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2
LA에 오자마자 이틀 동안 우리 어린이의 위시리스트를 완성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LA를 느끼러 나선다. 오늘 우리는 세은이의 교양을 높일 수 있는 곳부터 가보기로 했다.
미술품에 집착했던 세계 최고의 부자,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함
우리는 LA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인 게티 빌라(Getty Villa)를 제일 먼저 가기로 했다. 게티 빌라는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Getty Oil Company(현재는 매각 후 파산)의 설립자인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1976)가 세운 미술관으로 명실상부 LA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진 폴 게티는 엄청난 구두쇠로도 유명했는데, 예를 들자면, 자신을 방문한 손님들이 전화기를 공짜로 쓰는 것이 못마땅해서 손님용 공중전화를 설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타 다른 미국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자산을 관리하며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참고 :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와 카네기-멜론 대학 설립자 앤드류 멜론 )
돈을 아끼는 것과 미술품을 모으는 것에 대한 진 폴 케티의 집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었는데 1973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손자(John Paul Getty III)의 납치 사건이다.
로마를 여행하던 손자를 납치한 인질범들이 협상금을 아무리 요구해도, '이런 일에 몸값을 많이 지불하면 다른 손자들마저 위험해진다.'며 너무도 침착하게 흥정 협상으로만 몇 달을 보냈다고 한다. 참다못한 인질범들이 손자의 귀를 잘라서 소포로 보냈을 때도 섣불리 자기 돈을 송금한 것이 아니고 은행에서 4%의 이자로 일부 금액을 대출받아서 몸값을 지불했다. 결과적으로 최초 제시된 몸값을 17% 수준으로 낮춰서 구입 해결된 셈인데, 현금이 모자라서 대출받은 것이 아니라 세금 공제 한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정말 비범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심지어 납치범과 흥정 협상을 하는 중에도 미술품을 사는 데는 돈을 쓰고 있었다니 정말 비정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지옥에서 풀려나게 된 손자는 사건의 충격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에 빠지고 결국 불행하게 사망하게 된다. 세계 최고 부자의 손자만 아니었으면 납치될 일도, 얼음보다 차가운 냉정함을 마주할 일도, 마약에 취할 일도 없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이 이야기는 2017년에 개봉한 "All the Money in the World"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진 폴 게티가 그렇게 모아둔 미술품을 보러 간다.
태평양을 내려 보는 언덕 위 그림 같은 로마풍 대저택 - 게티 빌라(Getty Villa)
게티 빌라는 가기 전에 온라인 예악을 해야 하고 입장료는 무료지만 주차비는 내야 한다. 태평양 해안도로(Pacific Coast Highway)에 바로 인접한 말 그대로 '저택(Villa)'으로 들어간다. 입구 매표소에서 예약자 QR를 확인하고 언덕을 올라서 건물 지하에 주차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옛날 로마시대 느낌으로 꾸며진 커다란 노천 극장(Amphitheater)의 뒤편으로 나오게 된다. 말 그대로 엄청난 저택이다.
1,2층 전시공간에는 1~2천 년은 되어 보이는 로마와 그리스 석상, 도자기, 각종 보석 또는 생활 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란애서 온 페르시아 물품도 특별관에 전시 중이다.
미술 교과서에서 흔히 봤던 것처럼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 석상 중에는 코, 손/팔, 머리 전체가 없는 것이 많다. 나는 이제껏 돌출된 부분이 쉽게 손상된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설명을 읽어 보니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당시엔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되면 종교/정치적인 목적으로, 패배한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던 기념물을 점령자들이 일부러 파손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석상을 통해 신(神)이 현생에 함께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부수기 위해 쉽게 눈에 띄는 코나 손을 부쉈다고 한다. '너희의 신 같은 건 우리가 얼마든지 부숴버릴 수 있다. 이제는 너희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는 메시지를 주는 행동인 셈이다. 전쟁에서 지고 코가 깨진 제우스를 볼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겠지. 굉장히 잔인한 생각이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는 불혹의 나이 40'이 넘어도 미술관에 오면 이렇게 새로 배우는 게 많다.
우리는 교대로 게티 빌라를 보고 나서, 새가 날아드는 야외극장 옆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나서 LA의 또 다른 상징을 볼 수 있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라라랜드'의 추억, 할리우드 사인과 LA의 일몰을 만날 수 있는 곳 - 그리피스 천문대
LA는 산이 없고 대부분이 평지지만 도시 외곽에는 몇 군데 높은 언덕이 있다. 그중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vatory)이다. 천문대 자체도 볼거리지만 LA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여서 여러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나온 곳이다.
특히 영화 라라랜드(2016)에 미아(Emma Stone)와 세바스찬(Ryan Gosling)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중에 그리피스 천문대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나서 밤중에 이곳을 직접 찾아오는 장면(La La Land - Planetaruim Scene)이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천문대를 소개하듯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밤하늘 구름 위 올라서 춤을 추는 장면인데 상당히 로맨틱한 분위기라서 라라랜드를 봤다면 아마 기억이 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SF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터미네이터(Terminator, 1984)의 시작이 이곳이기도 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미래 로봇 암살자 T-800은 천문대 건물 뒤편으로 소환되어 '사라 코너'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곳은 그야말로 미국 영화 산업의 역사와 함께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하고 조금 흐린 날씨에 구름 사이로 빨간 일몰이 할리우드 사인 뒤편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천문대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할리우드의 정취와 LA의 일몰은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