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가는 빠들남
“사실은 제가 모레 4박 5일짜리 해외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나거든요. 지금도 아내가 6살, 4살짜리 둘을 독박 육아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저 혼자 부산에서 2박 3일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부담이겠어요. 무거운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첫날부터 준비 운동도 안 한 상태에서 다짜고짜 탈의하라고, 입수하라고 하는 거예요. 황당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진짜로 옆에서 한두 분씩 탈의하더니 물속으로 뛰어들더라고요.”
무거웠던 분위기 속에서 여기저기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성향상 새로운 집단을 만나면 충분히 안정감을 느낀 후에야 마음을 열거든요. 그런데도 어렵게 온 만큼 뭐라도 얻어가자는 심정으로 저도 첫날 입수를 결심했죠. 저한테는 정말 파격적인 시도였는데 잠시 후에 수영복까지 벗으라는 거예요. 그건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둘째 날, 한 분이 수영복도 벗더라고요. 경악했죠. 그러더니 또 한 분은 수영복을 벗은 채 아예 물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기절초풍할 일이었어요. 그제야 여기가 이토록 안전한 곳이구나 싶더라고요. 다 죽어가던 사람이 훌렁훌렁 벗어던진 지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부활한 모습을 보고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가 빵 빵 터지며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담담하게 집단 상담에 참여했던 소감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다들 느꼈을 어마어마한 역동의 공감대를 소소한 풍자와 비유로 살짝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록 나는 이번에 수영복을 벗어젖히지도 못했고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집단 상담에서 벌어진 신비로운 일을 선명히 체험했다. 가족 치료에 관심이 생긴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적극 추천해 준 멘토에게 고마웠다.
처음에 집단 상담 일정을 알았을 때 독박 육아의 잔혹성을 모르지 않는 육아빠로서 한참을 끙끙대다 조심스레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정 소장님이 이번 집단 상담에 꼭 참여해보면 좋겠다며 여러 번 권하시네. 나는 분명 일정상 아내가 연달아 독박 육아를 해야 해서 컨펌받기 힘들 거라고 말씀드렸거든.”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왜 고민해? 정 소장님이 추천해주셨으면 당연히 다녀와야지. 오빠가 하고 싶은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거잖아.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뭐지, 이렇게 쉽게? 쿨내 진동하는 아내 덕분에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정을 소화하러 부산으로 떠났다.
8월 15일 광복절 이른 아침.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역에 내려 지하철로 이동하는데 노선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전에 친구들과 왔을 때만 해도 노선이 2개밖에 없었는데 여러 개로 늘어난 노선을 보며 정말 오랜만이구나 싶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나 마나 녹초가 되어 있을 아내 걱정과 처음 경험하는 집단 상담의 낯섦이 사각사각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집에서 나온 지 4시간 만에 집단 상담이 열리는 어느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하나둘 모이더니 이내 열 명이 거실 바닥에 둘러앉았다. 이로써 진행자 두 명, 참가자 여덟 명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안내문을 한 장 받았는데 집단 상담에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에 대해 조목조목 적혀있었다. 과연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들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집단 상담이란 말 그대로 다수가 동시에 상담을 받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진행자는 어떤 이야기든 좋으니 쏟아내 보라고 말했다. 잠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긴 했지만, 얼음에 금도 안 간 상태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또다시 난감했다. 눈치 게임을 하느라 불편한 정적이 흐르던 중 한 참가자가 울먹이며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뭐지? 준비 운동도 안 했는데 바로 물에 뛰어들라는 말에 그대로 따르는 사람도 있네? 그녀의 입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니 하나둘 입수하는 참가자가 늘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특히 친모에게 깊이 상처받은 사연이 주를 이뤘다. 모성이라는 단어는 아름답고 위대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모성의 본체에서 뻗어 나온 잔혹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졌다. 진행자는 모성의 실체를 문어에 빗대어 설명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여러 개의 다리로 자식을 꼬옥 움켜쥐려는 본성을 지닌 동시에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은 문어 마녀처럼 자식의 주장을 음소거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자식에게 “이럴 거면 같이 죽자!”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단다. 나는 심해에 빠진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쉬는 시간에 마음을 다잡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원래 새로운 집단을 만나면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여기에 오려고 돈도 내고 시간도 들이고 아내의 배려까지 받은 상황에서 얌전히 있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히 입수를 결심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로 이어지는 ‘3대의 연결과 회복’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을 여니 엄마를 소환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문어처럼 모성의 무시무시한 여덟 개의 다리가 여덟 명의 참가자를 휘감았던 것은 아닐까. 소년 시절로 돌아간 나는 종교나 다름없었던 엄마에 관한 기억을 토해냈다.
