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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 - 플리머스 여행

여행 14 (1/2), September 2022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영국을 떠나 온 청교도들이 석 달 가까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배에서 내려 첫 발을 내디뎠다고 "전해오는" Plymouth Rock.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년도라는 '1620'은 청교도의 상륙 후 200년도 훨씬 넘는 후대에 새긴 것이다. 몇 차례 장소 이동으로 인해 바위가 깨져서 붙인 흔적이 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필그림(Pilgrim)은 사전적으로는 순례자라는 뜻 입니다만 미국에서는 '1620년 영국 청교도 순례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청교도 및 필그림'은 '1620년 영국에서 온 청교도 순례단'을 뜻합니다.

(왼쪽) 지금까지 우리가 여행 다녀온 곳들에 대한 기록과 동부 해안애 있는 Cape Cod의 위치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 플리머스 & 케이프 코드

Pilgrim들과 두 곳의 플리머스(Plymouth) 이야기

미국이라는 나라는, 영국 정부와 종교적 갈등을 빚던 수십 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망명을 오게 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이 현재 미국이라는 나라의 선조(Forefathers)로 기억되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유럽 이민자여서가 아니다. 이미 그 당시에 아메리카 여러 곳에는 유럽 식민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의 식민지는 본국(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본국의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에 반해 청교도들이 정착한 지역은 주민들 스스로 체제를 만들어서 운영된 '자치 식민지'였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현세의 사람들은 바로 이 자치 커뮤니티를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망명 청교도들(이하 '필그림')은 후대인들에게 '필그림 파더스(Pligrim Fathers)'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거창한 뜻을 가지고 독립의 의지를 가졌다거나 한 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영국을 떠나 미지의 땅 아메리카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기존 영국 식민지에 가서 새 삶을 개척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 달 가까이 지옥 같은 대서양 항해를 마치고 보니 원래 목적지가 아닌 곳에 와 있었는데 그렇다고 원래 목적지로 다시 항해를 이어가기엔, 초행길이라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황(항해 중에 사람들이 이미 많이 죽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정착을 하게 된다.

아마 애초 계획대로 영국 총독 관할의 버지니아 식민지에 도착했다면 아무 고민할 것이 없었겠지만 그들은 미지의 장소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자치 커뮤니티로 운영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향이 그리웠는지 정착지 이름을 자신들이 떠나온 영국 남서부에 있는 항구 이름을 그대로 붙였는데, 보스턴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한 작은 해안 도시인 '플리머스(Plymouth)'가 우리의 이번 여행지 되겠다.

미국사람이라면 플리머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플리머스 여행은 한국사람들이 역사 공부를 위해 경주나 천안 같은 곳을 가는 느낌일까?

(이 시기엔 영국, 특히 잉글랜드 사람들이 주로 정착해 살던 동북부 전체를 '뉴잉글랜드'라고 불렀다. 지금도 동북부 6개 주 CT, RI, MA, VT, NH, ME를 묶어서 뉴잉글랜드라고 부른다.)

(사진) 영국과 미국 각각에 있는 두 도시 'Plymouth'의 위치와 필그림들의 계획과 실제 항해 경로.
역사의 도시 Plymouth와 케네디 가문의 별장이 있는 유명 휴양지 Cape Cod

플리머스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갈고리처럼 생긴 독특한 모양의 반도 지형인, 북동부의 유명한 휴양지 '케이프 코드(Cape Cod)'까지 만나볼 수 있다. 이 지역 역시 필그림의 정착 역사에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가 해변(National Seashore)' 10곳 중 하나로 지정된 케이프 코드 해변이 있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러 찾는 곳이다. JFK를 비롯한 케네디 가문의 별장 여러 채가 바로 이곳에 있을 정도다.


우리는 세은이 5학년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노동절 연휴에 이곳을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혹시나 세은이가 학교 소셜시간에 배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여행기를 PPT로 만들어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우리 집에서 플리머스까지는 3시간 30분 정도 운전해야 하고, 거기서 다시 케이프 코드의 끝까지 1시간 30분 더 걸린다. 확실히 가깝지는 않은 곳이라 1박 2일로 다녀오려 한다.


