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종이를 든 남자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그가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넘기자 여자의 볼은 점점 핑크빛으로 물든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 장면,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맞다, 2003년 개봉한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 번이나 재개봉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겨울은 춥지만, 크리스마스는 따뜻하다. 산타에게 선물 받은 아이는 함박웃음을, 연인에게 사랑 고백받은 이는 방긋 미소를 짓는다. 거리에 울리는 자선냄비 종소리는 소외된 이웃을 향한 온기가 되어 널리 퍼져나간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
사랑의 왕,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이들의 경건함과 ‘루미나리에(전구를 이용한 조명건축물 축제)’의 아름다운 장식까지 더해져 크리스마스는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날을 연출한다. 사랑의 축제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독일에는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장 큰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2016년 12월에도 독일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들뜬 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사랑의 하모니가 흐르던 그때, 한 물체가 불협화음을 내며 인파 속으로 돌진했다. 정적이 흘렀다. 12명이 숨지고 48명이 부상 당했다. IS가 배후를 자처한 '베를린 트럭 테러'가 발생한 것이었다. 독일의 무뚝뚝한 얼굴은 슬픔에 잠기자 더욱 차갑게 굳어갔다.
용광로와 얼음장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비통한 표정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분노의 촛불을 들었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어느 정신 나간 정치인의 망발을 비웃듯 바람이 불자 촛불은 번져 횃불이 되었고, 이내 산불이 되었다. 우리 부부도 한 손엔 촛불을, 한 손엔 서로의 손을 움켜잡고 역사의 광장에 서 있었다.
한국과 독일의 12월 상처는 쉽사리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17년 2월 6일, 용광로에서 뛰쳐나온 한국인 부부는 얼음장 같은 독일 땅을 밟았다. 입국 심사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줄은 더디게 줄어들었다. 예매한 카셀행 열차의 도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해졌다. 심사관에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테러범으로 의심받아 심사가 더 길어질 것 같았다. 긴장한 아내의 표정도 풀어줄 겸 입을 열었다. "여보, 저 사람(심사관)이 내 여권 사진 보고 나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맞아, 여보도 조심해. 나도 여보 여권 사진 보면 누군지 몰라보잖아. 하하하.” 나의 깐죽 개그에 경직됐던 아내도 미소 지었다. 살짝 열 받은 것 같았다. 살짝 긴장이 풀린 우리 부부와는 달리 가뜩이나 차가웠던 심사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네 왜 내가 못 알아듣는 너네 나라말로 내 앞에서 웃어? 무슨 얘기 한 거야!”라며 입국심사관이 정색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무엇보다 빨리 심사대를 통과해서 열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해명을 했다. “오해하지 마. 우린 내 여권 사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 분명 같은 사람인데 못 알아보면 어떡할지 걱정했거든.”이라고 유창하고 여유 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위 토크 어바웃 마이 패스포트 포토. 세임 펄슨, 벗 디프런트 페이스. 하하하.” 가히 독일 공무원의 까칠함 레벨은 축구로 따지면 분데스리가 급이요, 차로 따지면 벤츠 마이바흐 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화 <해바라기>의 김래원처럼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꼭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야만 속이 후련했냐!”
독일, 진짜 선진국 맞아?
독일은 음악과 문학, 철학과 기술, 스포츠와 음식 등 다방면의 선도국으로서 수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있다. 바로 지나친 관료주의다. 독일의 관공서 행정 시스템은 공무원이 절대적 갑의 위치에 서도록 짜여 있다고 한다. 사소한 행정 처리도 무조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고, 일처리도 ‘세월아 네월아’가 기본이다. 오죽하면 “공무원이 일하러 간다”라는 독일 공무원에 대한 조롱 섞인 유머까지 생겼을까?
독일 연방통계청에서 관공서 서류 작성에 걸리는 시간을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다. 혼인 또는 사망신고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고, 자녀수당 또는 실업 연금 신청은 1시간 30분까지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전환 수술 후 성을 바꿀 때 서류를 쓰면 무려 14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한다.
독일인조차 독일 공무원이라면 학을 뗄 정도다.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불친절하고 비합리적이며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독일 공무원을 보면 정말 이 나라가 선진국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고 한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버럭 화를 내고, 자신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어도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하니 우리나라 공무원은 정말 친절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치즘과 전체주의 안에서 뿌리내린 독일식 관료주의가 요즘 시대에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니! 역시 사상의 힘이 무섭다.
독일 고속철도 ICE 저렴하게 예매하기
입국심사를 마친 우리 부부는 열심히 달려서 독일 고속철도 ICE 플랫폼에 도착했다. 아슬아슬했다. 열차에 오르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카셀 직행 ICE를 타면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편도 요금은 당시 1인당 59유로였는데 나는 19유로에 예매할 수 있었다. 독일 한인교회 목사님이 알려준 꿀팁 덕분이었다.
독일로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 ICE 예매를 했다. (예약사이트 : https://www.bahn.de) 자세한 예매 방법은 블로그 검색을 하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티켓 검사를 할까 봐 출력도 하고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저장도 했지만, 내릴 때까지 티켓을 보여줄 일은 없었다. 보통 열차가 출발한 다음에 검표원이 타서 검사를 하는데 온라인 티켓과 결제한 신용카드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임승차 적발 시 벌금이 엄청나다고 하니 티켓과 신용카드는 꼭 챙기자.
꿈과 현실의 교차에서 오는 묘한 설렘
카셀 역에 도착하니 한인교회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까칠한 입국심사관의 만행을 빨리 고자질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독일에 도착한 지 겨우 3시간 지났을 뿐인데 눈, 코, 입, 키 모두 다 큰 독일인들 사이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왜 그렇게 반갑던지. 목사님은 능숙한 솜씨로 휠체어를 굴려 주차한 곳으로 우리 부부를 안내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특이한 점이 없는 자동차였다. 운전석에 타려는 목사님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고민하다 차 내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목사님 혼자서도 탈 수 있도록 휠체어를 접어서 실을 수 있는 자동 시스템과 페달을 밟지 않고도 운전할 수 있는 핸들이 있었다.
어릴 때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문득 자동차 스케치를 한 적이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을 갖춘 차였다. 오토바이 손잡이 같은 것이 핸들에 달려 손으로 속도와 방향을 조정할 수 있고, 자동 리프팅 시스템으로 휠체어를 탄 채로 운전석에 앉을 수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주변에 장애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장애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런 차가 있으면 장애인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뿐이었다.
20여 년 전 상상속 발명품이 (물론 내 상상보다는 조금 못한 차였지만)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잠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독일에서 독일차 폭스바겐을 타고 독일 거리를 달리니 꿈과 현실의 교차에서 오는 묘한 설렘이 있었다. 어릴 때 상상한 자동차를 타고 성인이 되어 상상한 독일을 달리는 기분이란….
늦은 저녁을 먹으며 목사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독일에서 이민자로서의 삶과 유럽의 정국, 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요즘 것들과 기성세대의 갈등, 촛불 시위 현장에 대해 말했다. 밤이 늦어 다음날 오전에 다시 목사님을 만나기로 하고 예약한 숙소로 향하였다. 호스트와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안내 사항을 들은 후 우리 부부는 고단한 몸을 뉘었다. 묘한 설렘의 여운 속에서 스스륵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