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22
(커버이미지 : Lake Michgan 호수변 공원에서 바라본 시카고 Downtown. 요트 바로 뒤편의 손가락처럼 생긴 건물은 2020년 완공된 시카고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세인트 레지스 호텔이다.)
미국에선 매달 한번 정도 주말을 붙여 쉴 수 있는 휴일이 있다. 회사가 그때마다 다 쉬는 건 아니지만 학교는 보통 쉬는 경우가 많은데, 가족 여행이나 행사를 자주 할 수 있어서 좋은 환경인 것 같다. 5월 마지막주 월요일은 Memorial Day이다. 우리로 치면 현충일. 세은이는 당연히 쉬고, 마침 회사도 쉬는 날이라 주말을 붙이고 휴가를 하루 더 써서 3박 4일짜리 여행을 가기로 했다.
우리의 이번 여행지는 미국 내 도시 규모 세 번째로 꼽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시카고(Chicago, IL)다. 뉴욕시티 못지않게 각종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5대호 중 2번째로 큰 미시간 호수(Lake Michigan)가 있다. 그리고 1990년대를 풍미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팀, 시카고 불스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알바니에서 시카고까지 비행기를 타면 2시간 정도 걸리고 운전을 하면 13시간 정도가 걸리는 것 같다. 뭐가 좋을지 고민을 좀 했지만 이번에도 운전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두의 휴가기간이라 비행기 티켓이 비싸기도 하고, 2시간이라는 것은 비행시간만을 말하는 거라서 공항에 가는 시간, 대기하는 시간, 숙소로 이동하는 시간 등을 따지만 운전하는 것에 비해 시간 이득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다. 하루 13시간을 운전하는 건 좀 많긴 해도 아침 일찍 출발하면 밤 운전까지는 안 해도 된다.
이미 미국의 끝까지 운전해서 다녀온 우리에게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미국 고속도로는 가로등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밤운전이 한국보다 서너 배는 더 힘들다. 시카고까지 13시간, 가는 길에 밤 운전을 하지 않으려면 오전 7시에 출발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을 찍으니 "경로 위에 시간이 변경되는 지점이 있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온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까지 5개 주를 하루 만에 지나는 820마일(=1,310km)의 운전이다.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에 부산에 한번 더 가는 정도의 거리.
시카고 시간(중부표준시, Central Standard Time)으로 오후 8시는 넘어야 도착할 것 같은데 이게 뉴욕 시간(동부표준시, East Standard Time)으로는 밤 9시다.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내리 운전하는 스케줄이다. 시카고는 흔히 '동부'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 있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 진짜 동부 해안의 뉴욕시티나 보스턴에서 15시간은 넘게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이런데도 시카고가 동부인게 맞나? 미국에서 동부를 정의하는 기준은 여러 개인데, 미국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정하는 일반적인/고전적인 기준으로는 동부가 맞다. 하지만 Time Zone을 기준으로 하면 중부가 된다.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 주는 CST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륙은 워낙 넓어서 사용하는 시간대가 동부, 중부, 산악, 태평양 이렇게 4개나 된다. (Eastern / Central / Mountain / Pacific) 하와이와 알래스카 까지 포함하면 총 6개.)
5개의 주를 거쳐 시카고로 가는 길. (I-90)
아내는 아침 일찍부터 준비한 김밥을 준비했고 차에 모든 짐을 다 싣고 이제 출발한다. 시카고까지의 경로는 고속도로 I-90 (참고: 아이젠하워 고속도로 시스템)을 타고 가는 구간이 대부분이다. 이 길은 5대호를 가까이 지나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엔 가급적 피해야 하는 길이다. 3시간쯤 가면 나오는 버펄로(참고 :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이미 한번 와 본 길이라 조금은 익숙하다. 길을 따라 나있는 Erie 운하, 탁 트인 게 넓은 목장이 시원한 기분을 준다.
