도 Lovey도 그런 부류였다.

당시 대학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학과통폐합으로 인해 학과 하나의 한 개 학년이 200명이 넘기도 했는데, 이 학교에서도 그런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 와중에 Lovey와 나 같은 이방인들을 챙겨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외된 자들끼리 서로 뭉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방인'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소속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를 나눌 사람조차 없는 외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러다 그녀를 알게 된 건, 어렵기로 악명 높은 어느 전공필수 과목의 스터디 시간에서였다.

수강생들은 몇 명씩 조를 짜서 과제를 해내야 했는데, 친한 사람들 중심으로 다 흩어지고 나서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한 전과자, 편입생, 삼수생, 복학생 등등으로 몇 개의 '나머지들의 조'가 짜였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어가게 된 스터디 조에는 역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온 Lovey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제야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서로 인사하는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학기 내내, 버려진 자들은 어디에도 도움 받을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끝없는 숙제와 시험의 고통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했고 그 결과로 생각보다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속한 '나머지들의 조'는 다른 조 보다 더 크게 웃으며 해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복학 첫 학기를 이방인들끼리의 전우애로 끝마칠 때쯤, Lovey는 나를 "큰 오빠"로, 나 보다 한 살 아래의 JWoni는 "작은 오빠"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어느새 서로 의지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오빠, 나는 피아노가 미운데 그래도 이건 내 인생 일부야."

처음 들었을 땐 너무나 놀랐던 일인데, Lovey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음대에 가려고 아주 제대로 피아노를 준비했다고 했다. 꽤나 오랜 시간 연습하고 공부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고.

피아노를 그만두고는 뒤쳐진 공부를 따라가려고 정말 아등바등 살았는데, 공부가 어려운 건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다며, 공부만 하면서 살아온 오빠들이 자기 힘든 것 좀 알아 달란다.

Lovey 자기 스스로 피아노를 그만둔 거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게 그녀의 본심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가끔 셋이 술이라도 마시게 되면... 지금은 그야말로 두 눈이 퀭한 채로 살고 있는 공대생 Lovey가 과거를 복기하며 우리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오빠들, 그쪽 세계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줄 알아요? 나도 잘하고 싶었다고. 그거 잘 됐으면 내가 여기 없어!"

그러면서도 피아노 얘기는 우리만 알고 남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Lovey였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Lovey는 나와 JWoni에게 어느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면서 시간을 좀 비우란다. "왜 그러는데?" 반문하는 나에게 Lovey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오빠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학교에서 비(非) 음대생 대상으로 콩쿠르를 하고 있거든. 나 지난주에 예선 붙어서 본선 나가. 그래서... 오빠들 시간 되면 나 보러 오라고."

"오와! 왜 말 안 했어? 수업 있어도 째고 가지. 무조건 가지!! Lovey, 이거 대상 받으면 소고기 사냐?"

나는 쑥스럽다는 Lovey를 졸라서 본선에서 연주할 곡의 이름이 '베토벤의 Passion'이라는 것을 알아내긴 했다. 사실 이름을 들어도 무슨 곡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Lovey도 '말해준들 오빠들이 알기나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알려줬겠지. (Piano Sonata No. 23, Op. 57 'Appassionata' : I. Allegro assai)

어쨌거나 나에겐 생애 첫 클래식 공연 초청이라, 이럴수록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CD를 구해서 곡을 외울 정도로 며칠 동안 계속 들어 봤다. 그런데 이 곡은 보통 사람이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Lovey가 이 정도를 할 거라고? 술자리 푸념이 허풍은 아니구먼. 엄청난데?'


본관 대강당에서 열린 콩쿠르는 솔직히 일반 학생들에게 큰 관심이 있는 행사는 아니다. 그래도 JWoni와 나는 군데군데 비어있는 강당에 앉아, 행여나 Lovey 순서를 놓칠까 봐 첫 순서부터 보고 있었다. 남들 하는 걸 들어보니 생각보다 '비음대생' 참가자 수준이 높다. 오늘 괜찮으려나 생각하는데 마침내 그녀의 순서다.

