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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Apr 21. 2024

10. 여행2: Boston, MA

September 2021

 (커버이미지 : 하버드 대학교 지하철 역의 시내방향(inbound) 플랫폼, 세은이와 헤이니)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민자의 인간관계 : 모든 것을 서울에 두고 온 우리.

뜬금없지만 한국에서의 얘기를 잠깐 하고 싶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것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리는 결혼하고 나서 전셋값, 직장과의 거리 등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서울에서 특별한 연고가 없는 지역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다.

세은이가 태어나고, 네다섯 살 될 때까지는 우리 셋만 잘 지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외동인 세은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니 어울릴 만한 친구를 찾아줘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놀이터, 키즈카페, 백화점 문화센터 같은 곳에 데려가서 놀면서 운이 좋으면 맘에 드는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그렇게 자주 보면 친구가 된다. 어른들도 그런 과정 중에 서로 친분이 생긴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 이사 오게 된 아내와 나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동네 인맥을 넓혀왔다.

이웃 관계를 아이 중심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의 성향이 잘 맞는지가 중요했고 어른들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아빠"로 기억되게 된다.

어느 애는 누구 하고만 친하다는 둥 누구한테 서운한 일이 있었다는 둥 애들 사이에 잡음이 있기도 한데, 아이들이 멀어지면 어른들도 어쩔 수 없이 멀어지게 되기도 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동네에서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어른들 활동은 없고 아이들 중심의 인간관계. 이것이 우리가 한국에서 갖고 있는 인맥이었다.


우리는 그 소중한 인간관계를 한국에 모두 놔두고 뉴욕으로 왔기 때문에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뉴욕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인 데다 아는 것도 없는 곳이다. 또 하필이면 코비드 시대에 왔다.

한국에서 봐왔던 미국 소식과는 달리, 뉴욕은 코비드 행동 제약이 꽤 많은 곳이라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밀접 접촉자로 확인되 보건소(DOH, Dept. of Health)에서 격리 안내 전화가 오는데,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외국인으로서 관공서의 전화를 받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다. (나는 두 번이나 받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은이 친구를 찾으려면 회사 주재원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은 코비드 격리 상황에 아주 잘 훈련된 사람들이라 섣불리 만나자고 할 없었다.

어른들은 미국에 오자마자 백신을 맞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백신이 없었고 백신을 맞고도 감염되었다는 뉴스도 있어서 모르는 사람 만나는 건 상당히 경계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주재원들끼리 만났다가 다 같이 코비드에 걸리기라도 하면 매니저인 Jason에게 정말 민망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재택근무 중엔 외부활동을 자제하라는 공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주재원들 분위기를 볼 때, 사람들이 정말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재원들 중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하고 여행도 같이 다니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나 오고 가는 말속에서 '아, 그렇구나'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부서에서 혼자 온 나는 친분 있는 사람도 없고 업무로 겹치는 것도 별로 없다 보니 기존 주재원들 관계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은 미국에 같이 오면서 호텔 생활을 했던 동기 7명이지만, 그들도 각자의 관심사를 찾아서 흩어지고 있어서 동기들 메신저방에 뭔가 메시지를 남겨도 조용할 때가 많았다.

아마 동기들도 각자 친한 선임 주재원들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부탁하고 있을 테지. 그리고 신세 지고 있는 처지에 내가 거기에 대고 '나도 좀 데려가주시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서로에게 부담이니까.

동기들끼리라고 해도 굳이 미주알고주알 얘기 할 필요 없다는 것도, 그래서 메신저방이 조용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아쉽긴 해도... 인간관계라는 것이 내가 필요하다고 매달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다들 어느 정도 정착해서 뜸해져 버린 동기들 메신저창은, 마치 다들 뿔뿔이 흩어져버린 회식자리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누굴 탓하거나 미워할 없다. 다들 아등바등 살아남으려 하고 있다. 단지 내가 여기 남겨졌을 뿐.

어쨌든 세은이가 주말에 만날 수 있는 친구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다들 바쁜 탓에 몇 번 거절도 당해 보니 "주말에 뭐 하세요?"라고 물어보는 게 조금 위축된다. 이 상황이 나를 점점 초조하게 했다.