점심때쯤엔 뉴욕을 벗어나 펜실베이니아로 들어섰는데 우리는 웰컴 센터에서 미리 준비해 온 점심을 먹기로 했다. 펜실베이니아 웰컴센터는 Service Area가 아니라서 굉장히 한산하다. 사실 뉴욕시티나 보스턴 가는 길 정도가 아니면 휴게소는 죄다 화장실만 있는 Rest Area 뿐이다. 그나마 웰컴센터라서 시설이 괜찮은 것 같다. 야외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으니 소풍 온 것 같다. 우리 뒤편으로는 넓다 못해 광활한 포도밭이 있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이름은 라틴어 '나무의 숲(Sylvania, Penn은 사람 이름)'에서 왔다는데 정말 광활한 자연 속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점심을 먹고 경치를 구경하며 잠깐 여유를 가졌다.
식사를 마쳤으니 다시 출발해야 한다. 아직 가야 할 길의 절반도 오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의 농장지대를 지나, 오하이오 주에 들어선다. 오하이오 입구를 지나 한참을 가면 오하이오 최대 도시인 클리블랜드를 지나게 된다. 5대호 중 하나인 이리 호수(Lake Erie)에 붙어 있는 클리블랜드를 I-90 고속도로가 호수에 바짝 붙어서 관통하며 지나는데, 스쳐 지나는 풍경이지만 잠시나마 기분이 상쾌하다. 언젠가 이곳에 꼭 한번 다시 오고 싶다. Rock 음악 명예의 전당(Rock'n Roll Hall of Fame)과 풋볼 명예의 전당(Pro Football Hall of Fame)이 있는 곳이다. 야구선수 추신수가 젊은 시절 있었던 MLB팀 'Cleveland Guardians'의 홈구장도 I-90에서 아주 가까이 보인다. 오하이오를 지나 인디애나 주를 통과하는 길은 도시가 거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농장이 펼쳐져 있다. 한참을 보며 지나가니 아젠 드넓은 자연풍경이 보여도 이제는 감탄이 나오지 않는다. 얼른 도착이나 하면 좋겠다. 인디애나를 지나면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 주에 들어가게 된다.
지루함에도 지쳐갈 때쯤, 아내는 지도를 열심히 쳐다보더니 일리노이에 들어서기 전에 시간이 변하는 지점이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동부표준시 EST에서 중부표준시 CST로 바뀌는 지점이다.
"핸드폰 시간이 자동으로 바뀌겠지? 시간 변경되는 걸 실시간으로 보게 되네."
플로리다로 운전해서 갈 때는 계절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엔 시간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실감 나지 않을 것을 이렇게 운전하면서 보니까 신기한 기분이 든다. 구글 지도에 표시된 시간 변경선을 넘는 순간 내비게이션부터 반응이 왔다.
"현지의 시간대에 맞춰 시스템의 시간이 변경됩니다."
세은이도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고 소소하게 즐거워하며 계속 시카고로 향했다. 사실 별 다를 건 없지만 시간이 1시간 뒤로 가서 그런지 해가 늦게 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나중에 이 길을 다시 돌아올 때는 되갚아야 하는 1시간짜리 시간 대출이다. 다행히 시간 대출은 이자가 없다.
우리는 어느덧 인디애나 마저 지나서 시카고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 도로 폭도 넓어지고, 철도로 성장한 도시답게 화물열차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시카고의 상징인 마천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왔다.
시내 호텔 앞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마치니 어느새 8시가 다 되었다. 마침내 13시간이 넘는 기나긴 운전이 종료되는 순간이다. 하루 운전 거리 치고는 좀 많긴 했다. 장거리 운전이 편안해진 건 맞지만 쉽기만 한건 아니다. 오늘은 일단 짐 풀고, 저녁을 간단히 먹고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무사히 도착한 것으로 하루 일정 종료.
미시간 호수 주변 공원 (Lakefront Park)
어제 세은이도 나도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아침에 조금 늦게 나섰다. 우선 호수변 공원부터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시카고 관광지는 'The Loop'라고 부르는 지역에 모여있다. 이 지역은 미국에서 뉴욕시티 맨해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상업지구이다. Loop의 동쪽 끝은 미시간 호수에 닿아있는데 호수변은 공원 구역으로 되어있다. 크고 작은 공원 여러 개가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공원이 된 것 같다.