이름이 불려지자 무대 왼쪽에서 진한 무대 화장을 한 Lovey가 핑크 드레스를 입고 들어온다. 작은 얼굴에 큰 안경,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니던 평소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헉"소리가 절로 났다.

'우와 Lovey, 진짜였어.' 얘기로 들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렇게 진짜일 줄이야.


무대 밑에서 흥분해 있는 철없는 오빠들 때문인지 한눈에 보기에도 Lovey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묻어있다.

제발 잘해야 할 텐데. 이젠 숨을 죽이고 바라볼 뿐이다. Lovey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을지, 혼자 얼마나 많이 준비했을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자리에 앉더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이내 연주를 시작한다. 초반에 실수가 한번 들리긴 했는데 그래도 이 어려운 곡을 잘 풀어가는 것 같다. 제발 잘 마쳤으면...

이 정도 실력이 될 정도로 무언가를 준비했던 사람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을 때는 아쉬움이 얼마나 클까? 역시나 그녀의 술 투정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Lovey는 침착하게 연주를 마무리했고 미친 듯이 박수를 치고 있는 오빠들 쪽을 힐끗 보고는 무대 뒤로 바로 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순서가 지나 수상자 발표 시간이다. Lovey가 다시 나와서 서 있다. 하지만 비음대생 답지 않은 여러 실력자들 속에서 결국 Lovey는 아쉽게 입상하지 못했다. 발표를 듣고 있는 Lovey의 표정이 담담해서 조금은 안쓰럽다.

JWoni와 나는 얼른 출구로 가서, 무대복을 입은 피아니스트에서 다시 '우리의 Lovey'로 변신하고 돌아온 그녀를 열렬한 박수로 맞아주었다.

"CD랑 똑같이 쳤는데 상 받으려면 뭘 더해야 되는 거야? 물구나무라도 서서 쳐야 돼?" 나의 농담에 그녀는 부끄럽게 웃으며 답했다.

"오빠. 고마워요. 나 이제 다 했어. 오늘 저녁은 큰오빠가 사줘."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아마도 Lovey는 평생을 갖고 있던 피아노에 대한 애증을 어떻게든 내려놓고 싶어서 그 무대에 섰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녀의 무대를 직접 보고 기억할 수 있음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무대에 등장할 때의 놀라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된 우리

그렇게 우리 셋은 남은 학교 생활 내내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하지만 4학년이 되어서 서로 다른 세부전공을 선택했기에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졸업하기는 아쉽다며, 대학에서 MT다운 MT 한번 가보고 싶다는 Lovey의 말에 우리 삼 남매끼리 강촌으로 MT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 강촌에서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지만, 점점 헤어져서 각자 갈길을 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셋 모두 대학원을 가게 되었는데 각자 다른 연구실로, 심지어 나는 학교를 옮겨서 가게 되었다. 내가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Lovey가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큰 오빠는 될 줄 알았어. 오빠가 못 가면 누가 가? 근데 나는 오빠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 오빠 잘 될 줄 알았지만 아쉬워."


그렇게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생으로 20대 후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매우 바쁘게 지냈다. 가끔 네이트온으로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이미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같은 관심사로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또래 젊은 친구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짧은 안부를 주고받고 '언제 밥 한 번 먹자'와 같은 실천하지 않을 약속을 남발하고 있었다.

"큰 오빠"인 나는 그 당시 언젠가 논문도 많이 쓰고 새 학교에서도 잘 나가서 그야말로 금의환향할 거라는 허황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JWoni, Lovey와 함께였을 때 보다 새로운 곳에선 많이 초라해진 나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만나지 않았던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이 더 흘러, JWoni는 석사 졸업하고 회사에 갔고 나는 박사 과정으로 학교에 계속 남았다. 그리고 석사 과정 내내 우여곡절을 겪었던 Lovey는 석사 졸업을 조금 하고는 일본 박사 유학을 선택했다.

나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돌아볼 때 그녀의 선택이 얼마나 큰 진보인가 감탄했다. 피아노를 떠나 뜬금없이 공대생이 되어야 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운 생활도 했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고 무려 일본 유학파 박사님이 되려는 그녀다.

