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하다 아픈 사람들 : ‘업무와 질병 간 인과관계’
다시 돌아와서, ‘잠자’는 ‘쪼다’이다. 자신의 권리를 너무 쉽게 포기하려 하고 있다. ‘잠자’는 역시나 권리 위에 잠자고 있다.
"일단 일어나면 언제 몸이 불편했냐는 듯이 괜찮아지곤 했다.
오늘의 이런 망상 역시 점차 사라져갈 거라고 호기롭게 생각했다.
목소리가 변한 것도 그냥 호된 감기가 오려는 신호일 뿐이야.
이건 출장영업사원의 직업병일 뿐 별것 아니라고 한 치의 의심도 두지 않았다."
스스로 출장영업사원의 직업병이라고 말하면서도 별것 아닌 것에 한 치의 의심도 두지 않는다니. 권리 위에 잠자는 ‘잠자’는 쪼다임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잠자’의 생각처럼 근로자가 업무상 질병에 걸렸다고 일단 주장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판정위원회’라 함)를 열어 업무상 질병에 해당하는지를 판정한다. 즉 의사 등 전문가가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의 기저 질병 등의 원인으로 ‘잠자’가 아픈지 살펴 판단하는 것이다.
100여 년 전 체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잠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권리를 쉽게 포기하려는 것 같다. 심지어 회사 사장의 처사가 전적으로 부당하지만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이 오히려 두둔해 주고 있다. (공단이 행한 보험급여 등의 결정에 불복하는 방법으로 ‘심사청구’라는 제도가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심사청구’를 통한 결정 내용에 대하여 한 번 더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는 ‘재심사청구’도 가능하다.)
“틀림없이 사장은 의료보험회사 전속 의사를 데리고 와,
게으른 아들을 두었다고 우리 부모를 나무라고,
이의라도 말할라치면 보험회사 전속 의사를 가리키며 딱 자를 것이고,
그 의사로 말하면 세상에는 오로지 아주 건강하되
일하기를 싫어하는 인간들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 이런 경우에 의사가 그토록 영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듯 업무와 질병 간 상당인과관계가 있어야만 산업재해로 인정된다.
넘어지고 떨어지는 등 다쳐서 발생하는 ‘업무 중 사고’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만, 난청이 생기고 어깨에 염증이 생기는 등 ‘직업병’이라 불리는 ‘업무상 질병’은 상관관계가 모호하여 근로자에게 이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
‘잠자’가 벌레로 변하였는데, 그 이유가 업무상 스트레스 등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잠자’처럼 사장의 처사에 공감하여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다면 ‘벌레로 변하는 병’은 개인의 희소질병일 뿐 조직의 귀책사유와는 무관하게 된다.
“사장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녀석은 줏대도 없고 분별도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몸이 아프다고 연락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궁색하고도 수상쩍은 변명이 될 것이다.
그 회사에 오 년이나 근무하는 동안 ‘잠자’는 아직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자’는 다음과 같이 기저 질병은커녕 5년 동안 아파본 적도 없다며 억울해 한다. 누군가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건설현장 근로자가 큰 굉음에 노출되거나 장기가 소음에 노출되었다면 그것을 작업장의 당연한 환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소음성 난청으로써 직업병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부터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앞서 ‘원진레이온 사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