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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y 27. 2024

마음이 아플 땐 마음 병원으로


직장 내 폭언이나 폭력, 업무 간 부당 처우 등으로 마음이 힘드신가요? 주저하지 마시고 사내 고충 상담실에서 상담하세요.



회사 엘리베이터 문 옆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매일 지나다니며 수도 없이 봤던 건데 그날처음으로 포스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충 상담 예약을 잡고 인형 같은 그녀(전편에 등장했던 사탄의 인형 같은 직장 상사)의 눈을 피해 고충 상담실로 향했다. 


말이 좋아 고충 상담실이지 실은 무시무시하게 느꼈던,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정신 병원에서 정신 상담을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니 긴장이 됐다. 고충 상담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기 직전까지 그냥 돌아갈까 1,000번 생각했지만, 그래도 들어가자고 1,001번 마음을 먹은 덕에 나는 상담사를 만났다.


"아, 현중 님이시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어떤 이야기부터 하면 좋을까요?"


상담사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쭈뼛거리는 내게 부드러운 말투로 다가왔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고층 상담도 회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고 상담사 또한 회사원이었기에 나의 상담 내용이 분명 회사 내부에 보고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고되는 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도 심각성을 알아야 제2, 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상담사에게 인형 같은 그녀의 폭정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상담사는 중간중간 "그때 현중 님은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시종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행동은 이상하게도 계속 말을 하게 만드는 마법 같았다. 한참을 쏟아내고 잠잠해지자 상담사는 내게 앞으로 10주간 10회의 상담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응? 인형 같은 그녀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핵심은 다 말한 것 같은데 10주 동안이나 더 이야기할 게 있을까?'


뭐 공짜인데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아 상담 10회를 예약하고 상담실을 나왔다. 실컷 험담을 한 후 인형 같은 그녀를 마주하니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쉼 없이 나의 분노 버튼을 터치해 주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미안함을 느꼈던 나 자신에게 겁나게 미안할 뿐이었다.


고충 상담실을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문제의 초점이 그녀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상담사는 계속해서 그 순간에 나의 감정이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그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중학교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내 안에서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중3 때 내 모습을 발견했다.


상담사는 중3 때 내 모습이 바로 '내면 아이'라고 했다. 다 자란 어른들도 누구나 내면에는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 내면 아이를 한 명씩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 상담사는 내면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냐며 그 아이에게 들려주라고 했다.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 같아서 살짝 오글거리긴 했지만, 나는 감정을 이어가며 천천히 입을 뗐다.


"현중아, 괜찮아. 부모님의 이혼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엄마는 네가 아빠처럼 살까 봐 불안해하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아빠와 달라. 너는 그냥 네 인생을 살면 돼. 지금까지 잘해왔고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할 거야."


상담사는 또 내게 어떤 감정이 드는지 물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가 나처럼 말해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뭔지 모를 안도감이 생겼다. 태어나 가정에서 처음 만나는 권위인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 사회생활에도 그 영향이 미친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모범적인 권위자의 모습을 사회에서 만나는 권위자를 통해 대신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으로 인형 같은 그녀에게 이상적인 리더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흠이 있다. 완벽할 수 없다. 인형 같은 그녀도 소시오패스적인 면을 가졌지만,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인정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반인반수 같은 캐릭터가 그냥 인형 같은 그녀의 본모습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객관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0회의 상담을 통해 적어도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결과, 인형 같은 그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악화되었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니 더 약이 올랐고 아버지를 향한 분노까지 겹쳐져서 더욱 예민해졌다. 그녀는 울그락불그락 하는 나를 보며 즐기는 듯했다. 


난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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