그녀가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 것이 대견했고 그곳에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머지 조'에서 시작한 우리는 이제 다들 자신만의 튼튼한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Lovey에게 갚아야 하는 빚

그렇게 멀어지기만 하던 우리 셋이 다시 만나게 된 건, 학부 졸업 이후 무려 7년 뒤, 우리 셋 중의 첫 결혼을 하는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서였다. 때마침 한국에 온 Lovey의 시간에 맞춰 신촌 어느 술집에서 아내 & 삼 남매가 모여 청첩장 모임을 했다.

오랜만에 근황을 들어보니 모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고 그냥 그 나이 때에 맞는 희로애락이 있었다.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Lovey도 대견했다. 정말 많이 컸다.

Lovey는 "큰 오빠 결혼하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해. 진짜 친오빠가 결혼해서 가버리는 것 같아."라고 했다. 여동생만 하나 있는 맏딸인 Lovey가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게 신기했는데, 여동생 없는 나는 그런 반응이 내심 고마웠다.

그녀는 우리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작은 컵 세트를 우리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는데, 너무 작고 귀여워서 차를 마시기에도 아까운 커플 컵 세트다.

결혼식을 잘 치르고 신혼살림을 꾸리면서, 아내는 Lovey의 선물이 꽤나 맘에 들었던지 한동안 식탁 위 장식으로 놓아 둘 정도였다.

이 작은 선물 덕에 Lovey가 우리 결혼을 축하해 준 순간을 축의금 장부를 보지 않고도 바로 떠올릴 수 있으니 그녀의 센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그날은 우리 삼 남매가 함께 만나는 마지막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삼 남매는 각자의 삶을 살면서 서로에게서는 멀어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점점 없어지고 연락도 뜸하고, 추억은 여전히 기억 속에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JWoni와는 이미 연락이 없어진 지 오래인 데다 Lovey는 박사 졸업하고 나서도 일본에 계속 남을 생각이라 당분간 한국에 돌아 올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 삼 남매는 서로에게 '다 큰 어른의 코흘리개 시절 친구'로 남게 되는 느낌이다. 사실 그게 어린 시절 추억의 일반적인 마지막 장면이니까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Lovey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녀는 마치 결심이라도 한 듯 나에게 매년 연말에 꼬박꼬박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소엔 완전히 잊고 살다가 겨울마다 일본에서 안부 메시지가 오면, 반가움이 느껴지는 동시에 일종의 미안함이 느껴지곤 했다.

Lovey는 나를 기억해 주는데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는 생각에,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답문을 가능한 길게 남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빚진 것 같은 그 마음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알람까지 맞춰놓기도 했는데, 결국 나는 꾸준하지 못했고 Lovey는 늘 나와 내 가족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그러던 중 나는 회사 주재원으로 선발되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되고, 2년간의 미국 생활을 해보니 이민자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달픔과 외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야 Lovey의 연말 메시지가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온 큰 오빠에게도 힘겨운 이민 생활인데 우리 막내 Lovey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홀로 헤쳐 나왔을까.

그녀의 프로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친구들과 행복해 보이는 순간은 한국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이민자가 아무 노력 없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게 되었다.

Lovey가 전해준 이야기들도 유학생 입장에선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다. 너무 예쁘다는 조카들과 동생 부부 이야기, 온 가족이 자기를 보러 일본에 놀러 왔다는 이야기 등은 그저 일상의 일로 치부하기엔, 혼자 살고 있는 유학생은 너무 신나서 여기저기 떠들고 싶었을 거다.

나는 Lovey의 메시지에 더 신나게 맞장구 쳐줬어야 했다.


언젠가 나는 Lovey에게, 여기 미국에 와보니 네가 일본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나 혼자라도 일본에 가서 Lovey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이 아닌 봄에 받게 된 Lovey의 마지막 메시지

하지만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정착하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지내는 통에 나는 어느새 일본에 가겠다는 다짐을 금세 잊었고 또다시 Lovey가 '먼저' 보낸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매년 그랬듯 서로 '새해 복 많이'를 기원해 주고 언제 한번 보자는 막연한 약속을 남기고 그렇게 또 다음 해를 기약했다. 좀 아쉽지만 '그래도 이제 한국에 왔으니 언젠가 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그다음 해 겨울에 Lovey에게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려 6개월이 지난, 불과 며칠 전인 5월 말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5월 마지막주 월요일은 휴가를 내고 회사를 쉬었다.