아내와 나는 이 외로움을 참고 지낼 수 있지만, 세은이는 어떻게 하나. 가엾은 것.

어느 날은 밑져야 본전이다 싶은 심정으로, 우리를 식사 초대해 주었던 헤이니네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헤이니 아빠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성격이 좋아서 이미 주말 약속이 있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두어 번 신세도 져서 이렇게 연락하기에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에겐 더 이상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민망해도 내 일이 아니고 세은이 일 이니까 내가 전화해야 한다.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이들끼리 잘 맞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의 가족 주말 계획에 올라타려는 행동은 정말이지... 아내도 나도 한국에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짓이다.

근데 이번엔 해야 했다.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셨어요? 이번 주말엔 뭐 하세요?"


헤이니네는 때마침 이번주에 보스턴을 당일치기로 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같이 가자고 했다.

"어, 그러세요? 저희도 한번 가 보려고 했는데 잘 되었네요. 제가 갈 만한 곳을 좀 찾아볼게요. 같이 가요."

나는 세은이가 친구랑 같이 여행 갈 수 있게 된 것에 안도하며, 일정표랑 지도 위에 동선 같은 걸 표시한 2장짜리 PPT를 보내드렸다. 같이 가게 된 게 고마워서 내 딴엔 약간 성의를 보인 셈이다.

휴우... 왜 이게 이리도 힘든가. 그래도 다행이다. 항상 엄마 아빠랑만 다녀서 재미없다던 세은이도 좋아한다.


토요일,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출발하여 보스턴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사와 학문의 도시 보스턴


보스턴(Boston, MA)은 뉴욕시티만큼이나 오래된 도시이고 미국 독립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영국 본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행했던 차별적 정책들이, 인디언 프렌치 전쟁(1754~1763) 이후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과 억압으로 까지 이어지면서 식민지에는 독립의 기운이 팽배하게 된다.

그즈음, 보스턴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몇몇 사건을 발단으로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보스턴은 미국 독립 역사의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영국 정부는 부족한 세수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그러니까 똑같은 영국인이지만 식민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높은 세금이 부과된 필수품을 강압적으로 판매했다. 보스턴 시민들은 세금 정책에 반발하여 영국에서 온 화물선에 침입, 대표적 차별 과세 품목인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건을 저지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이 사건의 초점은 "고작 마시는 차에 흥분한 사람들"이 아니고 식민지 사람들이 견뎌 온 "차별적 대우"에 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군대를 주둔시켜 식민지인들을 제압하려 했는데 이로 인해 영국과 식민지인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 이후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보스턴에서 하버드 대학과 MIT를 본 뒤 지하철로 시내로 이동, 시장과 항구를 구경하고 버스 투어로 마무리하는 일정을 정했다.

집에서 보스턴까지는 3시간 30분 거리(200 miles = 320km)이고 뉴욕시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차장은 미리 예약해야 했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하니 점심때가 다 되어 보스턴 서쪽(Cambridge, MA) 있는 하버드 대학에서 헤이니 가족을 만나서 일정을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의 첫인상은 학교라기보다는 주변과 잘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동네 그 자체 같았다.

학교  2차선 도로의 오른쪽엔 보스턴 특유의 빨간 벽돌 건물에 카페, 식당, 서점 등이 들어서 있고, 반대편 왼쪽에는 하버드 대학 건물들이 있다.

학교와 상권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섞여있는 것 같은데 명성에 비해 소박한 느낌이 들어서 예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은 설립자인 존 하버드의 동상이다.

존 하버드 목사는 식민지인들의 기독교 교육을 위해서 당시 아주 작은 학교를 크게 후원하여 대학으로까지 만들었다.

미국의 독립 이전 무려 140년 전(1636년) 만들어진 미국 최초의 대학이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되었다.

제단 위 의자에 앉아있는 존 하버드 동상의 발을 만지면 나중에 하버드에 입학하게 된다는 유명한 미신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건 당연히 알지만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다들 줄을 서서 발을 만지고 사진을 찍기 때문에 동상은 발 부분만 반짝반짝 빛이 난다.

세은이와 헤이니도 사진을 찍고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커서 여행으로라도 여기에 다시 오기를 바랐다.