지금도 생생한 세 가지 장면 중 첫 번째는 내가 유치원생 때 터덜터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불쌍함을 느꼈던 순간이다. 나는 분명 닭다리 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동네 슈퍼에 동이 나서 계란 과자를 사 온 엄마를 타박했던 기억이 났다. 내게 미안하다며 돌아서서 걸어가는 엄마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가 타달타달 흔들리며 구슬픈 소리를 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초등학생 때 좁은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있던 엄마의 머리 위로 하얗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던 장면이다. 엄마 뭐해, 하고 묻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담배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엄마의 흡연 사건이다.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또 한 번 엄마가 가엾게 느껴졌다. 세 번째 장면은 내가 중학생 때 시험 성적이 평균 80점대로 떨어지자 엄마가 고개를 돌리며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찰나이다. 자칫 잘못하면 엄마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엄마를 살려두려면 내가 모범생이 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말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가 등장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개입이 내게 상실을 안겨준 세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내가 초등학생 때 친동생처럼 아꼈던 반려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일이었다. 엄마는 반려견이 뭘 잘못 먹고 장이 꼬여 죽었다고 둘러댔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럭비 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돌 꿀밤’ 한 방에 반려견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내가 고등학생 때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싶었던 이복여동생과 떨어지게 된 일이었다. 오랜 기간 두 집 살림을 했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이복여동생을 집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비행은 멈출 줄 몰랐고 결국 부모님은 이혼했다. 동생은 아버지와, 나는 엄마와 각각 살게 되었다. 세 번째는 내가 30대 초반에 갑작스레 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애도하던 중에 아버지가 “네 엄마는 지옥에 갔다.”라며 엄마를 두 번 죽인 일이었다. 사이비 종교 같았던 아버지는 엄마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진흙탕에 푹 처박힌 자신의 자존감과 수평을 맞추려 들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잔인하게 죽이곤 했다.
감정의 물결이 일자 내 안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늘 냉전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던 부모님 사이에서 나는 ‘말 셔틀’이었다. 빵 셔틀도 아니고 말 셔틀은 뭐냐고? 내가 배달원이 되어 아버지의 말과 엄마의 말을 서로에게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특히 예민한 돈 문제가 단골 메뉴였다. 엄마는 나의 학원비, 도서비 등 교육 명목으로 작성한 청구서를 내 손에 쥐여주며 아버지에게 전하라고 했다. 내가 봐도 엄마가 약간은 거짓으로 작성한 청구서를 들고 아버지에게 가면 여지없이 “이건 왜 금액이 이러냐? 엄마한테 더 자세하게 적으라고 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감정 섞인 이상한 억양의 ‘엄마’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나는 다시 엄마의 청구서와 아버지의 답변을 배달하러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정적이 흐르는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지나왔던 그 시절이 문득 내게 몹시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그럴 수 있을까? 거품 물고 반항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속이라도 후련할걸, 나는 왜 시키는 대로만 했을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역한 기운이 전두엽을 타고 잠들어 있던 악몽을 흔들어 깨웠다. 잠잠히 듣고 있던 진행자가 지금 눈앞에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다. 순간 나는 꿈에서 깨듯 감성에서 이성으로 스위치가 전환되었다. 평상시 TV에서 타인의 영상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글거려 견딜 수 없었는데 나보고 그걸 지금 해보라고?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모두가 굳게 다문 내 입술만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뭐라도 말을 해서 불편한 이 순간을 빨리 넘기고 싶었다.
(하)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