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2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돌비 극장 : 기생충과 윌 스미스 싸대기 사건
LA를 대표하는 장소를 하나만 뽑으라면 당연히 할리우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마지막 순서로 남겨 놓았다. 아침 일찍, LA의 북쪽에 있는 할리우드 대로(Hollywood Boulevard)의 돌비 극장(Dolby Theatre) 앞에서 헤이니네를 만나기로 했다. 돌비 극장은 종합 쇼핑몰인 Hollywood & Highland Complex에 있는데 지하 주차장이 완전히 한국식(예약 X, 후불 결제)이어서 참 반가웠다.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극장 안을 좀 둘러보았다.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곳이라 어느 정도는 들어본 이름이다. 미국 영화 산업을 대표하는 극장답게 인테리어는 꽤나 화려하게 되어있다. 극장 계단의 양 옆 기둥들에는 그동안 작품상을 받은 작품의 이름과 수상 연도가 쓰여 있다. 당연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Parasite 2020'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밋거리가 있는데, 우리가 오기 한 달 전인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거물 배우 윌 스미스가 진행자인 코미디언 크리스 락의 뺨을 때린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다. 윌 스미스의 아내(Jada Smith)는 탈모증으로 머리카락이 없는 상태로 참석했는데 크리스 락이 이걸 보고 농담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내 생각엔 그 상황이 불쾌했다면 자리에서 말로만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어쨌든 듣는 즉시 무대 위로 올라가서 뺨 싸대기를 날려버렸으니 윌 스미스가 동정받을 여지가 별로 없는 분위기다. 윌 스미스가 너무 했다. 처벌도 마땅히 받아야겠지.
그래서 TV 뉴스나 여러 심야 토크쇼에서도 윌 스미스에 대한 조롱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극장 앞에서 서로 뺨을 때리고 맞는 포즈를 하며 사진 찍고 있는 관광객도 볼 수 있었다. 나도 무척이나 하고 싶었지만 헤이니랑 세은이에게 어른들의 이 복잡한 세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하지는 않았다.
손도장을 남기는 곳 : TCL 차이니즈 극장
돌비 극장의 바로 옆은 'TCL 차이니즈 극장 (TCL Chinese Theatre)'이다. 지어진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극장으로 중국 양식의 건물이 특징인 곳이다. TCL은 극장 후원사로 중국의 전자제품 회사이름이다.
이 극장이 유명한 이유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스타들의 핸드 프린팅 때문이다. 배우들의 서명, 손자국, 발자국 등이 새겨진 시멘트 판이 극장 입구 바닥에 깔려 있어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배우나 감독에겐 이곳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건 성공의 지표이며 대단한 명예일 것 같다. 한국에선 이병헌과 안성기의 핸드 프린팅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서명을 자세히 보면 'To Sid'로 시작하면서 적은 것들이 꽤 있는데, 이것은 극장 설립자인 'Sid Grauman'에게 보내는 감사 문구이다. 그가 1950년에 사망했으니 'To Sid'로 시작되는 서명들은 대개는 오래된 배우의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굉장히 아쉽게도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직접 들어가서 만져 볼 수는 없고 길가 울타리 밖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이름 몇몇의 손도장을 사진 찍고 나서 이동했다.
할리우드 별들의 거리 : Walk of Fame
할리우드 대로의 양쪽 인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이다.
도로 바닥에는 배우/가수/감독 등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가 큰 사람들의 이름이 별 모양 보도블록에 새겨져 있다. 우리가 알만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곳에 이름이 있다. 거리 동쪽 끝쪽으로 가면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아들인 배우 필립 안의 이름도 있다. 명예의 거리는 도로의 양쪽 방향 모두에 있어서 한 방향으로 걸으며 구경하다가 길을 건너 되돌아오면서 또 다른 스타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흥미위주의 박물관이나 각종 기념품점도 많다. 우리는 오늘이 LA 마지막 날이기에 기념이 될만한 걸 좀 사야겠다. 이젠 이런 기념품점도 상당히 익숙하다. 나는 '#1 Dad'라고 새겨진 $5짜리 오스카상 트로피가 꽤나 맘에 들어서 하나 집었다.