동상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면 넓은 잔디밭인 하버드 야드(Harvard Yard)와 그 주변에 오래되어 보이는 옛 캠퍼스 건물들이 여럿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인 메모리얼 교회(1차 대전 참전 하버드 졸업생을 추모) 앞 벤치에서 점심으로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단체 견학 온 듯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가롭게 한참 구경했다.

하버드야드를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교회의 반대편엔 웅장한 규모의 와이드너 도서관(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이 있다.

타이타닉 침몰 사고(1912년)로 아들 해리와 남편을 잃은 와이드너 부인이 하버드 졸업생인 아들을 기리기 위해 거액을 기증하여 도서관을 건립했다는 사연이 있다.

와이드너 부인은 기증의 조건으로 아들의 방을 도서관 안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너무나 일찍 떠나버린 아들이 이곳에라도 영원히 남기를 바랐나 보다.

하지만 도서관은 재학생만 출입이 가능해서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코비드 때문에라도 실내에 들어가는 건 항상 제약이 많다. 아쉽다.


옛 캠퍼스 구역인 하버드 야드의 뒤편엔, 하버드의 현재를 보여주는 현대식 건물도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해서 전부 가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가까이 있 물리학과 강의동을 화장실을 찾느라 잠깐 들어가 봤다. 

그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은 보통 대학생들의 공간이다. 현실의 하버드 학생들이 살고 있는 곳.

큰 배낭을 메고 강의실로 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참 풋풋해 보였다. 학교는 특별해도 학생들 모습은 어디나 참 비슷하다.


(왼쪽) 설립자 존 하버드의 동상, (오른쪽) 점심 도시락을 먹었던 하버드 1차 대전 추모교회.
(사진) MIT의 그레이트 돔과 그 앞 잔디밭인 킬리안 코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MIT)

하버드 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 쪽으로 15분쯤 가면, 공학 단과 대학으로는 세계 최초로 설립된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1865년)가 있다.

지금은 공대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경영 등 명실상부 종합대학이고 하버드보다 226년 동생(?)이지만, 두 학교가 서로 경쟁도 하고 학생들의 수업도 교환하는 협력 관계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 명문대학이 한 도시 안에 그것도 두 개나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보스턴은 참으로 복 받은 곳이다.

MIT 캠퍼스 한가운데로 공용 도로가 지나가고 있어서 따로 입구가 있지 않고 담도 없어서 누구나 편하게 들어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건물 내부는 학생과 교직원만 가능)

학교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보스턴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찰스강(Charles River)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바로 앞에 있는 웅장한 건물이 MIT의 상징인 그레이트 돔(Great Dome)이다.

큰 강당이 있는 곳이고 건물 앞 넓은 잔디밭인 킬리언 코트(Killian Court)는 학교의 주요 행사를 하는, MIT를 대표하는 장소다. 지금은 학생들이 여유롭게 공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레이트 돔 양 옆으로는 대학원 건물과 물리학과 건물이 킬리언 코트를 감싸고 있는데, 건물의 외벽엔 유명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어서 아는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실 이곳은 학생들의 장난(MIT Hack)으로 유명하다. 지난 수십 년간 건물 지붕 꼭대기에 대포나 달 착륙선, 경찰차, 소방차 등을 올려놓았던 사건들이 있었고 그 외 각종 상상 밖의 창의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막상 와서 보니 이렇게 크고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할 수 있었는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

건물 뒤편의 캠퍼스 안쪽으로 들어가서, 굉장히 독특한 모습의 건물인 스타타 센터(Stata Center)와 10여 년 전 MIT 학생들의 강남스타일 패러디(노엄 촘스키 스타일)에도 등장했던 학생회관 등을 보고 기념품을 몇 개 샀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보스턴 시내로 향했다.


퀸시 마켓, 보스턴 항구


퀸시 마켓 (Quincy Market)

보스턴 지하철(Red line)은 뉴욕시티 지하철보다는 쾌적한 느낌이지만 서울 지하철로 치면 1호선이나 2호선 정도 되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과 약간 낡은 느낌. 지하철 역도 뉴욕시티보다는 깨끗하다.

South Station에 내려서 바닷가를 따라서 난 길을 천천히 걸어서 항구 쪽으로 향했다. 한 30분 정도?

