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안 봄]
키보드에서 ‘SNS’를 한글로 치면 ‘눈’이 된다. SNS 친구는 눈으로만 사귀는 친구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나는 SNS를 볼 때마다 ‘대한민국에 왜 이렇게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아!’라며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한숨을 내쉬며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어느덧 자극적인 콘텐츠에 시선을 빼앗겼다. 눈이 실컷 혹사당하고 나면 마음의 공허감이 훅 밀려왔다.
지난해 나는 디지털 디톡스를 한 적이 있다. 수많은 눈이 존재하는 SNS를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해방감을 맛보았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그저 내가 쓰고 싶고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써 내려가는 일상이었다. 나만의 문장에 집중하고 싶어 ‘은하수’라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들어갔다.
얼마 전 은하수 회원들과 화면에서 벗어나 북촌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는 함께 ‘어둠 속의 대화’를 관람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관람한다는 역설이 신선했다. 그곳에서는 안내자의 음성에 의존해 더듬더듬 한 발자국씩 떼야 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말을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믿어야 한다.
안내자의 밝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에도 나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때 살포시 내 손을 잡아주는 온기가 느껴졌다. 귀와 손을 통해 전달되는 안내자의 진심이 걸을수록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손길이 이토록 무해하다니, 안도감이 들었다.
안내자를 따라 걷자 발바닥으로 푹신한 결이 느껴졌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에 갈라진 틈의 질감이 닿는 순간, 나는 햇살 가득한 숲속에 머무는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습한 공기를 껴안은 바람이 피부에 배어들었다. 요란한 모터 소리와 함께 바닥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항해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시장도 방문하고 고즈넉한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다.
모두 캄캄한 건물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100분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어도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안내자의 이름은 ‘서봄’이었다. 밤 같은 공간에 봄 같은 시간을 채워준 그녀는 또 하나의 빛이었다.
거리를 걸었다. 선 굵은 외국인을 감싸 안은 한복 자락이 벚꽃 잎처럼 너울댔다. 샛노란 햇살이 쏟아지는 북촌은 그 자체로 눈부신 생기였다. 눈을 감으면 보다 풍성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비밀을 알아버린 이상, 어제의 봄과는 다른 오늘의 봄이 내 곁에 와있었다. 차창 밖으로 흐드러진 봄기운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집 주변을 걸으며 양평군 강하면에 찾아온 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눈으로 본 봄은 진분홍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 연둣빛 새싹이 어우러진 생명의 신호등이었다. 손으로 본 봄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꽃가루의 장난이자, 코로 본 봄은 봄비를 머금은 흙내음의 진심이었다. 입으로 본 봄은 알배기 주꾸미가 대접하는 고소한 밥상이기도, 귀로 본 봄은 밭 가는 농기구 비트에 시냇물 선율을 입힌 하모니이기도 했다.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다. 나는 이제 봄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화면 밖, 이 좋은 봄날에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