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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여행9: 게티 빌라, 그리피스 천문대 (3/5)

April 2022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Griffith 천문대 앞에 세워진 James Dean의 동상, 할리우드 사인을 등지고 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LA 여행기 2/4에서 계속


넷째 날 : 게티 빌라 & 그리피스 천문대

LA에 오자마자 이틀 동안 우리 어린이의 위시리스트를 완성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LA를 느끼러 나선다. 오늘 우리는 세은이의 교양을 높일 수 있는 곳부터 가보기로 했다.

LA_지도.jpg (사진) LA 주변 지도
미술품에 집착했던 세계 최고의 부자,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함

우리는 LA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인 게티 빌라(Getty Villa)를 제일 먼저 가기로 했다. 게티 빌라는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Getty Oil Company(현재는 매각 후 파산)의 설립자인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1976)가 세운 미술관으로 명실상부 LA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진 폴 게티는 엄청난 구두쇠로도 유명했는데, 예를 들자면, 자신을 방문한 손님들이 전화기를 공짜로 쓰는 것이 못마땅해서 손님용 공중전화를 설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타 다른 미국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자산을 관리하며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참고 :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와 카네기-멜론 대학 설립자 앤드류 멜론 )


돈을 아끼는 것과 미술품을 모으는 것에 대한 진 폴 케티의 집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었는데 1973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손자(John Paul Getty III)의 납치 사건이다.

로마를 여행하던 손자를 납치한 인질범들이 협상금을 아무리 요구해도, '이런 일에 몸값을 많이 지불하면 다른 손자들마저 위험해진다.'며 너무도 침착하게 흥정 협상으로만 몇 달을 보냈다고 한다. 참다못한 인질범들이 손자의 귀를 잘라서 소포로 보냈을 때도 섣불리 자기 돈을 송금한 것이 아니고 은행에서 4%의 이자로 일부 금액을 대출받아서 몸값을 지불했다. 결과적으로 최초 제시된 몸값을 17% 수준으로 낮춰서 구입 해결된 셈인데, 현금이 모자라서 대출받은 것이 아니라 세금 공제 한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정말 비범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심지어 납치범과 흥정 협상을 하는 중에도 미술품을 사는 데는 돈을 쓰고 있었다니 정말 비정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지옥에서 풀려나게 된 손자는 사건의 충격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에 빠지고 결국 불행하게 사망하게 된다. 세계 최고 부자의 손자만 아니었으면 납치될 일도, 얼음보다 차가운 냉정함을 마주할 일도, 마약에 취할 일도 없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이 이야기는 2017년에 개봉한 "All the Money in the World"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진 폴 게티가 그렇게 모아둔 미술품을 보러 간다.


진 폴 게티의 수집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저택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여서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거대한 미술관 게티 빌라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진 폴 게티 사망 이후엔 미술품을 관리하는 'Getty 재단'이 설립되어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었는데 게티 빌라로도 전시 장소가 부족하게 되자 현대식 미술관인 게티 센터(Getty Center)를 LA 부근 산타모니카 산 정상에 짓게 되었다고 한다. 게티 센터 역시 LA를 대표하는 미술관이고, 게티 빌라에는 그리스 및 로마 유물, 게티 센터에는 미국 및 유럽의 근현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내와 단 둘이 왔다면 두 미술관 모두 가 봤을 테지만 세은이 데리고는 어림도 없다. 아내는 두 곳 중에 게티 빌라를 선택했다.


태평양을 내려 보는 언덕 위 그림 같은 로마풍 대저택 - 게티 빌라(Getty Villa)

게티 빌라는 가기 전에 온라인 예악을 해야 하고 입장료는 무료지만 주차비는 내야 한다. 태평양 해안도로(Pacific Coast Highway)에 바로 인접한 말 그대로 '저택(Villa)'으로 들어간다. 입구 매표소에서 예약자 QR를 확인하고 언덕을 올라서 건물 지하에 주차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옛날 로마시대 느낌으로 꾸며진 커다란 노천 극장(Amphitheater)의 뒤편으로 나오게 된다. 말 그대로 엄청난 저택이다.

한국에서는 베란다 없는 작은 집이 빌라지만, 원래 '빌라'라는 말은 이탈리아 말로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의미한다. 진짜 빌라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에게 '로마 빌라'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ㄷ'자형 2층 건물 앞 연못엔 청동 조각상이 둘러싸고 있고, 그 연못 주변의 회랑이 더해져서 화려한 느낌을 준다. 곳곳에 보이는 작은 분수도 로마시대 분위기를 한껏 더해준다. 건물 분위기에 맞게 이곳의 전시물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의 것이 많다. 미국 LA에 웬 그리스, 로마인가 싶지만, 미술품에 관한 진 폴 게티의 집착과 유럽을 이기고 싶어 했던 당시 미국 사회상을 생각하면 납득이 될 것도 같다.

