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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Sep 05. 2021

누구의 스윗하트이지 않고서

프렌즈, 리유니온, 브레이크업, 그리고 제니퍼 애니스톤

1. 안녕? 친구들!


로고송의 첫 구절이나 BGM의 도입부, 혹은 유행어나 대사 한 줄만 어디선가 들려와도, 그 즉시 특정한 시기의 자신의 삶과 그 때 꿈꾸던 소망과 그 때 받은 위로와, 그 땐 결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찰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짧고도 빛나는 환희 등이 소환되는 콘텐츠들이 있다.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2006년 독일 월드컵 즈음에 태어난 이들이 이삼십 년 정도 지나 크리스마스 시즌의 명동을 걷고 있는데 '레리꼬~ 레리꼬~' 가 어디선가 울려퍼지면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해보자. 겨울왕국 드레스를 입고 처음으로 부모님과 자동차 여행을 떠나며 카오디오로 그 노래를 듣던 아이들이 모 대리나 모 과장이 되었을 때, 'Let it go.' 후렴부의 무게는 몇 톤 쯤 될까?


한참 늦깍이로 두 번째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영화 터미네이터의 명대사 '아윌 비 빽!' 을 모르는 동기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호그와트의 각 기숙사의 명칭을 모르는 것을 두고 똑같이 놀랐다. 그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학에 이르기까지 함께 겪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들 각자의 삶에 일어난 역사와 다름 없었으리라.


나도 'I Won't do what you tell me.' 라는 노래의 도입부의 그 유명한 쨍그랑(이라 들리지만 아는 사람에겐 와장창 엉망진창 맥주거품 우당탕이 즉각 연상되는)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러니까 WWE의 에티튜드 시절의 프로레슬러 '스톤 콜드 스티븐 오스틴'의 등장 테마곡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스타우트 흑맥주가 떠오르고, 그걸 같이 마셨던 지금은 애 아빠인 친구 한 넘이 떠오르고, 그 넘과 둘이 밤새 스타우트만 마시다가 깨어났을 때 죽도해변의 어떤 주인 모를 조각배에다 토하고 있던 날이 떠오르고, 괜히 한 번씩 3미터 쯤 되는 담벼락이 있으면 풀쩍 뛰어내리곤 했던,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던 애송이 시절이 떠오른다.


프로레슬링이라니... 분위기 홀딱 깨기 전에 서둘러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A whole new world'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이 들려오면 어떤가. 디즈니 주제가의 무시무시한 마법에 대한 찬사의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니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미파솔도~ 레미파~' 로 시작하는 인디아나 존스의 주제가나 'My heart will go on.' 도 꽤 강력한 예에 해당되겠다. 요즘엔 어벤져스 테마곡이 그런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코요테의 김종민이 그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대한민국 남자가수 본좌 4인방 '김나박이'도 발라버릴 수 있다는 궁극의 노래,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한국어판 ost '우리의 꿈'의 바로 그 유명한 구절 '우연히~' 를 들으면 가슴이 들끓으며 즉시 떼창 모드에 돌입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만화 '원피스'를 좋아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본 적은 없는데, '우리의 꿈'을 떼창하는 이들을 보면 왠지 질투가 난다. 마치 대영박물관에 구경 온 한국인 유학생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노래는 익히 잘 아는 전설이긴 하나 내가 살아온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가 아닌 건 없나. 이건 어떤가. 설원에서 메아리치는 '오겡끼 데스까?' 혹은, 또 다른 인삿말, '안녕? 친구들~ 캐리에요!' 같은 건?



2. So many history.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이 본론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우리 모두 어릴 때 덕질하던 추억의 문화유산들을 죄다 꺼내 자랑해야 될 것만 같은 시간이 온 건, 다 그 친구들 때문이다. 바로 '그 친구들', "The Friends."   


그게 뭐냐고 묻는 이들에게 무언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고,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설명해야될지 엄두가 안 난다는게 더 맞겠다.) 다만, '그 친구들'이 누군지 아는 이들과 호들갑을 좀 떨고 싶은데, 우선 그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해보자.