세은이 영어 과외 선생님 DyAnn은 우리가 여행에서 미국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려는 모습을 항상 좋게 봐주었다. 그러면서 얼마 전 DyAnn의 딸이 준비한 케이프 코드 여행에서는 해변 호텔 하룻밤 숙박비가 $800나 되었다는 사실과 남쪽에 있는 작은 섬(Martha's Vineyard)에서, 전 세계 영화산업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죠스 (Jaws, 1975)'를 촬영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실제 이 지역 해변엔 상어 주의 안내판이 많다고 한다.)

(사진) 미국 동북부 Plymouth & Cape Cod 일대의 지도, Mayflower호를 타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최초 정착한 지역이다. 남쪽의 섬에서 영화 죠스를 촬영했다.


첫째 날 (1/2) : 필그림 정착지 Plymouth

알바니에서 I-90을 타고 동쪽, 보스턴 방향으로 가는 길은 이젠 많이 익숙하다. 집에서 아주 먼 것은 아니라서, 이른 아침 먹고 출발하니 점심때 플리머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봐뒀던 무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시내까지는 조금 걷기로 한다.


미국이 사람들에게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 - Plymouth Rock

미국 역사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도시이니 만큼, 작은 도시 곳곳에 1600년대의 유산을 이어받은 흔적을 볼 수 있다. 플리머스의 옛 표현인 'Plimoth'로 쓰인 간판, 오래된 거리, 옛날 물레방아 제분소, 필그림들의 첫 교회와 묘지 등 과거를 짚어볼 수 있는 곳들이 그야말로 널려있다. 우리는 이제는 무료 박물관이 된 옛 법원(Courthouse)에서 플리머스의 역사를 찬찬히 읽어보고 옛길을 따라 해안가 쪽으로 걸어갔다.


플리머스에 온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 때문에 온 것이다. '플리머스 바위'라는 것은 필그림들이 정착을 위해 플리머스에 도착해서 첫 상륙을 했을 때, 최초로 발을 디뎠다고 알려진 바위를 말하는 것으로 플리머스의 가장 상징이 되는 기념물이다.

해안가로 걸어가다 보면 일부러 찾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그리스식 신전 모양 건물(정착 300주년 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 바닥은 아래가 개방되어 있어서 바닷가 모래사장이 바로 맞닿아 있는데 바로 이곳에 '162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플리머스 바위가 아주 소중하게 놓여 있다. 막상 찾아와서 보고 있노라니 필그림이 최초로 발을 디뎠다는 거창한 의미나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 지어진 커다란 기념관에 비해서, 이건 그저 바위일 뿐 약간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고 인위적이라는 느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필그림이 정말로 이 바위를 디뎠는지는 누가 봤겠는가? 이건 안내문에도 나와 있는데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말 그대로 '얘기로 전해지는 전설'일 뿐이고 증거가 있는 실제 역사는 아니다. 필그림들은 영국에서 쫓기듯 아메리카에 오게 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첫 발자국이 당시에 뭐 그리 대단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니 그것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떤 바위인지는 사실 알 수 없는 게 맞겠지.

어쨌든 필그림들의 상륙 이후 120년이 넘게 지나서야 어느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따라 이 장소 & 이 바위를 찾게 되었고 그제야 신줏단지 모시듯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바닷가에 놓여있던 이 돌은 시청 광장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오는 일까지 겪었으니 지금의 자리가 정말 필그림이 상륙한 자리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믿을 뿐.

그래도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이 직접 와서 역사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역사적 의미를 투영한 상징물이라는 것에 플리머스 바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바위가 여기에 있지 않다면 누가 이 평화롭기만 하고 한적한 바닷가 항구마을에 찾아올 것이며, 과거 선조들의 치열한 생존의 역사는 어느 곳에서 떠올릴 수 있겠는가.

플리머스 바위 주변은 평범한 평화로운 바닷가 공원이다. 항구에는 많은 수의 요트가 있고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필그림 정착 400주년을 맞아 거리 여기저기 만들어둔 가리비 조형물도 귀엽게 느껴져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다. (마이애미에서 봤던 Rooster 조형물과 비슷한 개념이다.)

