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2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탄소포인트 Jul 25. 2019

남궁현자는 왜 파리로 떠날 수밖에 없었나

기생충 (기생충, 2019)

관람 직후부터 계속해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남궁현자라는, 어떻게 보면 작품 외적인 존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왜 내 생각에서 떠나지 않느냐는 거다. 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인 건물을 놔두고 파리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도 어떤 비밀까지 숨겨놓은 채로. 사실상 그 비밀은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되는 어떤 감정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말이다. 거기다 그런 비밀을 가지고 이용하는 문광이라는 존재를 연교와 동익의 집에 이어서 남겨두게까지 만든다. 그렇다면 사실 남궁현자가 <기생충>의 세계 밖에서 세계 안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논의를 거칠게 이어가 보도록 하자. 나는 조종자라고 호명하는 이 남궁현자의 존재를 봉준호의 자의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남궁현자의 직업이 무엇인가. 어떤 공간을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실현하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아니던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간을 구축하는 행위의 성질은 카메라가 중간에 있고 없고의 차이지 영화감독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사실은 봉준호가 남궁현자의 손을 빌어서 <기생충>의 세계에 등장하는 집을 만든 게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말일 테다. 그런데 작품 내에서 보이는 남궁현자의 행동은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구석이 있다. 단순히 감독의 자의식으로 설정해놓은 세계관의 배경이라고 보기에는 그녀가 했던 행동의 파장은 앞서 얘기했듯이 핵심적인 데가 있다.
 
조금 더 농담조로 말해보자면 <설국열차>에서 등장했던 남궁민수(공교롭게도 동일한 성이다)의 존재도 지금에 와서는 의미심장해진다.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인 남궁민수의 역할은 열차의 보안 설계자다. 그는 열차의 ‘구조’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기에 인물들이 구조를 탐험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기고 끝까지 진행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남궁민수의 존재를 봉준호의 세계에서 가능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봉준호 자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둘의 존재는 실상 봉준호의 세계에서 치트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다만 남궁민수는 영화의 끝까지 동행하는 존재였다면 남궁현자는 세계의 설정에서 잠깐 썼다가 빠지는, 그렇기에 파리로 떠날 수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더 교묘해진 속임수라고 본다면 지나친 상상인 걸까.
 
더욱 우려스러운 건, 그 가운데 봉준호가 <기생충>을 통해 보여주는 이상한 태도다. 그는 계급의 상관관계와 그 주변 인물들을 남궁현자의 건축물 안으로 결집시킨다. 설명에 대한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도식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모습들도 관찰할 수 있다. (지하와 지상, 선의 존재, 냄새, 위로 뿜어져 오는 물과 아래로 내려가는 물의 모습 등등) 그런데 세계의 모습은 이렇게 명징하게 직조해낸 데에 비하여,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물의 태도는 그런 세계의 모습을 조롱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는 점이다. 기우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사인 ‘상징적이네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토록 명징하고 도식적인 상징과 은유를 흩뿌려놓고는 정작 기우는 그렇게 바라보는 인간들을 조롱하는 말을 내뱉지 않나. 지하 세계에 갇혀서 지상 세계로 올라갈 희망조차 포기한 채, 지상 계급에 ‘리스펙’을 외치는 근세의 존재도 찜찜하긴 마찬가지다. 아니, <기생충>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사실상 봉준호의 조롱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조롱을 받는다면, 우리가 그의 세계에 애정을 보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이 점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징후 같기도 하다. 감독이 관객과의 게임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 속임수를 설정해놓고는, 그 안에 노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태도들. 그리고 일말의 따스함을 가지고 있던 봉준호의 세계마저 그런 징후가 읽힌다는 건, 바꿔 말해보면 정말로 한국 사회가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되려 고민해 보아야 할 시기다. 한국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우리는 선을 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이라는 이름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