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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Jul 25. 2019

경계선의 사람들

그린 북 (Green Book, 2018)

<그린 북>의 세계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선들은 무수히 많은 형태로 영화 속에서 존재한다. 선 안의 사람들과 선 밖의 사람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가지고 기능되고 규정되는 이들이다. 이것은 인물이 서있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돈 셜리(마허 샬라 알리 분)는 자신의 방과 무대, 토니가 운전하는 차 안과 같이, 선 안의 공간에서는 온전한 ‘시민’이자 뮤지션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선 밖의 공간에서는 공연하러 온 장소에서조차 화장실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흑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명확한 선이 그어진 세계에서, 피터 패럴리가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세계의 규칙과 어긋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노동자지만 이성애자이자 백인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와 미국 상류층 예술가이지만 동성애자이자 흑인인 돈 셜리는 각각 선 안의 존재로도, 선 밖의 존재로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는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린 북>을 보고 전형적인 할리우드 버디 무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품의 내러티브 구조가 그런 지적을 받아도 무방할 정도로 정통적인 버디 무비의 그것을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그린 북>의 표면적인 서사는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두 남자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한 배를 타는 내용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경계선의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것이 단순한 장르의 관습에 기댄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그는 세계에 여러 가지 선을 그어놓은 다음, 다층적인 의미와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작품이 진부한 서사 구조 안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경계선의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 앞에 놓인 카메라는 각자 자신이 처해있는 처지와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토니는 흑인을 혐오하고 돈은 무례를 혐오한다. 이렇듯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외형적인 차별뿐만 아니라 내형적인 차별, 더 나아가 구조적 차별을 감각하게 만든다. 토니와 돈이 차 안에서 치킨을 같이 먹는 장면을 보도록 하자. 이 장면은 서로의 계급적 편견과 백인 사회가 흑인 사회에 가지는 인종적 편견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돈이 끊임없이 토니의 발음을 교정하고 이름까지 줄이려고 하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가지는 정체성에 대한 돈의 몰이해는, 그들의 계급적 차이에서 발생되는 차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주류 백인 사회가 토니와 같은 비주류 백인들에게 억압과 차별을 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후반부 백인 경찰이 토니에게 가하는 행동으로써 증명된다.
 
무엇보다 그들의 몰이해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같은 선상의 경계선에 서있는 인간들임에도, 서로의 편견 때문에 그 사실이 은폐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있다. 앞서 썼듯이, 그들은 경계선에 서있는 인간들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그들이 서있는 층위는 같은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류 백인 사회의 구조적 훼방 때문에 그들이 같은 층위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은 은폐된다. 심지어 같은 인종과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것은 적용이 된다. 돈은 음악을 하는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토니가 ‘당신네 음악’이라고 칭하는) 대중음악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흑인 농부를 바라보는 돈의 모습은 흑인임에도 흑인 사회를 모르게 되는, 구조적 차별이 어떻게 관계를 은폐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에게도 관통하는 지점들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토니가 흑인 대중음악을 즐겨 듣는 것도, 돈이 프라이드치킨에서 맛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도 모두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감독은 서로가 가지는 차이와 차별의 장막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그렇기에 연대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경계선의 인간들은 진부한 서사 구조 안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전형적인 세계 안에서 비전형적인 존재들, 바꾸어 말하면 명확한 선이 그어진 세계에서 경계선에 걸친 사람들이 등장함으로써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린 북>이 전통적인 버디 무비 구조를 차용하는 것만으로는 대중적 타협이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아니, 오히려 미덕이라고 말하고 싶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작 대중적 타협은 역설적으로 인물들의 연대에서 등장하게 된다. 둘은 같은 층위에 있지만, 당하는 차별과 억압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고 체험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연대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덕분에 둘은 ‘피해자 경쟁’을 하진 않지만, 가해자성을 ‘교환’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문제의식은 개인적 차원으로 쪼그라든다. 영화가 구조적 억압에 대해서 밝혀놓으면서도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연대와 대화에 방점을 찍고 설득하기 위한 대중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자는 것’이다. 물론 당위 자체로만 따지면 저 말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와 결합하면서 영화는 뒤틀어져 버린다. 내가 돈과 토니의 웃음을 마냥 행복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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