가는 길에 우연히 결혼식도 구경하고 공원에서 쉬는 가족들, 바닥 분수의 아이들 등 보스턴 사람들의 주말 일상이 참 한가롭게 느껴진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생긴 지 100년 된 큰 시장인 퀸시마켓(Quincy Market)이다.

그리스 양식으로 지은 것 같은 시장 건물의 1층엔 여러 상점과 각종 먹거리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2층에는 테이블이 있는 조금 규모 있는 식당들이 있다. 한국 마트에서 병맥주로 사다 먹었던 "Samuel Adams"를 생맥주로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었다.

(Adams 가문은 보스턴의 명문 정치 집안이다. 대통령도 두 명이나 배출하였고 맥주 이름인 Samuel 역시 미국 초창기 정치인이고 보스턴 차 사건의 주동자다. 현재 그의 이름으로 판매되는 맥주는 Samuel이나 Adams 가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단지 판매자가 Samuel의 정신을 이어받고 싶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보스턴을 비롯한 미국 동북부 해안에서는 랍스터와 조개가 많이 나는데, 보스턴에서는 랍스터 롤(Lobster Roll, 랍스터를 삶아서 살을 찢어 넣은 샌드위치)과 짭짤한 조개수프인 클램차우더(Clam Chowder)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이다.

랍스터 롤을 파는 곳마다 대기줄이 길었지만 아이들에게 맛을 보여줘야 해서 아빠들이 책임감으로 기다린 끝에 드디어 손에 넣었다. "랍스터 롤 + 음료 + 클램차우더" 세트 1개는 $30 수준으로 싸지 않다.

날씨가 더우니 실내에 사람이 많고 앉을자리도 없이 서서 먹어야 했지만, 랍스터 롤은 빵도 부드럽고 꽤 맛있었다. 짭짤한 클램차우더에 찍어먹으니 상당히 맛이 괜찮았다.

하지만 아빠들의 노력 대비 아이들은 시큰둥해했는데, 10살짜리 여자 아이들은 보스턴의 맛보다는 공장에서 나온 레모네이드가 더욱 좋았다고 한다.


어쨌든 식사를 하고 나와보니 시장 건물 밖의 광장에서 거리공연을 하고 있었다.

60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사다리, 외발 자전거에 올라가서 저글링을 하고 사람들의 호응과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공연이 재미있어서 끝날 때까지 구경하고 팁을 주고 돌아섰다.


(사진) 지나가다 우연히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었던 보스턴 하버 호텔. 거대한 미국 국기 밑을 지나서 들어가면 바로 항구가 나온다.
(왼쪽) 퀸시마켓 건물. 엄청 긴 2층짜리 건물이다. (오른쪽) 퀸시마켓 야외 광장, 높은 곳에 올라가 저글링을 하는 거리 공연


보스턴 항구 (시내)

퀸시마켓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보스턴 항구다. 사실 항구 시설은 보스턴 시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 위치가 보스턴 차 사건이 있었던 장소는 아니다. 그리고 실제 물동항은 시 외곽에 있다.

동선상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여기서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볼까 한다. (아쉬웠지만 어린이 둘 데리고는 멀리 못 간다.)

보스턴 시내에 있는 항구 시설은 좁은 뱃길로 되어있다. 항만 여기저기에 작은 크기의 개인 배와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들이 정박되어 있다. 

빨간 벽돌로 된 항구 건물들 사이에 공원도 있다. 한가롭게 산책하는 사람들, 배에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우리 같은 관광객들, 좁은 항구가 북적북적하다.

매년 독립기념일이 되면 이곳에서 불꽃놀이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220살이 넘은 군함인 컨스티튜션호(USS Constitution, 1797년 취항)가 축포를 쏘며 여기 일대를 항해한다고 한다. 

그때 보스턴에 다시 올 수 있다면 미국 독립 당시 분위기를 느끼고 역사 공부가 좀 되지 않을까?

항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마지막 포인트인 오리 버스 투어 정류장으로 향했다.


Boston Duck Tour 그리고 짧은 당일치기 여행의 끝.


보스턴 오리 투어 (Boston Duck Tour)

보스턴 항구에서 바닷가를 따라 뉴잉글랜드 수족관 쪽으로 가다 보면 보스턴 오리 투어(Boston Duck Tour) 탑승장이 있다.

