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ifton Parker Feb 12. 2024

1. 글 여행의 시작

June 2021 ~ July 2023

(커버 이미지 : 단풍나무가 크게 자란 우리 집, Clifton Park, NY, 12065)


어릴 때 느꼈던 미국 : 막연한 곳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미국의 이미지는 한국엔 없는 신기한 무엇인가가 잔뜩 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비록 영어를 알아듣진 못해도, 주말마다 프로레슬링(WWE)을 찾아보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토익 점수를 위해 다녔던 영어 회화 학원에서 원주민 강사들과 어울려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아카펠라 음악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던 보이즈 투 맨, 여러 미국 락밴드 음악도 많이 좋아했었다.

특별히 관심 갖지 않아도, 내 또래들은 좋든 싫든 미국 문화에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은 멀리 있는 막연한 곳이어서,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그런 곳이었다.

대학교를 들어가고 직장에 다니기까지 긴 시간 동안, 용기, 돈, 실력이 있는 주변 몇몇 친구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가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감히 해보지 못했다.

미국 문화를 영화나 음악 혹은 음식으로나 가끔 즐기는, 그냥 그렇게 평범한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보통의 40대 직장인, 초등학생 학부모, 아빠, 남편, 아들이 나의 모습이었다.


미국 생활 2년? 짧은 여행도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되었다. 회사의 주재원으로 선발되어 가족 모두가 미국 뉴욕 주에 2년간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짧은 여행도 아니고 한 달 살기 같은 것도 아니고 무려 2년을 살다 오는 것이니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학연수 한번 가지 못한 채 한국식 영어를 하는 내가, 나보다 더 영어와 관계없이 살아온 아내와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서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언어 문제 말고도 갑자기 다른 나라로 가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우리가 겪게 될 어려움들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저 아침에 늦지 않게 출근을 하고, 노후를 위한 연금, 저축, 대출 같은 것만 생각하고 돈만 벌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아프거나 불운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목표 없는 인생을 계속 살아갈 수는 없었다.

정체된 삶을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우리는 기꺼이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민자의 삶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

(법적으로 우리는 Immigrant가 아니고 Nonimmigrant Ailen. 편의상 이민자로 지칭)


이민을 가고 나니 도움받을 곳도 없고 슬플 때 울어주거나 기쁠 때 웃어주는 친구는 당연히 없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를 한국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이럴 줄 몰랐던 게 아니다. 당연히 알고 왔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고 서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알고 있던 지식들은 크게 도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라도 말이 안 통해도, 우리 집에 전기, 가스, 온수가 나와야 하고 쌀을 구해와야 하고 차를 사야 하고 학교와 병원도 가야 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당연히 없고 아내와 아이는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집을 떠나 머나먼 곳에 이민자로 정착해서 일상을 유지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인 교포가 “그저 다른 나라로 이사 간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의 삶이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이뤄낸 것인 줄은 알지 못했다.

아마 내가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남몰래 삼켰을 한숨과 눈물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왼쪽)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오랫동안 모은 저금통을 깬 세은이. (왼쪽) 한인마트가 아닌 뉴욕 현지 일반 마트에서 파는 김치. 매우 반가웠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2년 : 여행과 이웃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외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마을의 일원이 되고 싶었고 이웃들은 그런 우리를 항상 따뜻한 인사로 맞아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이웃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이웃들이 우리를 초대해주기도 하고, 옆집 꼬마의 야구경기도 구경 가고, 가끔 식당에서 식사도 같이하고 일요일엔 미식축구도 같이 보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2년까지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휴일 때마다 최대한 여러 곳을 여행 다니고자 했다.

처음 몇 달은 비교적 가까운 뉴욕시티와 보스턴, 나이아가라, 워싱턴 DC에 가서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찾아보았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진 이후에는, 가는데 3일, 오는데 3일 걸리는 플로리다도 세 번이나 직접 운전해서 다녀왔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전체 50개 주중에 39개 주를 여행하는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여행기를 PPT 발표 자료 형식으로 만들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을 고르고 골라서, 여행 경로와 사진 그리고 약간의 추억이 담긴 글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이 자료를 아이의 학교에, 이웃들에게 보내고 동네 도서관 영어 수업시간에 발표도 하고 회사에서도 가까운 동료들에게 보내주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 여행기의 정기 구독자들은 항상 호기심과 호감을 가지고 나의 여행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2년 동안 공유해 온 수십 개의 PPT파일은 우리 가족의 여행을 기록한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며 함께 얘기를 나누었던 미국 친구들과의 추억이 묻어있기도 하다.


(왼쪽) 여행지에서 사 모은 자석 기념품들 (오른쪽) 2년간 다닌 미국의 도시들. 나는 2년간 5만 마일(=8만 km) 넘게 운전했다. (작별 발표자료에서 발췌)


작별의 아쉬움


나는 미국 친구들에게, 2년짜리 여행자가 아니라 당신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라고 항상 얘기하고 다녔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동네에 깊게 뿌리내렸던 것만큼, 이웃들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땐 그 깊은 뿌리가 한 번에 뽑히는 것 같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고맙게도 작별을 아쉬워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었는데, 모임에서 보게 되는 아쉬운 눈빛들은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내가 미국 생활에서 이룬 것 많은 것들 중에 가장 중요했던 사람 관계를 고스란히 미국에 놓고 빈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우리를 배웅하며 함께 눈물을 흘려준 사람들의 모습은 미국 생활 전체를, 아니 내 인생을 통틀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임에 분명하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번 이웃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될 그 언젠가를 기다리고 있다.


(왼쪽) 미국을 떠나기 전날 저녁 우리를 초대해 준 Gavin(개빈)의 방. (오른쪽) 함께 풋볼을 보며 얘기 나누던 Owen(오웬)과 Jean(진)의 거실.


추억을 되짚어가는 글의 여행을 시작하며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들이 매우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단지 많은 여행을 다닌 것뿐만 아니라 현지 친구들과 서로 진심으로 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살았던 미국의 그 집이, 그 동네가 나의 Hom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가족 같은 친구와 이웃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글로 쓰려는 것들은, 미국 친구들과 공유했던 지난 2년의 가족 여행과 일상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풀어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우리 동네를 떠나는 날 모두에게 했던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특별했던 그 시간을 기록해서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려고 한다.


그리고 혹시나 머나먼 타지에서 외로운 이민 생활을 헤쳐나가고 계신 분이나 앞으로 이민을 계획하시는 분이 이 글을 본다면, 우리의 경험이 작은 도움이 되면 좋겠다.



Fondly,


C. Parker

작가의 이전글 자기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