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분위기로 재심 신청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토사구팽은 이럴 때 쓰라고 있던 말인가. 억울하고 분했지만 이를 악물고 짐을 쌌다. 김상미 과장을 불러 따지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2차 가해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었다. 우선은 조용히 물러나는 편이 상책이었다. 누구 하나 마중을 나오는 이가 없었다. 천성산은 이내 그림자를 드리웠고, 내원사 계곡은 겨울 가뭄에 지쳐가고 있었다.
우경은 다시 돌아갈 확신이 있었다. 회사의 그 자리가 절대 신념은 아니었지만 돌아와야 할 명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야 했다. 15년의 세월을 이렇게 허망하게 마무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징계위원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우경에 대한 풍문은 사내에 파다했다. 부하 여직원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그 여직원이 참다못해 회사에 신고를 했고, 다른 팀 여직원도 비슷한 가해를 당하여 스스로 그만뒀다는 등……. 이대로 물러나면 그러한 풍문은 기정사실로 남을 것이 뻔했다.
해고를 당한 바로 다음 날 동면에 위치한 양산노동청을 찾았다. 민원실에 들러 노동권익지원관에게 해고통지서를 보여주면서 대응방법을 물었다. 해고예고수당 받기를 원하면 노동청에 진정이나 고소를 제기하면 되지만, 회사에 원직복직을 희망한다면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해야 한다면서, 경남지방노동위원회의 위치와 연락처를 알려줬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창원 팔용동에 있었다. 창원공장에 출장 가면서 한 번쯤 지나쳤을 법도 한데 그 자리가 생경했다. 창원 시외버스터미널 뒤편에 자리 잡은 명빌딩 9층 심판과를 찾았다. 조사관이라는 사람이 상담실로 안내했고, 그 자리에서 똑같이 해고통지서를 건넸다. 자초지종을 경청하던 조사관은 공인노무사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징계사유가 있고,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를 근로자가 직접 혼자서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였다.
노동위원회 문을 나서는 그때 스마트폰에 문자 도착 알림 소리가 났다. 적지 않은 돈이 회사로부터 입금되었다. 퇴직금, 해고예고수당, 12월분 급여, 연차수당 등의 명목일 테다. ‘다른 직원들 그만둘 때는 법정 지급기한인 14일을 꼬박 채우더니, 나한테는 왜 이러는 것일까?’ ‘돈을 받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우경의 마음은 더 무겁고 착잡해졌다. 아무래도 함께 고민하고 싸워줄 동지가 필요해 보였다. 그저 목적이나 뜻이 같음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사람이 필요했다.
두 군데 노무법인에 전화 문의를 했다. 월급은 얼마 정도 받는지, 회사와 합의할 생각이 있는지, 성추행이 사실이라면 어려울 것이라는지, 대법원까지 간다면 2년이나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그때까지 견뎌낼 수 있겠는지 등. 그러면서 일단 사무실로 방문해서 계약을 체결하자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에게 몇 마디 말로써 동지가 되어주기를 바람이 우스운 일이었다. 차라리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값어치만큼의 동정심을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군데 더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말없이 우경의 이야기만 들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끝까지 계속하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 상대방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징계사유가 있고 그러한 사유로 해고가 필요하다는 사정은 회사가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분쟁을 진행해보면 증명책임의 소재가 뒤바뀌기도 한다. 특히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피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진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반대증명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어보니 회사는 노사관계 파탄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고, 마녀사냥식 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부당해고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높지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여부는 회의적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다.>
동지를 찾은 듯했다. 우경의 사건을 맡은 노무사는 무사(武士)처럼 보였다. 공장 통폐합 구조조정에 관련된 문건 일체. 노조 지회장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실확인서의 내용과 그 확인서를 받아내는 방법. 김상미와 1년 7개월 정도의 기간 주고받은 문자나 대화 목록. 두 사람의 관계를 순수한 애정 관계로 확인해줄 동료 직원의 진술서. 최기철 상무에게 연차휴가를 신청한 카카오톡 메시지. 징계사유나 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는 회사의 내부규정. 인사기록카드. 그 밖에도 우경이 미처 생각지 못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준비했다.
1월 초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했다. 회사는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서울의 대형 로펌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우경에게 유리한 사실확인서를 작성해주었던 동료 직원은 우경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왜곡했다는 진술서를 제출했다. 관리팀의 신입 직원 두 명도 우경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추가 진술을 했다. 비서실의 직원들은 우경이 평소에도 여직원들과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한 직원은 우경이 김상미의 허리춤을 감싸는 장면을 자주 보았다는 목격자 진술서도 제출했다. 법무법인의 변호사는 우경이 평소부터 파렴치하고 나쁜 놈이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듯했다.
회사 편에서 진술서를 작성한 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부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경과 친분이 두터웠던 동료 직원은 회사의 회유와 강압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동료 직원과의 전화 통화를 녹음했고 속기사를 통해 녹취록도 작성했다. 그런데 이를 증거로 제출할지 말지를 두고 노무사와 다툼이 생겼다. 우경은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므로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사는 그 동료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듯 보였다. 복직 후 그만한 동료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선행 진술과 후행 진술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에 먼저 한 진술의 신빙성이 높고, 근로자와 회사의 다툼이라는 역학관계에서 굳이 녹취록까지 필요 없다고도 했다. 우경은 노무사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