레이첼, 로스, 모니카, 챈들러, 피비, 조이.



최소한의 설명을 해보자면 굳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 NBC에서 총 10시즌, 236회 동안 방영된 전설의 시트콤. TV시리즈 주연들이 받는 회당 출연료 100만 달러의 시대를 열어젖힌, BTS의 RM이 영어 자막을 켜놓고 보면서 영어 공부를 했다는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시트콤.


나 뿐 아니라 아마 수많은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영어 콘텐츠이자, 무언가를 꿈꾸며 으쌰으쌰 재미나게 살아보자며 '친구'들과 무엇이든 해보고 이루려 했던 20대 시절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 줄 TV 프로그램.


설명해야 할 도리는 이 정도로 마치고, 쏟아지는 추억의 편린을 얼른 아무렇게나 내뱉어 놓아야 지금 내 달뜬 마음이 좀 진정이 될 터이니 우선 그렇게 해보자.


센트럴 퍼크(파크 아니고 퍼크!)의 푹신한 주황색 소파.


보라색 벽지의 그 집. 그 집 발코니의 고양이. 길 건너편의 '어글리 네이키드 가이.'

그 집 복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복도로 올라오는 계단.

    

20년 전부터 줄곧 내 위시리스트였던,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의 주적인,

하지만 내게 있어 궁극의 의자라고 하면 '임스 체어'보단 아무래도 이 의자일 수 밖에 없는

'레이지보이' 수동 리클라이너 체어.


피비의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노래 'smelly cat.'

모니카의 결의에 찬 'No~~~!'

그리고 조이의 'How you doin'?'


큰일이다. 이렇게 해서는 이 글을 끝내지 못한다. 말하자면, 말할 것이 너무 많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로 어서 넘어가야 한다.


올해 5월, HBO MAX에서 1시간 40분짜리 단발성 TV쇼를 하나 내놓았다. 그 포스터는 이렇다.


시트콤이 종영한지 17년만에 다시 만들어진 "프렌즈 리유니언". 그래, 이게 다 저것 때문이다.


스트리밍 된지 벌써 몇 달이 흐른 지금에서야 '프렌즈 리유니언'을 보았다. 그렇다고 한들 '프렌즈'가 새삼스레 뭔 대수냐라던가, 십 수년 전 시트콤 추억팔이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 않냐고 한다면, 내가 '프렌즈 리유니언'을 5월이 아닌 지금에서야 본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해야 한다.


나는 이 여섯 친구들의 재회를 보기 위해, '프렌즈'를 다시 봤다.


아까 말했지만, 프렌즈의 스펙은 이렇다.

from 1994 to 2004 / 10 seasons / 236 episodes


다시 말하지만, 프렌즈를 다시 '다' 봤다.


그러니 이런 시트콤 대사 같은 문답이 가능하다.

"How you doin'?"

"'프렌즈 리유니언'을 보려고 여름 내내 '프렌즈'를 다시 봤어."

"오, '레이지보이'에 앉아서 봤니?"

"Nooo~!"


'프렌즈 리유니언'의 내용 중엔 제임스 고든이 진행한 오픈 토크쇼 순서가 있다. 고든이 질문한다. 10개의 시즌을 통틀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주인공 레이첼과 로스 역을 맡았던 제니퍼 애니스톤과 데이빗 쉼머가 실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것 아니냐고. 당사자가 아닌 다른 배우들이 대신 답해준다. 그 둘이 시즌1이 시작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류를 풍겼었다고. 공공연하게 티를 내거나 누구 하나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촬영장에 있던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 둘이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진 않았다. 둘은 이후로도 서로를 존중하며 경이로운 10년을 보냈고, 세트장 바깥에서는 각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갔고, 각자의 삶을 응원해줬다. 하지만 누구보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이해하고 의지했다. 제니퍼와 데이비드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냐고 묻자, 제니퍼 애니스톤은 데이빗 쉼머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것이 담긴 말.


"We have so many history."



3. American Sweetheart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아델'이 한 행사장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을 만난 일화를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을 마주쳤는데,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친근한 기분이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먼저 인사를 했다고 한다. "Hi, Rachel~."


