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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여행9 : LA의 해변 & RT. 66 (4/5)

April 2022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Malibu 해변에 있는 Paradise Cove Cafe의 입구 간판)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LA 여행기 3/5에서 계속


다섯째 날 : 캘리포니아의 축복받은 해변 - Malibu, Santa Monica


어제 세은이가 미술관과 천문대에서 인내력(?)을 모두 소진했기 때문에 오늘은 탁 트인 태평양 해변을 보러 가기로 한다. 날씨가 화창하고 살짝 더운 편이라 세은이는 좋아하는데, 더위에 약한 아내는 조금 걱정된다.

LA_지도.jpg (사진) LA 지도. 말리부는 지도의 왼쪽 상단인 LA 서북쪽, 산타 모니카는 말리부 보다 조금 남쪽에 있다.
부자들의 해변 도시 : 말리부 (Malibu)

미국에 오기 전만 해도 말리부(Malibu)라는 이름은 술 또는 자동차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지 지명인지 무엇인지 조차도 몰랐었다.

말리부는 LA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 이름인데 태평양 해안 도로를 따라 긴 모양의 해변 그 자체인 도시이다. 말리부는 아름다운 해안에 미국 신흥 부자들의 별장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멀지 않은 할리우드 연예계나 서부 Tech 업계의 부자들이 이곳에 별장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석유, 철강, 철도 등으로 부를 쌓아 온 미국 전통 거부들은 동부 해안에 별장이 많다. 미국 초기엔 명실상부 미국의 중심은 동북부 지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이언맨에도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나오는데, 설정상 토니 스타크는 조만장자의 부자이니 충분히 그럴법하다. 말리부의 거의 모든 곳이 해변이지만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있지 않다. 바닷가에 있는 고급 별장들은 대부분 개인용 해변을 끼고 있어서 우리는 공용 해변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 많이 나왔던 공용 해변인 웨스트워드 해변(Westward Beach)을 가보기로 했다. 이곳은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 1968)의 충격적인 엔딩에 나왔던 곳이고, 해변의 끝에 있는 바위 절벽인 포인트 듐(Point Dume)은 아이언맨의 별장(실제로 지은 것이 아니고 절벽에 CG로 합성되었다.)이 있었던 곳이다. 호화로운 말리부 별장이 폭파되는 장면(Iron Man 3, 2013)은 꽤나 충격적이긴 했다.


태평양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해변으로 가는 도중에 살짝 고급스러워 보이는 언덕 윗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서민들 집에는 없는 나무 울타리도 있고 밖에서 보기에도 집이 예쁜 느낌인데 조각 작품까지 가져다 놓은 집들도 있다. 아내가 그새 부동산 어플을 돌려보더니 우리 집보다 훨씬 작지만 평단가가 10배도 넘는 되는 수십억짜리 집이랜다. 잔디 마당도 없고 좁은 느낌인데 역시 부동산은 집 자체보다는 위치인가 보다.

동네를 빠져나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드디어 해변에 도착했다. 막상 와보니 아직 물놀이할 만큼 물이 따뜻하지는 않아서 사람이 많지 않다.

전체적인 분위기 속초나 양양 같은 동해 바다 느낌이다. 해변에 기울기가 꽤 있고 파도도 높고 바다도 깊어 보인다. 크고 넓은 바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혹성탈출에서 봤던 황량한 느낌도 살짝 느껴지는 것 같다.


해변을 한참 걸어가면 절벽, 포인트 듐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모래가 많고 건조해서 사막 같다. 여기저기 있는 손바닥 만한 선인장들 사이로 작은 도마뱀(Gecko)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정말 사막 느낌이 든다. 뙤약볕 아래서 20분 정도 모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더니 꽤 높아 보이던 절벽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말리부 해변과 태평양 경치가 정말 장관이다. 바로 여기가 영화 아이언 맨에서 조만장자인 토니 스타크의 집이 있던 곳으로 설정된 장소다.

그렇게 우리가 포인트 듐 꼭대기에서 가족사진도 찍고 경치에 감탄하고 있는데, 바위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불쑥 나타난다.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다. '어디서 왔지?' 얼떨결에 'Hi'하고 나서 절벽 아래를 쓱 봤더니 등반 장비를 하고 절벽을 기어 올라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바위 절벽이 거의 수직인데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아내는 한번 보더니 아주 질겁을 한다.