오리 투어라고 되어있지만 버스가 오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오리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오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수륙양용차라서 버스에 탄 채로 찰스 강에도 들어가서 구경하는 특별함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보스턴 곳곳을 버스 타고 구경하는 1시간 30분짜리 투어를 미리 예매했다. 

버스에 한국어 투어가 있다고 쓰여 있어서 아이들이 크게 기대했으나 영어 이외의 가이드는 시간대가 뜸하게 있어서 영어 가이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은이는 이것 때문에 버스를 타기도 전에 크게 실망... 아내와 나는 조금 힘들어졌다. (아 제발...)

가이드와 버스 기사는 재미있는 광대 옷을 입고 투어를 시작하고 간단한 마술도 보여주고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버스가 보스턴 시내를 가로지르며, 보스턴 커먼 공원,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 보스턴 시청사,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 등 여러 명소들을 가이드 설명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버스가 신호에 참시 멈추면, 가이드는 거리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유쾌하게 "Quak! Quak!"하고 오리 흉내를 낸다. 가이드의 오리 소리가 너무 그럴싸해서 웃긴다.

우리는 몇 번은 뻘쭘하게 쳐다보다가 어느새 따라서 같이 오리 소리를 냈다. 우리는 한국 오리니까 "꽥! 꽥!".

시내를 한참 구경하고 강변 공원을 지나 진입로를 따라가더니 버스는 드디어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와 보니 강이 생각보다 깊어서 아슬아슬하다. 가이드는 태연하게 오리 소리를 낸다. "Quak! Quak!"

강물 위를 시원하게 달리니 버스 탈 때 서운해져 있던 세은이도 조금 누그러들었고 특히, 헤이니 엄마가 강물 한복판에서 나비를 잡았을 때 정말 활짝 크게 웃었다. 

어른들은 이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 육아는 인내심이다. 다행이다.


(왼쪽) 우리가 탔던 투어 버스. 버스 뒤편에 태극기가 붙어있다. 한국인 통역은 자주 있지 않다. (가운데) 찰스강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세은이.


버스투어까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 한인 마트에 들러서 (Hmart, Burlington, MA) 다 같이 저녁을 한식으로 먹었다.

헤이니랑 세은이랑 오늘 재밌게 잘 지냈으니 다음에 또 만나서 같이 놀기로 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집 이삿짐이 정리되는 대로 헤이니네를 꼭 초대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 : 우리는 친구가 필요해

헤이니와는 두 번째 만남이었을 뿐이지만 세은이는 참 잘 맞는 친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정표현이 즉각적이고 거침없는 세은이에 비해 헤이니는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 같다.

아이들도 각자가 서로에게 유일한 한국 친구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설령 잘 안 맞는 점이 있더라도 한국에서 보다 더 많이 상대에게 맞춰 주면서 지내야 한다.

헤이니와 세은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아이들이 현실을 이미 깨우친 것 같아서 기특하안쓰럽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 세은이가 차에서 잠든 사이에,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헤이니 가족과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사실 세은이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아마 헤이니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아내들, 주재원의 아내는 남편만을 믿고 미국까지 따라왔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위치이다.

왜냐면 아내들은 남편만큼 영어가 준비된 것도 아니고 직장도 없으니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 만날 기회 자체가 없다.

정착 초기엔 신경 못 쓰고 살아왔지만, 생활이 안정되어 갈수록 아내에게도 자신만의 생활이 필요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는 독립심 강한 사람인데, 모든 것을 남편을 통해서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갑갑하겠는가.

그래서 이미 두 번이나 우리와 좋은 기억이 있는 헤이니 엄마랑 아내가 친구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두 가족끼리만 어울려 다니는 건 다른 주재원들, 특히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만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남 눈치 보고 머뭇거리면 아무것도 안되니까. 그리고 헤이니네 말고는 우리한테 손 내밀어 준 사람도 없었으니까.


밤 운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직 난장판인 우리집 거실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얼른 이삿짐을 정리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 헤이니네도 잘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다.

친구와 함께 다녀온 우리의 두 번째 미국 여행은 집에 늦은 밤 도착해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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