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서 잠실까지 문에서 문으로 왕복 4시간. 자가용이든 대중교통이든 무조건 왕복 4시간이 걸렸다. 회사에 가면 인형 같은 그녀가 있다. 가스라이팅의 대가이자 '사탄의 인형' 같은 상사가 말이다.
빅터 프랭클이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밝힌 바, 포로로서 아침에 눈뜨면 노역을 피하고자 아프거나 가벼운 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했듯이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정확히 대변해 주는 일기가 있어 소개한다.
명치가 아픈 게 회사 가기 싫다
날씨도 좋은 게 회사 가기 싫다
길들이 막힌 게 회사 가기 싫다
오늘은 화요일 왜 화요일일까
진짜로 명치가 아픈 게
진짜 회사 가기 싫은가 보다
왕복 4시간을 버티려고 책도 읽었다가 유튜브도 봤다가 노래도 들었지만, 이 마저도 지겨워졌다. 그때 나는 책 출간에 도전했지만, 노트북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원고가 떠올랐다. 어차피 나와 비슷한 30대 직장인들에게 작은 위로와 용기를 주고 싶어 쓴 원고였으니 굳이 책으로 나오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는 거였다.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쓴 목차와 원고가 있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원고를 하나씩 브런치스토리에 올리기 시작했다.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쉬이 사라지진 않았으나 원고를 보기 좋게 편집하고 내용과 어울리는 무료 이미지를 찾다 보면 출퇴근 시간이 순삭 되곤 했다.
약 2달에 걸쳐 원고를 모두 브런치스토리에 올렸다. 그 과정에서 구독자가 빠르게 늘었다. 원고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내 소중한 구독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들여 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더 좋은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조회수를 통해 어떤 글이 독자에게 반응이 있는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인형 같은 그녀의 권력 앞에서 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갔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이 전체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일기를 썼듯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며 버텼다. 2019년 3월, 이직 6개월 차에 나는 곧 다가올 아내의 생일에 깜짝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브런치스토리에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올리면 '부크크'라는 POD(주문 후 제작 출판) 플랫폼에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POD는 출판사를 통한 정식 출간이 아닌 자가 출판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만든 첫 책을 아내의 생일 선물로 주고 싶었다. 아내의 배려와 지지가 없었다면 나는 육아휴직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책은 더더욱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전심전력이 담긴 선물을 아내에게 주자 아내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감동한 눈치였다. (아내는 분명 MBTI가 F라고 하는데 왜 T 같을까? 아내는 영화도 멜로는 절대로 안 보고 반드시 총과 피가 나오는 영화라야 감상한다.)
어찌 됐든 내 첫 책은 <서른의 삶이 서른의 나에게 묻다>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아무리 자가 출판이고 POD라고 해도 내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망상이었다. 마케팅을 해주는 출판사가 없다 보니 스스로 마케팅을 했어야 했는데 지인 판매 100여 권에 그치고 말았다. 출판 관계자 중에 한 사람은 내 책을 마치 흉물이라도 되는 냥 바라봤다. 전문가 눈에는 돈 한 푼 안 들인 티가 너무 심각하게 보였나 보다.
그래도 좀 미안했던지 그는 요즘 트렌드가 'OO의 OO' 같이 심플한 제목이 인기가 많으니 제목을 바꾸고 편집도 다시 해서 출판사에 재투고해 보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줬다. 나는 독자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전체 목차를 바꾸고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2019년 10월, 나는 서재가 생긴 기념으로 수정한 원고를 다시 출판사에 투고했다. 당시 <90년생이 온다> 열풍이 이어지던 때라 그 책의 80년생 버전인 내 책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서른의 고민> 원고 투고합니다.'
전체 대수술이 들어간 원고를 심플하게 바꾼 제목으로 수백 군데에 프러포즈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무려 7군데에서 내 원고에 관심이 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중 나는 <90년생이 온다>를 펴낸 출판사 '웨일북'과 첫 정식출간을 계약했다. 책이 나오는 것도 다 때가 있고 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일북에서 연락 온 날에도 나는 인형 같은 그녀에게 탈탈 털렸지만, 전혀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 나도 출간작가가 되는 건가? 드디어 인생 역전?
2020년 4월,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라는 제목으로 첫 책이 정식 출간되었다. 나는 '서른의 고민'이 담백하고 좋았으나 그렇게 하면 팔리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무명의 평범한 직장인이 쓴,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책을 안 읽는다는 30대 남자가 쓴 첫 책이 무려 4쇄까지 찍는 기염을 토했다. 주변에서 이제 전업 작가 되는 거 아니냐며 축하의 인사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인생 역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4쇄까지 찍었지만, 내 통장에 들어온 인세는 한 달 월급 남짓한 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공들인 시간을 고려할 때 작가로서의 2년 연봉이 직장인으로서의 한 달 월급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현타가 온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이 바로 일장춘몽이요 호접지몽이라는 거구나. 허니자몽 마시면서 도라에몽이나 봐야지 싶었다.
나는 쓰디쓴 현실을 맛보며 일에 더 몰입해야겠다고 느꼈다. 소명을 명분으로 현실을 도피하려 한 건 아닐까 깊이 반성했다. 소명이란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나를 부르신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인형 같은 그녀의 폭정이 날로 심해졌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도 그 사람은 고쳐 쓸 수 없으니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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