나는 엄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You guys are awesom, crazy." 등반가들은 날 보더니 피식 웃어주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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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말리부 웨스트워드 비치. 멀리 보이는 절벽은 혹성 탈출 촬영 장소인 포인트 듐이다. (오른쪽) 포인트 듐으로 가는 길. 절벽 정상엔 등반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
20220419_133138.jpg (사진) 말리부 파라다이스 코브에 있는 해변 카페. 손님 전용 해변이 있어서 야외에서 식사도 하고 물놀이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포인트 듐을 내려와서 다시 차에 올랐다. 여기까지 왔으니 좋은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잠깐 쉬어가고 싶다. LA 사는 친구가 권해줬던 'Paradise Cove Cafe'로 향한다. 꽤 인기가 있는 곳이라 주차가 좀 힘들었지만 (심지어 식사를 해도 주차비를 내야 함) 그나마 성수기가 아닌 탓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오래된 바닷가 식당 분위기는 맘에 드는데 식사는 조금 비싼 것 같다. 하지만 말리부까지 왔으니... 뭐 감당 못할 정도로 비싼 곳은 아니다.

식당 뒤편은 손님 전용해변이다. 야외 테이블도 운치 있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는 말리부에 별장도 없고, 누군가에게 초대받을 일도 없을 테지만, 이렇게나마 'Private'한 느낌을 가져본다. LA 와서 계속 바쁘게 다녔으니 해변에 앉아서 한참 쉬기로 했다. 아이언 맨이 살고 있는 비싼 해변이라니 우리도 미국 부자 흉내 좀 내보자.


미국인들의 'Mother Road' 66번 도로, 그 서쪽 끝 LA 산타모니카 (Santa Monica)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말리부 해변을 벗어나서, LA 도심에 있는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의 해변에도 가고 싶다. 그래서 이번엔 산타모니카 해변(Santa Monica Beach)으로 간다. 말리부에서 30분 정도 남쪽에 있는데 태평양 해안 고속도로에 바로 접해있어서 운전하기 어렵지 않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접근성, 편리성, 유명세 같은 것도 있지만, 66번 도로의 종점이라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다.


5대호에 맞닿은 시카고 그리고 서부의 끝 LA를 육로로 이어주는 총 길이 3,900km에 달하는 (서울에서 방콕까지의 거리에 해당) 66번 도로는 1926년에 비로소 전 구간이 개통되었는데 미국 동부 생활권과 서부를 연결하는 최초의 횡단 도로였다. 이것으로 인해 뉴욕시티에서 허드슨 강을 따라 알바니에 와서 Erie 운하를 타고 5대호를 지나 시카고에 도착한 뒤 66번 도로를 이용해서 LA로 가는 대륙 횡단 경로가 완성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동부에 많이 살고 있었고 서부는 미개척지로 남겨진 곳이 여전히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고 싶어 했지만,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은 너무 한정적이고, 육로로 가기엔 높은 산, 협곡, 사막 등으로 가로막혀있어서 쉽게 갈 수가 없다. 섣불리 길을 나섰다가는 위험한 야생동물이나 각종 범죄를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 정말 목숨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66번 도로의 개통은 당시 미국 사회의 큰 숙원으로 미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된다.

하지만 '도로의 개통'이라는 말이 오늘날 포장도로 수준의 깨끗한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과 마차가 지날 수 있게 되었을 뿐 여전히 많은 구간이 황무지였고 위험이 도사리는 고생길 그 자체였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꿈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됨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토록 험난하고 멀고 먼 66번 도로는 새로운 삶을 위해 모험을 떠난 사람들과 도로 주변에서 여행자를 맞이하며 삶을 꾸려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길이 된다. 이를 두고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자신의 소설에서 이 길을 'Mother Road'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지금도 이 길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개통 이후 60여 년이 지나서, 발전된 토목 기술로 더 짧고, 더 안전하고, 더 빠른 길(Interstate Highway)이 만들어지면서, 미국사람들의 애환이 가득했던 이 길은 점차 통행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쇠퇴하게 된다. '길'은 사람이 다닐 때에만 의미가 있고 아무도 다니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 길이 사라지면 여행자를 위한 식당, 호텔, 주유소, 상점들은 그 존재의 이유가 없으니 Mother Road와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도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다. 디즈니 영화 Car(2006)에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진 도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그 길이 바로 여기 66번 도로이다.