나는 아침에 밖에 나가서 볼일 좀 보고 오후에는 브런치 글이나 쓸 생각으로 혼자만의 휴일 일과를 이미 정해놓았는데, 아침 일찍부터 Lovey의 메시지가 왔다.

'연말이 아닌데 웬일이지? 아... 또 내가 늦었네'라고 생각하며 메시지를 클릭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났다. 그건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메시지는 그녀의 가족이 보낸 Lovey의 부고였다.
그녀의 이름으로 "별세하셨습니다."라고 쓰여있었다.


한참을 쳐다봤다. 믿을 수가 없다. 이제 고작 40대 중반인데... 아직 다 피어나지도 못한 Lovey인데. 왜?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아직 Lovey에게 갚지 못한 빚이 있는데, 한 번은 다시 만나서 예전처럼 밥도 사주고, 고달픈 일본 생활 얘기에 맞장구도 쳐줘야 하는데... 내가 미루는 사이에 Lovey는 완전히 떠나버렸다.

Lovey를 기억할 만한 친구들과는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안 되는 상태라 이 소식을 전할 곳이 없는 것도 너무 슬프다.

특히 "작은오빠" JWoni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없는 건 너무 안타까운데, 나는 망설이지 말고 혼자라도 Lovey를 만나러 가야 한다.


Lovey는 20년 전에 살던 곳 근처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7호실.

나는 이미 도착했지만 쉽사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곳으로 들어가 Lovey를 보고 나면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Lovey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나는 큰오빠니까 그래도 가야지. Lovey가 기다리고 있잖아.' 그래 계속 미룰 순 없지. 만나러 가아해.

용기를 내서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빈소에 들어가니 그녀의 영정사진부터 눈에 들어온다. 진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Lovey는 정말로 떠났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녀의 사진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젊은 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단발머리와 저 안경도 그때 그대로라서 금세라도 나를 보고 "큰오빠"하고 웃어줄 것 같다.

근데 그럴 수 없지. 이젠 그럴 수 없지. 정말로...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빈소를 혼자 찾아온 나에게 Lovey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동생이 다가와 식사를 권해주었다. 그렇게 예뻐했던 조카들의 엄마다.

나는 Lovey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상복을 입고 있는 동생부부에게 차마 대 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그들이 마음을 어찌 내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동생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동안 Lovey에게 있었던 일을 나에게 먼저 말해 주었다.

Lovey는 몸이 아픈 채로 일본에서 돌아왔고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다 며칠 전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패혈증(敗血症)은 말 그대로 피가 썩는 증상이다. 패혈증을 만든 병은 아마 긴 시간 동안 그녀의 몸속에 있었을 것이다. 패혈증이 생기도록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받았을 Lovey를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나는 Lovey의 동생과 어머니에게, 그녀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했는지, 20년 전 교내 연주회의 모습이 어찌나 예뻤는지 설명을 하다가 잠시 동안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Lovey이기에...


그녀를 추억하고 돌아가려는 나에게 그녀의 가족은 찾아와 줘서 고맙다며 인사해 주었다. 나는 더 빨리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어서 그런 인사는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후회될 뿐이다.

빈소를 떠나기 전 고개를 들어 한번 더 Lovey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렇게 나가면 정말 다시는 Lovey를 볼 수 없다. 아... 하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어서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니,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내가 미뤄왔던 약속과 연락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괴로움을 느낀다. Lovey를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오래전에 만난 사이라서... 그때는 스마트폰도 디지털카메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 했던 사진이 나에게 한 장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가진 그녀의 유일한 사진은 장례식장 입구에서 찍은 영정사진이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우리의 추억.

시간이 지나 그 아름다운 추억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봐...

나는 그것이 너무나 걱정되어서 이렇게 글로 남기기로 했다.

잊을 수 없는 Lovey.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Lovely Lovey.

잡을 수 없으니 이제 보내줘야 한다.


Lovey야. 잘 가.

아프지 않은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렴.



너를 기다리게 했던 큰오빠가.

2025.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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