(왼쪽) '1620'이 새겨진 플리머스 바위, 해변에 놓인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몇몇 관광객이 동전을 던져 놓았다. 이동과정에서 깨졌다가 붙인 자국이 확인된다.
(왼쪽) 플리머스 바위가 놓인 정착 300주년 기념 건물. (오른쪽)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곳곳에 세워진 가리비 조각(Scallop Sculpture)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목숨 건 여정

플리머스 바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또 하나의 중요한 관광 포인트, 필그림들이 영국에서 타고 온 배인 메이플라워(Mayflower)가 있다. 항구에 정박되어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사실 이 배는 너무도 당연하게 1620년 그 당시의 배는 아니다. 영국에서 필그림들을 싣고 미국까지 온 메이플라워는 이듬해 대서양을 건너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험한 항해를 두 번이나 겪은 메이플라워는 영국으로 되돌아가서 수리가 되지 않고 해체되어 건축자재(?)가 되는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 플리머스 항구에 있는 이 배는 무엇이냐? 이건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1950년대에 영국과 미국 두 나라 우호의 상징으로 다시 만든 복제품, '메이플라워 2'다. 복제품이라고는 해도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것이, 1620년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고 그때와 똑같이 영국 플리머스를 출발해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 플리머스까지 항해해서 도착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이젠 70년이 넘게 지난 일이니 이것 나름대로 문화재라고 할 법도 하다. 생각보다 작은 배라는 것이 좀 놀랍다. 이런 걸 타고 그 큰 바다를 건넌다고?


필그림들의 절박함을 이해하려면 1600년대의 항해는 현재의 크루즈 관광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100여 명의 탑승자들은 거친 파도, 부족한 식사, 전염병 등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좁은 배 안에서 무려 3개월을 버텼다. 선원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고질병인 '괴혈병'이 1800년대나 되어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당시 선원도 아닌 일반인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게다가 목적지도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땅에 내려야만 했던 시기는 미국 동북부에 눈이 오기 시작하는 11월이었기 때문에 필그림들은 정박의 기쁨을 맞이할 새도 없이 겨울 걱정부터 해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뿐인 그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차가운 바다 위의 메이플라워에 다시 올라타 겨우내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결국 첫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은 전체 탑승자의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달픈 정착 과정을 겪어야 했던 필그림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메이플라워 2'호는 단연코 플리머스 항구에 상징이다. 이 배는 바다 위의 장식품은 아니고 가이드가 있는 작은 박물관(입장료 $19)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쉽게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사진) Mayflower 2호, 1950년대에 영국에서 복원되었고 1620년 항해를 그대로 재현하여 미국으로 도착했다. 미스트에 영국 깃발이 걸려있다.
(왼쪽) 이주 첫 해에 사망한 메이플라워 탑승자들의 무덤. (오른쪽) 25m가 넘는 거대한 기념탑인 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

플리머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미국 선조들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탑 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가 있다. 이 기념탑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여신상은 청교도들의 신앙(Faith)을 상징하는데 영국 플리머스 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기단 하부를 둘러싼 4개의 석상은 각각 도덕성(Morality), 법(Law), 교육(Education), 자유(Liberty)를 상징하고 석상이 앉아있는 의자 아래엔 총 8개의 세부 덕목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기둥엔 메이플라워 탑승자의 전원의 이름도 쓰여있다.

여기까지 돌아보니 필그림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해도 되고, 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겐 낯선 Pligrim 반대쪽 사람들의 이야기 - Squanto & Massasoit, 그리고 추수감사절의 유래

한국 고등학교에서 미국의 역사에 대해 배울 땐 아주 짧게 '미국 역사의 시작은 영국 청교도의 이주와 정착'이라고 언급될 뿐인데, 플리머스에 와보면 그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이야기도 확인할 수 있다.

필그림들이 도착한 플리머스는 사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인이 있는 땅이었다. 사실 이 땅의 원주민들이 바다를 건너 헐벗고 굶주린 필그림들을 환영해 주었기 때문에 미국의 역사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왜 말 안 통하는 이방인들을 죽이지 배척하지 않고 정착에 도움을 주었을까? 심지어 농사지을 땅과 곡식을 나눠주기까지 했다는데. 이런 원주민들의 환영을 이해하려면 미국 식민지 역사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필그림들이 이주하기 20여 년 전부터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서 남쪽으로 무려 1,000km가 넘게 떨어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Jamestown)이 영국의 첫 식민지다. 이곳은 총독이 영국에서 직접 파견된 본사 직영 점령지였고 요새가 건설돼서 원주민과 대치하던 곳이다. 그 당시의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으니 서로 사이좋게 지냈을 리가 없다.