현재 이 길은 트럭이 다니기에는 너무 좁기도 하고 중간에 끊어진 구간도 있고 긴 시간 동안 마을이나 주유소가 없는 곳도 있어서 과거의 기능을 하지는 못한다. 각 주별로 여러 구간으로 나뉘어 '역사적 도로(Historical Route)'로 지정되어 있고 길 주변 마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이 길을 따라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많다.


우리가 온 산타모니카 해변은 바로 이 66번 도로의 서쪽 종점이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산타모니카 피어(Pier)

태평양 해안도로, Pacific Coast Highway는 이름 그대로 LA 일대의 해안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길이다. 정말 해안에 딱 붙어서 달리기 때문에 바다 풍경을 감상하거나 맘에 드는 곳 아무 데나 세워서 즐기기에도 좋다.

바다를 보며 한참 달리다 보니 멀리서부터 보이는 광활한 해변, 넓은 주차장, 각종 상가와 놀이 시설들이 있는 산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 바로 옆 주차비는 $15다. 오래 있지는 않을 건데 좀 아깝다.

날씨가 좋아 경치도 멋지고 역사적 의미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지만 굉장히 번잡한 느낌이 든다. 북적거리는 관광지 느낌이 확연하다. 피어 위엔 사람도 많고 식당, 상점도 많다. 여기도 해변에서 바다로 이어진 피어가 있다. 롱비치에 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산타모니카 피어에는 독특하게도 작은 놀이공원(Pacific Park)이 있다. 바다 위에 놀이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셈인데 태평양의 일몰을 보면서 롤러코스터를 탈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약간은 철 지난듯한 느낌도 들어서 세은이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기는 바다가 멋진 곳인데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도 든다.

피어에 올라서면 66번 도로의 종점이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꾸며진 것 없이, 키 웨스트에서처럼 길의 끝이라고만 되어있다.

피어의 안쪽 끝으로 가면 조금 넓은 공간이 있고 낚시하는 사람들, 버스킹 공연을 하는 사람들, 우리 같은 관광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많은 사람과 파도 소리, 해가 지려는 바다 풍경이 그림처럼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곳이다.

20220419_173016.jpg (사진) 언덕 위 팰리세이즈 파크에서 바라본 Pacific Coast Highway, 놀이기구가 있는 퍼시픽 파크 그리고 산타모니카 해변
(왼쪽) 산타모니카 피어와 놀이기구가 있는 우측의 퍼시픽 파크. (오른쪽) 산타모니카 피어 끝에 있던 66번 도로를 나타낸 지도.

유명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다 보니 선량한 사람들의 지갑을 사냥하려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페이스북 한인 그룹에서 대도시를 갈 때 조심해야 한다고 얘기하던 음악 강매 사기꾼들을 여기서 만나 보게 되었다.

길에 서 있던 두 명 정도가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Free Music'이라며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상대가 바로 떠나지 못하게 시간을 좀 끌다가 음악이 좋으면 앨범을 사달라고 한다. 덩치 큰 사람들이 강권하니까 피해자는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서 결국 몇십 달러의 돈을 내게 되는 결말이다. 돈을 주면 다운로드 링크가 있는 QR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접속해 보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미 뉴욕 트로이에서 한번 겪어 봤기 때문에, 최대한 마주치지 않되 일단 걸리게 되면 원하는 돈을 순순히 주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비굴한 게 아니다. 가족의 목숨은 돈보다 소중하고, 경찰이 온다 해도 나의 영어가 사기꾼의 영어 수준에 미치지 못하니 진실은 쉽게 덮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나는 세은이와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반대방향으로 몰아서 그 놈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지나간다. 사람 많은 유명한 곳이라 관광객을 낚으려는 자들이 여기저기 있다. 물론 노숙자들도 여기저기 누워있다.

아내와 세은이는 나를 따라 미국에 왔으니, 내가 가족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계속 두리번거려야 해서 여기는 확실히 스트레스를 받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해변에 와서 이러고 있네.


