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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다시 뜨겁게 뛴다

[심장은 다시 뜨겁게 뛴다]


보름 전,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첫사랑의 이별 통보. 글 몇 자에 등산과 러닝으로 단련된 다리가 힘없이 풀려버렸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변할 수밖에 없는 시한부 사랑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가 계약 기간을 넘었는데요, 계약 해지 및 절판 처리를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7년 전, 첫 육아휴직 때 무작정 책을 쓰겠다는 각오로 하루 8시간씩 집필에 매달렸다. 아기 띠로 100일 된 아들을 안고 불볕더위와 싸우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두들겼다. 그렇게 4개월 동안 원고를 완성했고, 출판사 1,000군데에 투고했다.


짝사랑의 고백에 돌아오는 답변은 뻔하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남자로 안 느껴져. 더 좋은 여자 만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참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감지덕지 아니야? 남자로 안 느껴지면, 뭐 여자라는 건가?


“원고는 훌륭하나 저희의 방향성과 맞지 않아….” “저희의 역량 부족으로 더 좋은 인연을 만나시길….”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내 원고에 매력이 없다는 것. 출판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에둘러 퇴짜를 놓았다. 1,000번의 거절, 내 존재마저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하긴,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헛된 기대가 너무 컸구나. 어차피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길 바라며 쓴 글이었다. 마침 카카오가 만든 블로그인 ‘브런치스토리’가 주목받기 시작했던 터였다.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원고 전체를 올렸다.


아무래도 출판하려고 쓴 글이다 보니 조금씩 반응이 왔고, 구독자도 점점 늘었다. 좋아요와 댓글도 달리기 시작했다. 독자의 반응을 분석하며 원고를 다듬고, 목차와 제목을 수정했다.

1년 후, 나는 다시 출판사 1,000군데에 투고했고 일곱 곳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중에는 <90년생이 온다>로 당시 떠오르던 출판사도 있었다. 그곳과 첫 계약을 하고 다시 1년 후, ‘80년생이 왔다’는 콘셉트로 썼던 원고는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남자가 되었다.

김치처럼 글에도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출판하기까지 마음 졸였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첫사랑이 몇 달 만에 2쇄, 3쇄를 찍더니 마침내 4쇄까지 돌입하는 것이 아닌가. 출판사는 무명 저자의 첫 책인데 기적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전업 작가가 되는 건가? 인생 역전이 이런 것인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년 동안 영혼을 갈아 넣은 결과, 인세로 들어온 돈은 직장인 한두 달 월급 정도였다. 저자로서의 1년 연봉이 곧 직장인의 1달 월급이었다. 나는 더 열심히 직장에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첫 책은 나를 마음껏 꿈꾸게 하는 동시에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출판사의 이별 통보에 답장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물론 절판이 곧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판된 책이 한참 후에 다른 출판사를 만나 개정판으로 부활하는 예도 있다. 그렇지만 순정을 바친 첫사랑을 스스로 차버리고 싶은 남자가 몇이나 될까.


그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끙끙 않던 어제, 생일을 맞이했다. 지인들이 생일 축하 인사와 함께 다양한 선물을 보내주었다. 생일에 어떤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가장 좋을까?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어제 예상치 못한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의 이야기 출판 제안드려요!!! 오늘산책과 함께 어떠실까요.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일날 아침 8시 26분. 나는 수원 중고차 단지로 출근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 내 작은 눈이 순식간에 왕눈이가 된 것 같았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네 번째 책이라니, 그것도 생일에! 작가에게 이보다 더 기쁜 생일 선물이 또 있을까?


‘오늘산책’은 1인 출판사이다. 유윤희 대표와는 출판연구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중고차 딜러가 되기 전까지 14년간 패션 유통에 몸담았었다. 수천 번의 미팅과 수천 명의 사람을 만났다. "저도 어렵지만, 그가 더 어려우니 그부터 도와주세요!"라고 동 업계 경쟁자를 위해 동지애가 발현된 경우는 ‘0’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1인 출판사를 위해, 유윤희 대표는 발벗고 나서서 신간 홍보를 대신 해주는 게 아닌가. 그것도 진심으로. 아무리 친하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이럴 때 외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유윤희 대표의 미모가 출중하다는 사실은 안 비밀!)


단번에 출판 제안을 수락한 내게 대표님은 생일 선물로 당장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마흔한 번째 생일에서 받은 이 선물 또한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마흔한 살, 40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숫자가 나의 네 번째 책 계약과 함께 찾아왔다는 사실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혹시 41쇄를 찍게 될 예고편일까?


“아무래도 첫 책이다 보니 절판이라는 말에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인데 저도 모르게 생일까지 절판을 미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후련히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계약 해지 및 절판 진행 부탁드립니다. 귀한 인연이 되어 그동안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심이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로소 나는 생일날, 첫사랑의 이별 통보에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배우가 “사랑하니까 떠난다”고 했던가. 첫 책과의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으로 심장에 각인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네 번째 사랑은,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다시 뜨겁게 뛸 것이다. 멈추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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