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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Oct 04. 2024

생명, 물건이 될 수 없다(하)

'아빠'로 살아가는 빠들남

초롱이가 배를 뒤집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탈피도 잘했고 낮에는 문제없었는데 설마 또 탈피하려나? 서둘러 사진을 찍어 수족관 사장에게 보내고 통화했더니 죽은 거란다. 물 온도, 수질, 영양분, 먹이 등등 그가 알려준 대로 관리했다고 말하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도 의아하단다. 이제 암컷 한 마리만 남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물었다.      


“네, 비슷한 사이즈 수컷 재고가 있으니 새로 사서 넣어 주셔도 돼요.”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재고’라니. 사장이 친절하고 장사꾼 같지 않다는 리뷰를 보고 찾아간 수족관이었는데 실망감이 엄습했다. 재고란 생명이 없는 물건을 일컫는 말이다. AI 전성시대를 맞이해 인간조차도 부품같이 취급하고 재고처럼 갈아치우는 세상이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미물이라도 생명이 물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 또한 광대한 우주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사장은 장사꾼같이 보이지 않는 프로 장사꾼이었나 싶었다. 급히 통화를 마친 나는 아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망설였다.     

 

“아빠, 죽은 거 맞대?”

“으응…. 탈피하다가 스트레스로 죽은 것 같대. 아들아, 괜찮아? 슬프지 않아?”

“슬프긴 한데 또 사면 되잖아. 히히.”     


또 사면 된다고? 슬프다면서 신나 보이는 아들에게 생명은 재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내와 딸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이 집에서 나만 슬픈 건가? 처음 장수풍뎅이를 키울 때도 아이가 원해서 입양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어 내가 유튜브를 보며 공부해서 키웠다. 그렇게 아들이 지어준 이름대로 ‘밥’, ‘참외’, ‘미미’ 세 마리를 연달아 키우다 보니 정이 들었고 죽음을 마주할 때도 괜히 나 혼자만 센티 해지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아. 초롱이가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식구였잖아. 그러니까 초롱이를 묻어주고 기억하면서 며칠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그런 다음에 우리가 다른 친구를 데려와도 잘 키울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면 좋지 않을까?”     


아들 눈빛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아들과 함께 말랑말랑해진 초롱이를 묻어주고 자기 전에 누워서 초롱이 이야기를 나눴다. 별안간 아들이 초롱이에게 그동안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쓰고 싶다면서 내일 유치원에 가면 초롱이 생각에 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의 진심을 헤아려주는 어린 마음이 기특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만일 처음부터 크게 상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내가 “괜찮아, 아들. 또 사면 되는데 왜 울어.”라고 위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반응에 따라 교육관이 줏대 없이 흔들리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이 앞에서 아빠인 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그날 밤 홀로 남은 초코도 탈피를 시도했다. 어린 시절 병아리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힘겹게 꿈틀대는 초코에게 너만은 무사해야 한다고, 꼭 살아야 한다고 간절한 눈빛으로 외쳤다. 그러나 아침에 본 초코는 탈피도 못 한 채 용궁으로 떠나있었다. 분명 5년은 살 거라고 했던 녀석들이 열흘 만에 이렇게 다 죽는다고? 혹시 나도 모르게 뭔가 실수해서 죽은 건 아닐까, 아니면 수족관 사장이 학교 앞 병아리 아저씨 같은 부류는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들에게 초코 사망 소식을 알리자 이번엔 딸이 더듬거리는 말로 자기가 묻어주고 싶단다. 유치원 가기 전에 딸과 함께 초롱이 옆에 초코를 묻어주었고 아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2년 동안 치른 장례만 벌써 다섯 번이다. 두 아이를 위해 아파트 1층에 보금자리를 틀었는데 베란다에서 바로 보이는 화단에도 무덤 5개가 자리 잡았다. 그곳엔 한 식구였던 장수풍뎅이 3마리와 파란 가재 2마리가 잠들어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이 어눌한 말로 초롱이와 초코가 죽어서 슬프다고 했다. 내가 좀 더 신중하게 알아보고 키웠더라면 아이의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텐데 괜스레 미안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나는 가재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았다. 탈피하다가 죽는 가재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뜻밖의 위로를 얻었지만, 다시 가재를 키우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먹었던 게, 새우, 랍스타 등 갑각류가 밥상에 오르기까지 탈피를 거듭하며 죽음의 터널을 통과해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목숨을 지키려 목숨까지 걸었던 녀석들이 온전히 자기 목숨을 인간에게 내어준다고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30년 전 금붕어의 죽음이 10살 꼬마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듯이 가재의 죽음은 마흔이 된 내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내 생각대로 아이가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 곧 아이의 성장을 제한한다는 사실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라는 <데미안>의 유명한 명제처럼 갑옷 안에 있으면 당장은 안전한 것 같지만, 그 안에 갇힌 생명은 결국 자라지 못하고 질식한다. 부모의 견고한 틀 안에 구겨 넣은 아이는 투쟁의 힘을 잃는다. 갓 탈피한 가재처럼 흐물거리며 세상의 공격에 스러지거나 탈피에 실패한 가재처럼 굳어버리고 만다. 일정 시간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자식은 적절한 시기에 부모의 세계를 깨고 나와야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K-장남인 나도 K-장녀인 아내도 강력한 엄마의 힘에 눌려 세상 순한 자식으로 살다가 이제야 뒤늦은 성장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똥고집이 하늘을 찌르는 딸내미가 참 건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가끔 공황에 빠뜨릴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지만, 투쟁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오히려 안심하고 있던 아들이 걱정이다. 모범생 소리 듣는 아들이 대견하고 예쁘지만, 속이 좀 쓰리더라도 아들이 건강한 반항아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들이 권위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도록 가족회의를 자주 열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또한 내 생각대로 아이가 자라주길 바라는 위험한 마음은 아닐지 조심스럽다. ‘나도 아빠가 처음이고 너도 아들이 처음이니 서툴면 서툰 대로 서로에게 잘 배워보자꾸나.’     


초롱이와 초코의 죽음을 계기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조금은 배운 듯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그 수족관으로 향했다. 아들은 가재 말고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수족관 사장에게 암컷까지 탈피하다가 죽었다고, 아이들이 속상해한다고 말하자 그는 튼튼해서 잘 사는 종인데 왜 그런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탈피 전까진 분명 잘 살아있었으니 탈피할 때 알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단다. 그는 물고기도 물잡이하는 데 3일은 걸리니 오늘은 물달팽이 두 마리만 데려가고 다음 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단다. 그때 서비스도 챙겨주겠다는 장사꾼 같은 멘트와 함께.      


“초롱이랑 초코는 며칠 지나도 생각나네. 갑자기 좀 그립네.”    

  

뜬금없이 아내가 한 말에 깜짝 놀란 나는 “웬일이야? 여보가 슬퍼하다니!”라고 하자 아내는 그리운 거랑 슬픈 건 다르단다. 뭣이?!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움과 슬픔이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재의 죽음이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구나. 의미를 찾아보니 그리움은 추억을 소중히 여기며 다시 만나길 바라는 희망을 품은 긍정적인 마음인 데 반해 슬픔은 상실감과 고통, 절망감과 무력감을 수반하는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한다. 초롱이와 초코를 생각하며 가족 중 누구는 그리워하고 또 누구는 슬퍼하지만, 두 감정 모두 초씨 남매를 소중한 생명으로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생명은 결코 물건이 될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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