우선 호수변을 따라서 끝까지 걸어가 본다. 지도를 보니 2km 가까이 되어 보여서 걷기에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버킹엄 분수다.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거대한 분수다.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는데 마치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분수의 주변은 큰 광장으로 만들어 놓아서 시카고 고층빌딩을 배경으로 하여 예쁜 사진이 찍히는 장소다. 뉴욕시티의 센트럴 파크와 비슷한 느낌도 나지만 시카고가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이 든다.
분수 아래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호수 바로 앞까지 가 보았다. 바다 같이 넓은 호수, 관광객도 많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호수 옆으로는 잔디밭이 넓은데 뉴욕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던 '캐나다 거위(Canadian Goose)'가 여기도 있다. 검고 긴 목에 흰 뺨이 특징인 캐나다 거위는 지금까지 우리가 여행 가는 곳 어디에나 있었다. (심지어 더운 지역인 LA에도 있었다.) 이 녀석은 다니는 길마다 어른 손가락 길이 정도로 긴 똥을 싸놓는데, 우리는 이 새의 이름을 몰랐을 땐 '긴 똥새'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카고에서도 여지없이 잔디밭과 길가에 긴 똥이 널브러져 있어서 열심히 피해 다녀야 했는데, 그래도 여기서도 보게 되니 나름 반가웠다.
온타리오 호수(Lake Ontario)도 마찬가지였지만 미시간 호수(Lake Michigan)는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다. 미시간 호수가 3배나 크다지만 호수변에 서서 보면 그저 바다 같을 뿐, 크기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자연은 거대하고 인간은 너무 작은 탓이다. 바다의 짠내가 아니라 민물의 비릿함 빼고는 호수의 풍경은 정확히 바다의 모습이다.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있고, 파도가 잔잔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한 요트도 떠 있다.
우리는 호수변 산책로가 끝나는 애들러 천문대(Adler Planertarium)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천문대는 계획도 없었고 세은이가 원하지 않아서 굳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오후엔 세은이의 정신력을 소모(?)시키면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 미술관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시카고 미술관은 시카고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미국 내에서 뉴욕시티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MET) 다음으로 소장품 규모가 큰 미술관이다.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정말 많이 있다. 미국에 와서 방문하는 대형 미술관은 이번이 네 번째인데 가는 곳마다 유명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 1) Washington DC의 내셔널 갤러리, 2) Boston의 Fine Art Museum, 3) LA의 Getty Villa)
이곳은 'Museum'이라고 하지 않고 'The Art Institute of Chicago'라고 한다. 19세가 후반에 설립된 시카고 미술학교가 이 미술관의 전신이라서 그렇다. 미술관 건물은 1890년대 시카고 박람회 전시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유럽 스타일의 석조 건물 앞에는 미술관 개관 시 설치한 두 마리의 사자 동상이 사람들을 반겨준다. 휴가기간이기도 하고 워낙 유명한 미술관이라 사람이 정말 많다. 입장료는 $27.
이곳엔 고흐, 세잔, 모네, 카유보트 등 19세기말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가의 작품이 굉장히 많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 피카소와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같은 비교적 현대 미술 작품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을 다니면서 모르는 작품들만 있으면 흥미가 떨어지곤 하는데 이렇게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이 많으니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
학교 미술 시험에 많이 나왔던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의 그림인 '그랑지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실제로 볼 수 있었는데 크기도 엄청 컸고 하나하나 찍어 놓은 점을 가까이 확인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그림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림의 테두리마저도 그려 넣은 점이다. 이건 마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 그림'을 옮겨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이렇게 했을지 의도가 좀 궁금하긴 하다.
화사하고 우아한 느낌의 르누아르의 그림도 인상적이었고, 인기 미드였던 '위기의 주부들 (2004)'의 오프닝에도 나오는 '아메리칸 고딕'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고딕은 평범한 미국 시골의 노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실제로는 화가(Grant Wood)의 여동생과 동네 치과의사를 모델로 해서 그렸다고 한다. 그림이 유명해지자 모델이 되었던 여동생이 엄청 싫어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작품이 수만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저녁 일정에 시간도 부족하고 세은이의 인내력도 다 소모해 버려서 아쉽게 중간에 나와야 했다. 미술관만 며칠 구경해도 좋으련만...
