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경은 입사 16년 차 관리팀장이다. 2년 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매출이 감소하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 본사를 둔 회사는 창원과 양산에 있는 두 공장을 양산으로 통합시켰다. 본사에 있던 최기철 상무가 공장 총괄 관리자로 파견되었다. 한 달 새 10여 명의 관리직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3개월분 기본급을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고용보험 이직확인서를 작성해주는 권고사직이다. 생산직은 노조가 결성되어 있었고, 회사의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터라 희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권고사직에 응하지 않았다. 관리직만 밥이 된 상태였고, 최 상무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목표물을 정한 다음 사직서를 쓸 때까지 면담을 지속하였다. 사직서를 쓴 직원들은 대부분 더럽고 아니꼬워 나간다고 했다. 아무리 회사 사정이 어렵다지만 정리해고에도 순서가 있고 법이 정한 절차가 있는 법이다. 창원공장을 매각한 자금이면 최소 몇 년은 버티고도 남는다. 일시 휴업이나 순환휴직을 하면서 사태가 나아지기를 기다릴 수도 있을 터였다. 회사는 코로나를 핑계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관리자 솎아내기를 시도한 것이다.
인사, 노무, 회계 등의 관리업무를 맡고 있던 우경은 예외일 줄 알았다. 최 상무에게 적개심을 품기는 했으나,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와 복종은 드러내 놓고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생산직 노조가 구조조정에 관한 단체교섭을 요구하면서 갈등은 시작되었다. 최 상무는 우경이 노조 편을 든다고 생각했다. 우경은 단지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대로 따라야 한다거나, 노동부의 행정해석과 법원의 판례가 이러니 노조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정도로만 말했을 뿐이다. 대외비로 세웠던 구조조정 계획안이 노조 집행부에 흘러 들어간 일도 우경의 탓으로 돌렸다. 회사의 계획에 무리수가 있으니 노조와의 협상이 잘 될 리 없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위로금 지급 수준을 둘러싼 교섭 석상에서 창원 공장의 노조 부위원장이 최 상무에게 욕설을 내뱉는 일이 벌어졌다. 회사는 권고사직한 관리직에게 지급한 3개월분 기본급 외에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는 근속연수별로 최소 3개월분에서 최대 24개월분의 평균임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사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본급 3개월 치라도 주면 감사하다고 생각해야지요.”
“이 새끼! 네가 회장 아들이면 다가?”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와서 지랄이고!”
“앞으로 니랑은 교섭할 생각 없으니까 당장 회장 내려온나 캐라.”
잠시 정회를 하기로 했다. 우경은 부위원장의 팔을 끌며 휴게실로 갔다. 에쎄체인지 1밀리 한 개비를 건넸다.
“형님! 좀 살살 하입시더.”
“그래도 좀 있으면 사장될 사람 아입니꺼?”
“와! 우경이 니도 벌써 최 상무한테 물 들었나?”
“그기아이라 살살 달래가지고 위로금이라도 좀 더 받아야 지예.”
“마 됐다. 최 회장한테 전해라!”
“내일 조정신청 들어간다.”
“무슨 말인지 알겠제?”
“아이고 형님, 협상 몇 번 했다고 벌써 파업 생각합니꺼?”
“최 상무는 구조조정이 목적이 아이고 이 참에 노조 길들일라 카는 기라 예.”
“응? 뭐라꼬?”
“형님만 알고 계시고, 그만 못 들은 걸로......”
“......”
지난 화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부위원장에게 그 말을 하고 아차 싶었다. 노조를 길들인다는 말은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될 수 있는 심각한 표현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경의 부적절한 언사는 최 상무의 귀에도 들어갔고,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고 사직서까지 써야 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관리팀장에 대한 최 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터라 확인이 필요했다. 오는 일요일 직원의 결혼식이 있으니 그때 물어보면 될 일이다. 코로나로 인원 제한이 있는 결혼식장은 한산했다. 제일 먼저 최 회장을 찾아 90도로 인사를 했다. 슬쩍 곁눈질만 하더니 아무런 말이 없다. 옆에 앉은 최 상무만 억지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최 상무가 부른다.
“주말 이틀이면 충분한 시간을 준 거 같은데......”
“요즘 재취업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거 아시지요?”
“이 팀장 정도 경력에 눈높이만 조금 낮추면 쉽지 않을까?”
“제가 꼭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음......”
“말실수 한 번에 권고사직은 너무하다 싶습니다.”
“이 팀장!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거 말고도 더 있어.”
“예?”
“관리팀 여직원 중에 한 명이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 고충을 제기했어.”
“예에?”
“스스로 안 나가겠다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수밖에......”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 오늘 퇴근 시각 전까지는 확답을 주시게!”
우경은 머리가 복잡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니. 직장 내 괴롭힘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15년 청춘을 바친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회사에 대한 정나미가 다 떨어졌다. 얼마 전 전표 처리를 잘못한 부분에 대해 쓴소리 좀 한 걸 말하나. 그것도 마음에 걸려 사과하면서 어깨를 툭 친 걸 두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괴롭힘, 성희롱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필시 노조 간부들과 내통을 의심한 최 상무의 공작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단 버텨보자. 아니지 이참에 퇴직금 받고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차려볼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위로금이나 좀 잘 챙겨 달라고 할까. 관리팀장을 우습게 본 대가로 욕을 좀 보게 할까. 분식회계하면서 최 회장 비자금 만들어준 사람에게 토사구팽도 유분수지. 인수인계고 나발이고 당장 내일부터 잠수해버릴까. 징계위원회 열어봐야 해고까지는 어렵지. 최대한으로 처분해도 정직 3개월, 아니 정직도 심하다. 그냥 부딪혀 볼까. 희망퇴직한 관리직들 기본급 3개월, 아마 그 이상 받기는 어렵겠지. 실업급여 받으면서 좀 쉬어갈까. 벌써 사십 중반인데 경력사원으로 재취업이 될까. 최 상무와 힘겨루기 해봐야 결과는 뻔하겠지. 연말, 크리스마스, 겨울, 코로나...뭐 하나 좋은 때는 아니다. 최 회장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저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내 입장은 들어보지도 않고 너무하네.
점심도 굶고 온종일 아무 일도 안 했는데 벌써 저녁 6시다. 최 상무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