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댓 마지기 벼농사 지어 추곡수매하던 날에,
그날에 곧바로 현금 300만 원가량의 목돈이 생겼다.
아버지는 그 돈을 어머니한테 그대로 전달하고 건넛마을 사희동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외상으로 구매했던 비료나 농약값을 갚았고, 이웃으로부터 빌려 썼던 돈도 갚았다.
나머지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 장날에서 추석치레는 빼먹지 않았다.
덕달, 죽촌, 사희동에 사는 남정네들은 사희동의 한 주점에서 놀음판을 벌였다.
같은 날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몇 섬의 벼를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안식구 몰래 감추어둔 벼를 판 돈으로 놀음판의 판돈으로 삼았다.
몇 말의 막걸리가 순식간에 동이 나고,
가을빛에 시커멓게 타들어갔던 얼굴들은 서산 하늘을 향해 검붉게 변하고 있었다.
약은 사내는 술도 취하지 않았고 주머니도 실속도 가득 채웠다.
약지 못한 아버지는 술에 취했고 판돈을 다 날리다 못해 놀음 빚까지 져가며 날 새는 줄 몰랐다.
큰 그랑을 건너 술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오던 날.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했고 나는 바보같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나는 똑같은 바보가 되어 있었다.
딸자식이든 아들자식이든 공장에는 안 보낸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조였다.
그런데 한 해 벼농사만으로 네 남매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보내고,
또 대학까지 뒷바라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대추장사의 길. 추석을 전후하여 잘 익은 풋대추를 사들였다.
운전도 할 줄 몰랐고, 그러니 차량도 없었지만, 용달차는 어디든 달렸다.
밀양시 전역을 돌았고, 더 좋은 물건과 더 값싼 풋대추를 사기 위해 원동면과 남해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풋대추를 건조기에 말리는 작업은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도록 하는 고역이었다.
연탄불도 자주 갈아주어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골고루 말리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수시로 위치를 바꾸거나 뒤집어주어야 했다.
얼마간 건조된 대추를 햇살이 좋은 날 다시 마당에서 말리고, 채로 쳐낸 다음 나무상자에 담아야 비로소 상품이 된다.
그렇게 두 세배의 이윤을 남겼고, 이렇게 번 돈은 고스란히 자식들 뒷바라지에 쓰였을 것이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해 여름. 그 덕분인지 잘 영글어가는 대추를 보면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 반질반질한 대추 얼굴에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속울음을 감출 길이 없어 아무도 보지 않는 대낮에 그냥 울어버렸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