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에 노동위원회의 심판회의가 열렸다. 그날 저녁 8시 조금 지나 노무사로부터 문자를 전달받았다. ‘경남2022부해00 사건은 인정되었습니다.’ 우경이 승소한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앗-싸! 노무사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노무사의 설명은 이랬다.
<자세한 판단 이유는 약 한 달 후 판정서를 받아봐야 알 것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일부 징계사유가 인정되나 해고까지 이를 정도는 아니다. 회사가 근로자를 해고한 것은 사용자에게 주어진 징계재량권을 일탈하였거나 남용하였다. 제일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성추행인데, 아마도 노동위원회가 이렇게 판단한 데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의 내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경은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옥상에 올라 담배를 한 대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희뿌연 연기 위로 하현달과 샛별이 반짝였다.
창밖으로 살구꽃이 만개하고 복사꽃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판정서가 도달했다고 노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은 경남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로 판단한 주요 이유다.
<무단결근 사실은 인정된다. 노사 간 협상 과정에서 회사의 기밀을 누설하여 조직의 질서를 문란케 한 점도 인정된다. 휴일근로를 강제한 점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 신입 사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은 해고처분 당시 사유로 삼지 않았으므로 이를 징계사유로 할 수 없다. 부하 여직원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중에는 서로를 ‘자기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평소 연인관계에 있었다는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사생활의 비행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기업의 명예를 훼손했다거나 질서를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인정되는 징계사유만으로 해고처분에 이른 것은 징계권의 남용이다.>
회사는 해고를 취소했고 원직복직과 출근명령을 내렸다. 5월 2일 월요일. 기대반 의심반의 복잡한 마음을 이끌고 정상 출근을 했다. 우경의 자리는 없었다. 상무실 비서가 종이 한 장을 건네준다. 대기발령 통지서였다. 징계 의결 요구 중에 있으므로 징계처분이 확정될 때까지 자택에 대기하라는 것이다. 일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최씨 일가에게 사람다운 양심이란 그저 한 조각구름에 불과했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은 진공 상태와 비슷하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기발령에 대해 다투지 못하도록 회사는 임금 전액을 지급했다. 이른 장마가 끝날 즈음 또 다른 징계위원회 출석요구서가 내용증명 우편으로 왔다. 우경은 출석과 소명이 소용없음을 알았다. 이미 짜 놓은 각본에 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우경의 팀장 보직을 해임했고, 직급을 차장에서 과장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7월 1일부터 상무실 맞은편 소회의실로 출근을 명했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여름은 뜨거웠다. 소회의실 천장에 붙은 시스템 에어컨은 청테이프로 엑스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흔하던 선풍기도 없었다. 긴 회의용 테이블 모퉁이에 오래된 노트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무실 비서가 들어왔다.
“상무님께서 오늘 퇴근 전까지 노사관계 안정화 방안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분량은 A4 10매 이상, 글자체는 휴먼명조, 글자 크기는 10 point, 여백은 좁게, 줄 간격은 160%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그리고, 죄송하지만... 음... 구내식당 출입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
장마에 불어난 계곡물이 창문 너머로 튀어 오를 듯 거칠었다. 덥고 습한 바람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히지 못했다. 노트북을 켰으나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경은 내원사 삼거리 편의점에서 냉커피와 삼각김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늦지 않게 회의실로 돌아온 우경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경은 한 문장으로 10장을 빼곡히 채웠다. 상무실 비서에게 메일을 보내고 출력과 제출을 부탁했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몰래 회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