시카고 River Cruise & River Walk
시카고의 명물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바로 '시카고 강(Chicago River)'이다. 핵심지역인 Loop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강인데 강폭이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크기다. 이 강은 미국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 이유는 3월 17일인 아일랜드 명절 세인트 패트릭 데이에 매년 강 전체를 명절의 상징인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 강물 염색은 무려 60년이 넘은 시카고의 전통이다. 강물을 일부러 초록색으로 만드는 이 기묘한 장면은 매년 미국 전역에 뉴스로 보도되는데 환경 문제는 없을지 걱정은 된다. 당연히 오염 우려가 없는 물감을 쓰겠지만... 나에게는 이게 예쁘다기보다는 '특이함과 기괴함'의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 홍보가 되니 하는 이벤트겠지. 결국 우리도 시카고에 왔다. (행사가 있는 3월은 아니지만)
우리의 오늘 마지막 일정은 시카고 강 리버 크루즈다. 배를 타고 시카고 강 주변의 고층 건물들을 한 시간 정도 구경하는 투어다. 사람이 꽤 많아서 예약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지붕이 개방된 크루즈 선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강바람이 차다. 6월 다 되는데도 시카고는 저녁에 아직 좀 쌀쌀한 기운이 있다. 출발시간이 되니 투어 가이드 'Joanne'이 커피 한잔을 들고 나와 간단히 소개를 한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 시카고 강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시는 시카고 강은 미시간 호수와 미시시피 강을 연결하는 지류예요.
이 강이 지금 호수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보이시겠지만 오래전엔 반대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약 120년 전에 운하 및 치수 목적으로 새로운 물길을 파고 갑문을 만들어서 강의 흐름을 바꾼 거예요.
굉장히 큰 공사여서 미국 토목 공사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예요.
배가 천천히 출발하고 Joanne의 설명은 계속된다. 링글리 빌딩과 트리뷴 타워 그리고 옥수수 모양처럼 생긴 마리나 타워, 전망대가 있는 윌리스 타워 등 고층 건물들 중에서도 특징 있는 건물들을 소개해준다. 선박의 통행을 위해 움직이는 다리인 도개교, 토목공사로 흐름이 반전된 시내 지류가 본류와 합류되는 Wolf Point 그리고 투어의 종점인 미시간 호수의 부두 네이비 피어까지 Joanne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설명을 들으면서 강 따라 시카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몸도 편하고 공부도 많이 되었다. 배에서 내릴 때 세은이를 시켜서 Joanne에게 팁을 약간 주었다.
호텔로 돌아갈 땐 배에서 봤던 강변 산책로, 'River Walk'를 걸어보기로 했다. 약간 어둑해진 강변을 따라 식당들이 있고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엔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은 배를 타고 강에서 식사와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혹시나 해서 세은이에게 '우리도 여기서 밥 먹고 갈까?' 했더니 다 싫고 그냥 호텔 가서 쉬고 싶단다. 아... 아직 미국 사회 적응이 어려운 어린이다. 뭐 어쩌겠는가.
산책을 마치고 강가에서 시내로 올라가는 길에 작은 분수가 있어서 자세히 보니 베트남 참전용사 공원이었다. 미국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식으로 해당 지역의 전쟁 용사들을 추모하는 공원을 자주 볼 수 있다. 추모의 공간을 엄숙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특별하지 않게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세은이가 다른 아이들과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어쩌면 이곳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바랐던 모습일 수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DyAnn이 부탁했던, 시카고의 유명 간식 캐러멜 팝콘(Garrett Popcorn)을 한통 사서 호텔로 들어왔다. 우리에겐 굉장히 단 맛인데 DyAnn은 이 정도는 달아야 미국의 맛이라고 한다.
내일 일정엔, 30년 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소년의 로망'을 이루기 위한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대된다.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