뉴욕시티에도 있는, 한국 캐릭터 스토어(Line Friends)가 여기 할리우드에도 있다. 뉴욕시티에서처럼 미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오는 것 같다. 한국 스타일의 물건이 상당히 반갑다. 매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인기 아이돌 BTS의 핸드프린팅이 있다. 언젠가 그들이 명예의 거리나 차이니즈 극장에 이름을 남기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이름을 찾고 사진도 찍으며 거리를 걷다 보니 캐릭터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도 많다. 당연히 무료가 아닐 테니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애들도 눈치껏 잘 피해 다닌다.
바닥의 이름을 보며 계속 걷다가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느껴지는 순간 대마초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길 위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더 찾아보고 싶은 스타의 이름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분위기에선 멀리까지는 못 가겠다. 발길을 돌려 점심을 먹기로 했다.
미국 서부의 유명 햄버거 가게, 앤 아웃(In & Out)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할리우드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매장이 하나 있었다.
미국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웬만큼 큰 업체가 아니고서는 '전국'에 매장을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뉴욕에서는 인 앤 아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그냥 동네 햄버거 가게인 파이브 가이즈(Five Guys)가 LA사람들에겐 생소하지 않을까?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지역만의 독특한 것을 찾아다니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크게 보면 다 같은 그냥 햄버거 매장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르다.
인 앤 아웃 매장에 들어가서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생감자를 감자튀김용으로 절단하는 작업을 수동으로 하고 있다. 큰 감자를 한 번에 잘라주는 장치와 그 소리가 특이해서 한참을 쳐다봤다.
오후 일정이 우리가 이미 다녀온 게티 빌라였던 헤이니네 와는 여기서 헤어저야 했다. 뉴욕에 돌아가서 다음 주에 만나면 각자의 여행후기를 털어놓기로 하면서.
LA의 부촌 : 비벌리 힐스의 주택가
'미드'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던 내가 어렸을 때, '비벌리 힐스의 아이들 (Beverly Hills 90210)'이나 '비벌리 힐스 캅 (Beverly Hills Cop)'같은 한국어 더빙된 미국 드라마/영화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미국 문화를 접할 통로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게 보였을 때였다. 사실 나는 그때 그게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관심도 없었고), 비벌리 힐스(Beverly Hills)는 1920년대 이후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LA에 생긴 신흥 부촌이다. '비버리 힐스의 아이들'은 한국으로 치면 '한남동 고딩들'이나 '압구정 학교일기' 정도였겠다.
여기는 할리우드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배우, 가수등 유명 연예인이 많이 사는 곳이다. 항공 지도로 보면 그들의 어마어마한 저택이 보이는데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그건 그저 남의 집일 뿐 당연히 들어가 볼 수는 없겠지. 그래도 LA 부자 동네라고 하니 밖에서 동네 분위기라도 한번 엿보고 싶다. 헤이니네와 헤어지고 오후 시간을 비버리 힐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66번 도로의 일부인 산타모니카 대로를 중심으로 한쪽은 부촌인 The Flat가 있고, 그 반대편은 명품 쇼핑 거리다. 대로변에 가까운 집들은 그다지 고급 주택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실제 가격은 말리부에서 그랬듯 훨씬 비싸겠지만, 크기로만 치면 우리 집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주택가 도로는 2시간 무료주차가 가능했다. 고맙구나, 부촌의 인심이라니.
산타모니카 대로에 인접한 주택가 쪽에는 상당히 운치 있는 공원, 비버리 가든이 100년 된 LA 부촌의 입구를 담당하고 있다. 비벌리 힐스라고 쓰인 작은 분수대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우리 같은 관광객도 있고 결혼사진을 찍으러 온 커플도 있다. 서너 아름도 넘어 보이는 엄청 큰 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세은이가 굉장히 신기해하고 좋아한다. 가로수로 심어진 키 큰 야자수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공원 여기저기엔 고급스러워 보이는 조각작품들도 설치되어 있다. 그중엔 비틀스의 드러머인 링고 스타가 비버리 힐스에 이사 온 뒤에 직접 조각품을 제작하여 기증한 작품('Peace & Love')도 있다. 최초 기증 당시에는 공원 전시 작품 기준에 미달된다고 하여 공원 측에서 수령을 거부했었다고 한다. 정말 여기 '동네 공원' 참 어마어마하다.