(왼쪽) 태평양 해안도로에 있는 게티 빌라 입구. (오른쪽) 게티 빌라 2층에서 내려다본 정원과 연못. 연못 주위로 여러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게티 빌라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 제우스 상. 석상의 얼굴과 손의 훼손은 침략자들이 일부러 저지른 것일 수 있다.

1,2층 전시공간에는 1~2천 년은 되어 보이는 로마와 그리스 석상, 도자기, 각종 보석 또는 생활 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란애서 온 페르시아 물품도 특별관에 전시 중이다.

미술 교과서에서 흔히 봤던 것처럼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 석상 중에는 코, 손/팔, 머리 전체가 없는 것이 많다. 나는 이제껏 돌출된 부분이 쉽게 손상된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설명을 읽어 보니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당시엔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되면 종교/정치적인 목적으로, 패배한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던 기념물을 점령자들이 일부러 파손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석상을 통해 신(神)이 현생에 함께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부수기 위해 쉽게 눈에 띄는 코나 손을 부쉈다고 한다. '너희의 신 같은 건 우리가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다. 이제는 너희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는 메시지를 주는 행동인 셈이다. 전쟁에서 지고 코가 깨진 제우스를 볼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겠지. 굉장히 잔인한 생각이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는 불혹의 나이 40'이 넘어도 미술관에 오면 이렇게 새로 배우는 게 많다.


엄마 아빠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안 세은이는 아직 디즈니랜드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고대인들의 역사 따위는 관심이 없다.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해서 아내는 특단의 결정을 했다.

"내가 애랑 여기 있을 테니 당신 혼자 다녀와. 다시 오지 못할 곳인데 애 때문에 관람을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이 먼저 보고 오면 그다음에 내가 갈게, 번갈아가면서 봅시다."

아... 안타까운 나의 10살짜리 소녀. 10년도 되지 않아 오늘의 선택이 후회될 텐데. 엄마 아빠는 인생에 남은 시간이 너 만큼은 많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봐야 해. 미안하지만 여기선 따로 다니자꾸나.

우리는 교대로 게티 빌라를 보고 나서, 새가 날아드는 야외극장 옆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나서 LA의 또 다른 상징을 볼 수 있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라라랜드'의 추억, 할리우드 사인과 LA의 일몰을 만날 수 있는 곳 - 그리피스 천문대

LA는 산이 없고 대부분이 평지지만 도시 외곽에는 몇 군데 높은 언덕이 있다. 그중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vatory)이다. 천문대 자체도 볼거리지만 LA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여서 여러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나온 곳이다.

특히 영화 라라랜드(2016)에 미아(Emma Stone)와 세바스찬(Ryan Gosling)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중에 그리피스 천문대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나서 밤중에 이곳을 직접 찾아오는 장면(La La Land - Planetaruim Scene)이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천문대를 소개하듯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밤하늘 구름 위 올라서 춤을 추는 장면인데 상당히 로맨틱한 분위기라서 라라랜드를 봤다면 아마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극장에서 봤던, 그리피스 천문대 배경의 그 영화는 사실 보통 영화가 아니다. 20세기 중반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 제임스 딘의 최대 히트작 '이유 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 1955)'이 라라랜드의 그 극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제임스 딘이 영화를 찍던 그 당시에도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였나 보다.

그뿐만 아니라 SF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터미네이터(Terminator, 1984)의 시작이 이곳이기도 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미래 로봇 암살자 T-800은 천문대 건물 뒤편으로 소환되어 '사라 코너'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곳은 그야말로 미국 영화 산업의 역사와 함께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천문대로 가려면 큰 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공원 같은 입구를 지나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언덕 꼭대기에 주차장이 있지만 저녁시간엔 자리가 없을 때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와서 길 가에 자리가 하나 보이길래 냉큼 주차하고 걸어 올라갔다. 정상까지 올라가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커다란 기념탑과 천문대가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LA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천문대 뒤편에 올라서 내려다본 LA는 전형적인 미국 도시답게 자로 잰듯한 도로, 사각형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도시 구획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 제2의 도시인데도 고층건물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서울이나 뉴욕시티와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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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라라랜드의 촬영지였던 그리피스 천문대 (오른쪽) 천문대 뒷편에서 바라본 LA 시내
(사진)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바라본 할리우드 사인. 언덕 정상의 건물은 통신용 전파탑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또 있는데, 미국 영화 산업을 상징하는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이 이곳에서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 사업자가 오래전에 세웠다던 이 광고판은 이제는 LA뿐만이 아니라 세계 영화 산업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천문대 앞 기념탑 주변으로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할리우드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제임스 딘의 동상도 여기에 있는데, 할리우드 사인을 등지고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0220418_193440.jpg (사진) 해가 지고 있는 LA. 오른쪽 멀리 할리우드 사인이 보인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고 조금 흐린 날씨에 구름 사이로 빨간 일몰이 할리우드 사인 뒤편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천문대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할리우드의 정취와 LA의 일몰은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밤이 되어 천문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타운인 LA 한인타운으로 갔다. 뉴저지 한인타운 보다도 더 한국 같았던 이곳에서, BTS가 다녀간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LA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4편에서 계속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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