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물금의 야경은 그럴싸했다. 물금은 낙동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기 직전 민물의 종착역 같은 곳. 김해와 양산 삽량 사이 교역의 요충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근대 무역이 행해졌다고도 하고. 그래서 서로 이 구역만은 침범하지 말자는 협약의 의미로 물금이라 이름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큰 강의 하류 지역에서 홍수가 자주 일어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발 물을 금해 달라는 기원의 뜻으로 물금으로 정했다고 하기도 하고. 조선 아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부터 끊임없었을 낙동강은 남해로 태평양으로 그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우경은 봄바람에 미쳤고 큰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노래를 불렀다. 그 바람과 노래에 실려 김 대리의 머리가 우경의 어깨로 넘어왔다. 장미꽃밭에 둘러싸인 듯했다. 전혀 어색한 느낌이 없었다. 둘은 날이 밝도록 마시고 노래 불렀다.
“저는 꿈이 있어요.”
“나도 꿈이 있어요.”
“우리는 우리를 지켜줄 신의 존재를 믿어요.”
일요일 아침 둘은 싱글 침대에 한 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 후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또 다른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두 사람의 불놀이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우경이 야근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던 날이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원룸에 들어서는 순간 우경은 마치 귀신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회백색의 얇은 캐미솔을 입은 김 대리가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경은 강박증이 있으리만치 숫자와 잠금장치에 민감했고, 그 누구에게도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자그마치 아홉 자리 숫자에 특수문자를 하나 더 눌러야만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상미야! 어떻게 들어왔어?”
“우경 씨 원룸에 올 때마다 유심히 봐 뒀지요. 헤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
“우경 씨 주려고 소고기도 굽고 프랑스산 레드 와인도 마련했는데......”
우경은 강제로 옷을 입게 하고 핸드백을 들려서 내쫓다시피 김 대리를 보냈다. 현관 앞에서 김 대리의 흐느낌이 들렸지만 우경은 모른 체했다. 굵게 돋은 소름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경은 김 대리를 가까이할 수 없었다. 지난날 천성산 정상에서 함께 시작된 가을은 내원사 계곡에 떨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수요일 아침. 우경이 출근하자마자 상무실 비서가 문서를 한 장 전하면서 서명을 요구했다. 징계위원회 출석요구서. 다음 주 수요일 오전 10시, 3층 소회의실. 징계사유는 직장 내 성추행, 직장 내 괴롭힘, 직장 질서 문란, 무단결근 등.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경은 곧장 상무실로 올라갔다.
“상무님,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징계위원회에 출석해서 소명하면 될 것을......”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직서 내든가......”
“저는 징계사유 한 가지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허허... 그 참 말이 많구먼. 준비나 잘하시게.”
“회장님 일에 대해 공익신고할 수도 있습니다.”
“공익신고? 지금 협박하는 건가? 그러면 누가 다칠 것 같은가? 허허...”
“저는 끝까지 가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시게.”
일방적 배반을 당했다고 느낀 김 대리는 참고인 진술서와 사실확인서를 제출했다. 정기 인사의 시기가 아님에도 김 대리는 과장으로 승진했고, 전략기획실로 부서를 이동했다. 주말에 출근하여 결산 업무를 한 것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둔갑했고, 우경의 원룸에서 나눈 밀월은 성추행으로 탈바꿈했다. 부위원장과 나눈 대화는 유언비어 유포로 인한 직장 질서 문란이 되었고, 사전에 승인되지 않은 연차 사용은 무단결근이 되었다. 김 대리의 진술 내용은 구체적이고 세밀했다. 복수심에 불타 부끄러움을 잊은 듯했다. 징계위원들은 그 내용의 거짓됨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징계위원들에게 우경은 정말로 파렴치하고 나쁜 놈이었다. 우경의 소명과 반론은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징계위원 5명의 만장일치로 징계해고가 결정되었다. 그것도 예고 없이 즉시 해고. 그날 오후에 해고통지서가 서면으로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