공원을 나와서 차를 몰고 주택가 안쪽 방향으로 들어가 보았다. 인간은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니 언덕 위쪽으로 갈수록 비싼 저택이 있을 것이다. 구글 지도엔 언덕 높은 곳에 사는 몇몇 유명인의 집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사유지라서 입구를 막아 두었거나 높은 담이나 나무로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촌을 구경 왔지만 남의 집에 무단으로 갈 수는 없으니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내는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개인 소유가 아닌 공개된 저택(Greystone Mansion)을 하나 찾아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영화 촬영 장소인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운이 없게도 내부 사정으로 문이 닫혀있었다. 아내는 이 동네 평균 주택 가격이 $900만 달러, 백억 원이 넘는다고 했는데 LA 부자의 기운은 우리와는 큰 인연이 없나 보다.
마지막으로, 산타모니카 대로를 건너 명품 상점 거리를 잠시 걸었다. 아내는 평소 명품에 욕심을 내비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명품 거리의 이름이 '로데오 드라이브 (Rodeo Drive)'인데, 강남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이곳에서 이름을 따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상 비슷하지 않나?
우리는 비버리 힐스에서 부자들의 삶을 충분히 엿보고 나서 다시 뉴욕으로 가기 위해 저녁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쭉 뻗은 야쟈수 길 위로 일몰이 도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LA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LA는 해가 지는 곳이었다.
LA에 왔을 때처럼 돌아갈 때도 새벽 비행기를 타고 간다. LA에 올 때 받았던 3시간 대출(?)을 뉴욕으로 갈 때 그대로 상환해야 한다. 다행히 이자 없이 원금만 상환한다. 새벽 4시부터 준비해서 출발해도 시차 때문에 뉴욕에 가면 오후 2시 정도가 되고 한인 마트 들렀다가 집에 도착하면 이미 밤이 되겠지.
공항 렌터카부터 들러서 차를 반환한다. 미국에선 차를 빌려줄 때도 반납할 때도 까다롭지 않아서 좋다. 직원이 나와서 차를 쓱쓱 보고 나서 그 자리에서 인수증을 이메일로 보내준다. 차를 반납하고 탑승 수속을 받는데,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신분증 건네고 짐 검사받고 비행기 탑승까지의 과정이 조금은 수월하다. 뉴어크 (EWR)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해가 뜨자마자 바로 이륙했다.
미국의 비행기 국내선은 특별한 것 없는 단지 그냥 교통수단이라는 느낌이 든다. 올 때도 그랬지만 이코노미 승객은 기내 서비스가 전혀 없고 견과류 한 봉지와 물 한잔 말고는 모든 것에 돈을 내야 한다. 6시간이나 가야 하니 LA 갈 때처럼 스포츠나 줄곧 봐야겠다. 승무원에게 말해서 이어폰(Ear Buds)을 미리 챙겨놨다. 무료로 주긴 하는데 먼저 주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말해야 꺼내 준다. 흠... 좀 매정하다.
모든 것에 지겨워졌을 때쯤 뉴어크 공항에 도착했다. 4월 말이지만 확실히 쌀쌀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눈이 왔었는지 도로 한편으로 치워놓은 눈이 보인다. 뉴욕에 돌아왔구나.
짐을 찾고,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받았던 티켓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곧 셔틀을 보내준다고 한다.
'내 차는 잘 있었을까? 직원들이 맘대로 쓰지는 않았을까? 새똥이나 우박 맞은 건 아니겠지?'
게이트 밖 약속 장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교통이 많지 않으니 다들 자기 차를 쓰기 때문이리라. 잠시 기다린 뒤 주차장에서 보내준 밴을 잘 찾아 타고 주차장에 가서 차를 찾았다.
차가 다친 곳 없이 멀쩡해서 다음에도 이곳에 주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차 냄새를 맡으니 정말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Welcome back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