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님의 말 셔틀이 아니라고, 비겁하게 나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을 겨우 꺼내자 진행자가 다그쳤다. 입을 앙다물어야만 했던 소년에게 이제는 괜찮으니 마음속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라고, 부르짖어 보라고 이야기해주라는 것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따르자니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마음과 달리 연기를 하자니 그건 또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다. 적절한 타협안을 찾아 나는 다시 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아버지에게 당신은 쓰레기라고 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직 100분의 1도 하지 않았다는 걸요.”
답답한 건 나인데 진행자가 더 답답해하며 나를 또 다그쳤다. 그렇게 화가 났는데 어찌 그리 조곤조곤 말할 수 있냐며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감정을 폭발시키라는 것이었다. 뭐지? 간신히 용기 내 준비 운동도 안 한 채로 탈의해서 입수까지 했는데 이제는 수영복마저 벗으라고 하네. 이게 집단 상담이야, 집단 구타야? 나는 예전에 아버지에게 분노를 표출한 바가 있고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이제 와서 감정을 폭발시킨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이런 마음을 말하자 진행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더는 내게 말이 없었다. 그렇게 첫날 마주한 집단 상담은 다소 폭력적이고 무례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둘째 날이 되자 자기 이야기를 하던 한 참가자가 갑자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터져버린 눈물 댐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쉼 없이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넋을 잃고 바라봤다. 텅 빈 듯한 머릿속에서 그녀의 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공명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입수해서 수영복까지 벗어 던진 최초의 참가자가 나오자 수영복을 탈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급기야 그 상태로 물 밖에까지 나온 이도 있었다. 한 참가자가 엄마 품에 있는 아기처럼 다른 이에게 포옥 안겨서 그동안 엄마에게 받은 설움을 게워내며 울부짖는 것이 아닌가. 2박 3일 집단 상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어른이 되어도 누구나 마음속에는 어린아이를 품고 살아간다던데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둘째 날 상담을 마치고 도저히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탁 트인 바다와 뻥 뚫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드넓은 공간에 내면에서 굽이치는 파도를 몽땅 흘려내 버리고 가지 않으면 편히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인파로 붐볐지만, 바다를 소유한 도시가 주는 위로에 취한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변에 앉아있었다. 셋째 날 다시 만난 참가자들과 전날 저녁에 뭘 했는지 묻자 다들 각자 광안리에 다녀왔다고 했다. 자유롭게 따로따로 시간을 보냈는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아기처럼 안겨서 울었던 그녀의 극적인 변화였다.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은 물론 목소리에 힘이 생겨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다들 경탄했다. 아아, 이것이 집단 상담의 진정한 효용이구나. 다 죽어가던 사람이 하루 만에 이렇게 살아날 수 있다니! 그녀 역시 지금까지 수많은 집단 상담에 참여했으나 이렇게 후련했던 적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 듯 마지막 날 이 순간을 위해 진행자는 첫날부터 버거울 정도로 절실했던 거구나 싶었다. 진행자의 진심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집단 상담을 마치고 3일간의 여정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았다. 광복절에 시작해서 공교롭게도 엄마 생일에 마무리된 집단 상담이 내겐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30대 초반에 엄마를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소명을 찾기 시작했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 가운데 30대 중반에는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크게 저항하며 독립을 선포했다. 내가 쟁취한 독립이자 해방이었다. 그러나 엄마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나는 엄마로부터 강제로 해방되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해방을 맞이했듯이 말이다.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룬 독립이 아니었기에 나는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조차 여전히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모성이 이토록 거대하고 질겼다니…. 엄마는 4녀 1남 중 맞이로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몫과 어머니의 남편 몫까지 감당해야 했다. 엄마의 자존심은 자신을 옭아맸고 자기 분신과도 같은 나를 움켜쥐었다. 나는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엄마의 자존심으로 편집된, 선의의 거짓말이었지만 결코 진실이 아닌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엄마,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더는 내게 트루먼 쇼를 하도록 강요할 수 없어요. 나는 이제 자유입니다. 엄마도 이제 나를 놓고 자유를 누리세요. 정말 애쓰셨어요. 깊이 존경했고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후회 없이 사랑했어요. 잘 가세요, 엄마.’
광복절에 시작된 집단 상담은 내게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또한, 엄마의 생일에 끝난 집단 상담은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자유라는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는 둘째 날 다른 이의 품에 안겨 통곡하는 참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부모님의 품에 안겨 울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엄마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얼마든지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때 오히려 아버지를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친 생각의 정체가 뭘까? 아아, 나는 아버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쓰며 살아왔구나! 그러니까 첫날에 진행자가 아버지를 향해 울부짖으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받아줄 만한 어른이 아니라서, 안전하지 않아서, 그래서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해서.
엄마는 나를 키웠지만, 나는 아버지를 키웠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부모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 그래서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고 무섭게 달려들 수 있다는 것이 큰 복이자 특권이구나 싶었다. 그만큼 자식이 부모를 힘센 어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지금 내 앞에 엄마는 없고 간신히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 그토록 무섭게 날뛰던 아버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찢어 죽이고 싶었던 그는 예전에 죽었다. 평생 복수의 칼을 갈아왔는데, 아직 100분의 99가 남아있는데 원수가 먼저 죽어버렸다. 이렇게 허탈하고 허망할 때가! 나는 칼을 내려놓고 삽을 들었다. 이미 죽은 그의 시신을 묻으며 홀로 장례를 치렀다.
부고
고 아버지(75세) 진작에 별세
입관: 2024. 8. 24. 오후 8시 30분 발인: 2024. 8. 26. 오전 8시 30분 장지: 소멸할 기억 속 저 어딘가 빈소: 내 마음속 판타지 장례식장
‘아버지는 한때 나의 영웅이자 원수였어요. 하지만 사랑했던 영웅도, 증오했던 원수도 모두 죽어버렸네요. 그저 나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으니까요. 아버지를 애증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이제는 아버지라는 이름만 남은 당신이 그저 가련한 한 인간으로 보이는 듯하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도 잘 가세요.’
40년 만에 자주독립을 이룬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해방된 삶에서 온전한 김현중이 되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지 벌써 설렌다. 김현중 독립 만세! 만세!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