우리는 66번 국도 기념품을 몇 개 사고 해변가를 조금 산책한 뒤 예정보다 조금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신기함, 새로움 보다는 번잡함과 안전에 대한 스트레스가 기억에 남는 씁쓸한 곳이었다.

피곤해진 우리는 해변가 식당 대신 호텔 근처 버거킹에서 맘 편히 저녁을 때웠다. 이제 LA는 하루 남았다.


이민자들의 동병상련 & LA 어느 Bar에서 본 코미디 공연

내 대학 친구 중 15년 전쯤 결혼하면서 LA로 이민 온 녀석이 하나 있다. 오늘 점심 식당을 소개해준 녀석. 가끔 서울에 오면 옛날 친구들이랑 함께 술 한잔 하곤 했는데 이번엔 내가 LA에 왔으니 저녁에 만나달라고 했다. 이민 와서 1년 남짓 느낀 것도 있고 예전에 그 친구가 했던 말 중에 이제야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꼭 만나고 싶었다. 아내는 고맙게도 세은이와 호텔에 있겠단다.

이 친구가 일을 마치고 호텔까지 나를 픽업 왔다. 서울에서 볼 때 보다 훨씬 더 반갑다.

쌍둥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차에 과자 봉지가 한가득이다. "잘 살고 있구먼. 차가 더러워야 애 아빠지."

어디 가보고 싶냐고 해서 술 먹자고 했다. 내가 술을 먹으면 운전할 사람이 없으니 이제껏 미국에 와서 술집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이 친구는 근처에 있는 어느 스포츠 바(Sports Bar)가 좋을 것 같단다.

20220419_214832.jpg (사진) 친구를 만나러 간 LA의 스포츠 바에서 우연히 보게 된 무료 코미디 공연

우리는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사실 거의 나만 말하고 나만 물어보고 있었다. 그동안 누군가에겐 말하고 싶었던,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얘기들이 많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갑자기 떨어져서 겪어야 했던 일들, 1년 가까이 적응해서 살고 있는 이야기,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들, 미래의 이야기 등등, 어쩌면 그 친구가 서울에 와서 오래전에 나에게 했을 수도 있는 얘기를 지금은 내가 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게 이런 건지 몰랐어. 내가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평범한 미국사람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이민 와서 가족들 재우고 밥 먹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 거였어. 너 진짜 그동안 힘들게 살았구나. 마누라한테도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외롭기도 해. 너도 그랬겠지만."

"뭐 살다 보니 그냥 살아지는 거지. 그런데 너처럼 동네사람들하고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요즘은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이 없어. 나는 옆집이랑 얘기했던 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집들이? 식사? 그런 거 아예 생각도 못해. 아무도 안 하는 거라고. 근데 1년도 안 돼서 나보다 너가 더 빨리 미국 사람 됐네. 대단해."


매장 안에 걸린 십여 대의 TV에 나오고 있는 풋볼 얘기도 하고, 뉴욕과 LA는 뭐가 다른지, 젊은 시절의 추억, 이민자 동병상련의 얘기, 다른 친구들 소식 등을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점원이 오더니 오늘 무료 코미디 공연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며 간다. 술도 좀 더 시키라면서.

평소에 나는, 공연들 중에서 코미디 공연이 가장 난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빠른 말을 알아듣는 영어 수준뿐만이 아니라 충분한 상식과 공감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왔으니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 대여섯 명의 코미디언들이 순서대로 무대에 나와 각자 준비한 이야기를 한다. 정치인들 성대모사는 꽤 그럴듯해서 재미있었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친구의 설명을 들으니 웃긴 포인트가 잡힌다.


공연이 다 끝나고 우리도 가야 한다. LA에서 친구를 만나서 반가웠는데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은 어디일까? 한국일까 미국일까?

이민자는 본질적으로 외로운 법이다. 정착 과정의 희로애락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쁘더라도, 화가 나더라도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민 선배를 만나 그동안 할 수 없던 말을 쏟아낸 것은 큰 안도감을 주었다.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내 노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호텔방에 돌아와, 이미 잠들어 있는 세은이를 옆에 두고, 아내와 친구랑 있었던 일을 잠깐 얘기하고 LA의 마지막날을 위해 잠에 들었다.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5편에서 계속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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