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암 Apr 29. 2022

이혼과 만남과 이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우경은 결혼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종갓집 장손의 며느리로 시집온 우경의 아내가 지속하여 이혼을 요구했다. 현대 의학의 수준으로 두 사람 사이 불임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겨울비가 장맛비처럼 억수로 쏟아지던 날 두 사람은 법원을 나섰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선택받지 못한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인가. 어찌할 수 없는 생존의 본능은 불필요한 기억을 스스로 지우는 것인가. 언젠가 한때 주체하기 어려웠던 아픔도 슬픔도 또 다른 기억으로 대체되면 사라지는 것인가. 우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회사 일에만 열중했다. 어쩌면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는 연리지 같은 것일까. 또 다른 겨울이 오기도 전에 두 사람은 연락을 끊었다.     


 가로수 벚꽃이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봄이었다. 3월 말 결산을 앞두고 관리팀은 연일 잔업에 특근이었다. 우경은 아예 휴게실 모서리에 간이침대를 두고 숙식을 회사에서 해결했다. 금요일에도 야근을 하고 퇴근하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은 온기도 없거니와 반겨주는 이도 없기에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천성산 내원사 계곡 부근에 자리한 회사는 우경의 원룸보다 사람이 살기에 더 나은 곳임이 분명했다. 투명한 공기를 한 움큼 쥔 다음 흐르는 물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물이 차가웠다. 양말을 벗고 잠시 맨발로 물속의 조약돌을 느껴보았다. 두 손 가득 냇물을 퍼담아 얼굴을 훔쳤다. 생강나무, 진달래, 산벚나무, 소나무. 계곡을 품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천성산은 노랑, 빨강, 하양 꽃들을 피워내며 노래할 새들을 부르고 있었다.      


 결산 시한은 이제 일주일 남았다. 최 회장의 비자금을 정상적으로 회계 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사람도 필요하면 화장(化粧)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당연한 예의로 여겨지기도 하지. 토요일 아침 혼자 앉은자리에서 아름답게 꾸미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김 대리가 출근했다. 

 “상미 씨, 주말인데 집에서 쉬지 않고서 뭣하러 나왔어요?”

 “저도 한 팀인데 팀장님 혼자 고생하시면 마음이 불편하지요.”

 “이제 남은 일은 저 혼자서 하면 됩니다.”

 “그나저나, 아직 식사 못하셨죠? 장어덮밥 사 왔으니 같이 드시고 하세요.”

 “아... 예...”

 우경과 김 대리는 이른 점심을 덮밥과 장국으로 해결했다. 관리팀은 팀장 1명과 팀원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 대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원들이라 결산 업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7년 동안 잔뼈가 굵은 김 대리는 혼자서도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경도 가급적이면 오늘 결산 업무를 마무리하고 본사로 넘기고 싶었다.

 “상미 씨, 나온 김에 손익계산서에 영업외 비용만 정확히 좀 맞춰주겠어요?”

 “옙, 팀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서류철을 받아 돌아가는 김 대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경은 알 수 없는 향수를 느꼈다. 이것은 장미꽃 향기 그득한 샴푸 냄새인가. 우경의 아내도 평소 장미꽃 향내 나는 샴푸를 좋아했다. 장미. 장미. 장미......

 현금흐름표상 시재를 모두 맞출 즈음 김 대리가 서류를 내밀었다.

 “팀장님, 이 금액 맞지 않지만 본사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어... 어... 하하하. 그렇겠지. 맞아.”

 “저희 영업수익은 최소한으로 맞추어 놓았고요.”

 “고마워. 덕분에 다 됐네. 난 조금만 더 마무리하고 갈 테니 어서 가지?”

 “아닙니다. 저도 팀장님 마무리하시면 함께 퇴근하겠습니다.”


 김 대리의 계정과목 정리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본사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꾸미는 것이 신들린 무당이 아니고서는. 우경은 알 수 없는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평소 팀의 일원으로 완벽에 가까운 업무처리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최 회장 일가의 비자금 부분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공포에 가까운 놀람이었다.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잊지 않고 챙겨준 생일 선물은 단지 직장 상사에 대한 애교나 충성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보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럼, 우리 물금에 가서 저녁 식사나 같이 할까요? 밥은 제가 살게요.”

 “네에. 팀장님. 좋습니다.”     

 우경이 한동안 골머리를 앓던 부분인데 김 대리는 반나절 만에 깔끔하게 해결해줬다. 어쩌면 우경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출근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김 대리의 도움으로 결산 업무는 잘 마무리되었다.


 “팀장님! 이혼하셨다는 거 예전에 들었어요.”

 “어... 예...”

 “불편하신가요?”

 “아... 하...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아이가 없어서 그랬다는 것도 다 들었습니다.”

 “......”

 “그나저나 상미 씨는 왜 결혼을 아직......?”

 “에이..... 제가 아직 팀장님 같은 선남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렇지요.”

 “하하하...”

 “제가 팀장님께 술 한 잔 사고 싶은데, 2차 가실래요?”

 “아닙니다. 제가 팀장인데, 제가 사야지요.”

 “팀장님, 그럼, 오봉산 아래 벚꽃도 보고 산마루에서 야경도 보고 어때요?”

 “좋아요. 그럽시다.”



작가의 이전글 금속노조로 단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