제임스 타운 영국 군인들은 요새를 확장하기 위해 원주민들과 종종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수색을 나가서 원주민들을 납치해서 유럽에 노예로 팔기도 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군인들이 반대로 잡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원주민에게 잡힌 영국군 장교가 추장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 추장 딸이 바로 유명한 '포카혼타스(Pocahontas)'이고 디즈니 영화에서 나오는 일들은 제임스타운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포카혼타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유럽 풍토병에 걸려 21살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제임스타운에 있던 탐험가 토마스 헌트(Thomas Hunt)는 본진을 멀리 떠나와 원주민 사냥을 하던 중 '스콴토(Squanto)'라는 원주민을 잡아다 스페인으로 팔아넘기게 된다. 긴 항해 끝에 스페인 수도원에서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된 스콴토는 그 사정을 알게 된 수도사들이 자유를 주어 풀려나게 된다. 그는 그 이후 고향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영국에서 몇 년 살면서 신식 문화와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는데 그렇게 유럽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아메리카로 되돌아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스콴토의 부족(파투 셋 족, Paxtuxet)이 이미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다른 부족을 찾아 합류하여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렇게 스콴토가 귀향하여 새로운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 지 1년 뒤, 한 떼의 영국인들이 바다를 건너오게 되는데...


그렇다. 그들이 바로 미국의 선조인 필그림과 영국 이주민들이었고, 그곳이 바로 '플리머스'였다.


기나긴 항해와 초주검 상태로 있던 영국인들은 배에 숨어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지만, 이내 원주민들을 만나게 되고 그중에 영어가 유창한 스콴토가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목숨을 건진 것뿐만 아니라 세계사가 바뀔 정도의 엄청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를 하는 원주민이라니 영국인들은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스콴토는 부족장인 마사소잇(Massasoit)에게 필그림들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고, 마사소잇은 필그림들이 무사히 정착할 수 있도록 농사를 알려주고 옥수수 씨앗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아마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지만 원주민들이 필그림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었다.

(사진) 필그림들이 정착했을 당시 지역 원주민 부족장 Massasoit. 그는 필그림들의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콴토 입장에서는 부족에 합류한 지 1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필그림과 원주민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통해 입지를 굳히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마사소잇은, 이미 소문으로 들은 무자비한 유럽 이주민들로부터 부족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원주민들이 영국인들과 평화를 선택한 것은, 당장 눈앞의 필그림들을 죽여버리면 그것이 빌미가 되어 영국군이 올 수도 있음을, 이미 멸망한 부족 출신 스콴토가 조언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필그림들은 원주민들의 보살핌 속에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으며 점차 안정된 생활을 만들어 간다. 그들이 정착한 지 딱 1년이 지난 11월, 필그림들은 플리머스에 처음 도착했던 때와는 달리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의 축제를 여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 최대 명절인 'Thanksgiving'의 유래가 된다.

동화 같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이고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듯이 갈등과 정복이 미 대륙을 뒤덮게 되고, 유럽에서 온 군대와 전염병으로 원주민은 자신의 땅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변방으로 밀려났는데, 영국 이민자인 필그림들을 이 나라의 '선조 (Forefather)'로 기념하며 세운 25m짜리 거대한 조각상은 마사소잇의 후손들에겐 참 속상한 일이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관점에서 미국인들이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이름 바꾸려는 것도, 원주민 추장 석상을 러시모어의 대통령 조각보다 훨씬 크게 짓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플리머스 항구 바닷가를 걷다 보면 기념품 상점이 정말 많다. 사실 미국 어느 관광지를 가나 이런 식의 상점이 즐비한데, 똑같은 물건이라도 그 지역만의 로고나 문구가 새겨진 것들이 꽤 있다. 플리머스의 기념품은 대부분이 '1620'이나 'Mayflower'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들이지만 영화 죠스도 빼놓을 순 없다. 실제 촬영지는 플리머스가 아니고 한참 남쪽의 작은 섬(Martha's Vineyard)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죠스 티셔츠를 보면서, 그 당시 어린이들은 영어로 상어를 'Shark'가 아니라 'Jaws(턱, 상어의 턱을 뜻함)'라고 알고 있던 기억이 나서 혼자 살짝 웃었다. 옛날 영화 죠스는 모르지만, 'Baby Shark, 뚜루루 뚜루'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겐 더 이상 그런 일은 없겠지.

(사진) 플리머스 기념품 가게에 진열된 영화 Jaws의 티셔츠.

플리머스에서 역사공부를 충분히 한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자연, 역사, 예술이 있는 고급 휴양지 Cape Cod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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