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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y 13. 2024

배우자의 죽음 다음으로 가장 큰 스트레스가 이직이라고?


입사는 결혼과 같다.


오너의 첫마디였다. 첫 직장에 입사해 처음 오너를 만나는 오리엔테이션 자리. 입사가 결혼이라고? 그럼 퇴사는 이혼, 이직은 재혼이란 말인가? 첫 직장에서 만 9년이라는 애증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입사를 결혼이라 여겼던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회사에서 수많은 직원 중에 한 명일 뿐이고, 그 회사는 세상에서 수많은 회사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도 바보같이 최선을 다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첫 회사를 떠났다. 두 번째 직장인 쿠팡에 합격하기까지도 사실 우여곡절이 있었다. 여러 회사에 러브레터를 수십 통 날렸지만,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답장만 돌아왔다. 뛰어난 역량이 탈락 사유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직에 성공한 지인, 인사팀에 근무하는 지인 등을 동원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이력서를 고쳐 썼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직의 여정이 길어졌다. 최종 면접까지 갔던 두 번의 기회도 모두 퇴짜를 맞았다. 또다시 자아성찰의 시간을 보낸 후에 첫 이직에 성공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유통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나는 SKY 출신이 아님에도 영업 현장에서 시작해 SKY 출신의 성지인 전략기획실까지 올라갔던 어깨 뿜뿜으로 '어차피 유통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이나 그 원리는 같으니 어려울 것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오산이었다. 분명 같은 유통인데 쓰는 용어들이 다르니 농구선수가 축구하는 기분이랄까. 바둑판 위의 장기 알 신세가 된 나는 다시 신입 사원이 된 것 같았다.



사진 출처=https://www.simplypsychology.org/SRRS.html



설상가상으로 새 직장에서 만난 상사는 '아웃사이더+앙드레김'이었다. 유명 속사포 래퍼 같은 말 빠르기에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유명 디자이너 화법을 장착한 그녀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묻는 것도 한두 번이지 빛의 속도로 일하길 원하는 상사의 미간이 '빠직'하면 내 어깨는 '쭈글'해졌다.


나는 이직 2주 만에 생애 최초로 타이레놀이라는 것을 먹어 보았다.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인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상사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았다. 사무실에서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기세로 득달같이 달려들다가도 사무실을 벗어나면 세상 친절한 금자 씨가 되었다. "일 재미있어요? 첫 이직 스트레스가 배우자의 죽음 다음으로 장 크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괜찮아요?" (당시에는 이것이 가스라이팅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상사를 통해 이직 스트레스의 실체를 알게 되니 나는 타이레놀을 먹은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구나 싶었다. 동시에 상사의 말이 사실인가 싶어 구글링을 해보니 이직 스트레스는 배우자가 아닌, 친한 친구의 죽음에서 오는 충격에 버금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당시에는 배우자의 죽음 다음으로 이직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했던 상사의 말이 더 와닿을 정도로 힘들었다.)


1967년 토마스 홈즈와 리처드 라헤가 스트레스와 질병 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5천 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했다.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측정해 43위까지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를 '홈즈-라헤 스트레스 지수'라고 부른다. 1위는 배우자의 죽음(100점), 2위는 이혼(73점)이며 9위는 재혼(45점), 17위는 친한 친구의 죽음(37점), 18위는 이직 등 근무환경 변화(36점) 순이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상상하기도 힘든데 이직이 그 정도 급의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니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에게는 그냥 있는 곳에서 존버가 답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입사가 결혼과 같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직은 재혼과 같으니 9위 급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이직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었다니!


물먹다 체하면 약도 없듯이 탈출병에 걸린 직장인에게 아무리 존버하라고 외쳐본들 무용지물이다. 나의 첫 이직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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