프렌즈가 방영될 당시, '레이첼 그린' 역을 맡은 제니퍼 애니스톤의 인기는 마치 하늘이 파란 것이나 무지개가 일곱 색깔인 것처럼 당연한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녀의 패션과 헤어 스타일은 전세계 유행을 휩쓸었고,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American sweetheart."


그렇게 레이첼 그린이 미국의 연인이자 전세계의 여사친의 왕좌에 등극하는 동안, 레이첼 그린의 본캐는 세기의 커플이 된다. 2000년, 제니퍼 애니스톤과 브래드 피트가 결혼한다.


그러니 2000년대 초반, 제니퍼 애니스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하늘을 뚫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 어마어마한 인기, 그러니까 '레이첼 그린' 이라는 대체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로 얻은 이 모든 영광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향후 연기 인생에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사실 그녀는 프렌즈를 찍을 당시에도, 시즌 중간중간에 꽤 여러 영화에 출연을 했다. 그 중에는, 저예산 독립영화 '굿 걸'에서 연기한, 일상에 지쳐 찌들어가는 백화점 점원 역할도 있고, '브루스 올마이티'에서의 짐 캐리의 아내 역할도 있다. 역할의 경중을 떠나 다양한 시도를 하며 '포스트 프렌즈 시대'를 착실하게 준비하던 제니퍼 애니스톤은,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TV용 스타라는 평가만을 받았다. 어떤 평론가의 말마따나, '전세계 어디에서도, 케이블 TV를 틀기만 하면 볼 수 있는 스윗하트를, 누가 10불을 지불하면서까지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겠는가.'


설상가상, 2005년에는 그녀의 남편 브래드 피트가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에서 상대역으로 만난 안젤리나 졸리와 눈이 맞더니 결국 제니퍼 애니스톤과 이혼하고 마는데, 더 이상 '레이첼 그린' 이 아니게 된 제니퍼에게 쏟아진 세상의 모든 관심은, 그저 새로 탄생한 세기의 커플 '브랜젤리나'의 비운의 희생양으로 소비하는데 집중하기 바빴고, 그녀의 이후 출연작들에서 그녀가 어떤 역할을 맡아 어떤 연기를 한들 그렇게 덧씌워진 이미지가 불식되지 못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 이후, 그나마 한국에서 조명을 받은 유일한 영화가 있다면, 빈스 본과 함께 출연한 '브레이크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조차 빈스 본과 제니퍼 애니스톤이 그 영화를 찍으며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아메리칸 스윗하트가 브랜젤리나 커플의 그림자에서  드디어 벗어나고 슬픔을 극복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1년만에 결별한다.


아메리칸 스윗하트는 그렇게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프렌즈 리유니언'을 보고 난 뒤 다시 돌이켜보면, 여섯 친구들 중 '포스트 프렌즈 시대' 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는 다름 아닌 제니퍼 애니스톤이었다. 스윗하트가 아니라 꾸준하고 훌륭한 배우. '레이첼'이 아닌 '제니퍼.'



4. Brakeup


프렌즈의 황혼기, 그러니까 시즌8-10 정도 사이에, 뜬금없는 러브라인이 진행된다. 바로 조이와 레이첼이 그 주인공이다. 하기야, 뭐, 프렌즈 초창기의 원래 스토리는 모니카와 조이가 이어지는 것으로 기획되었었다는 믿지 못할 사실도 있다. 조이 역을 맡은 매트 르 블랑이, 친구의 여동생과 연애를 하는 설정이 자신의 캐릭터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주장하여 스토리가 수정되었다고 하는데, [스포주의!]-> 이로 말미암아 챈들러와 모니카의 그 유명한 청혼 장면이 탄생했으니 매트에게 박수를!


그러니, 여섯 주인공이 서로 언제 어떻게 얽힐지에 대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면, 누가 누구와 사귀다 헤어지고 다시 다른 이와 연결될만큼의 긴 세월인 10년을 끌고 온 시트콤이니만큼, 조이와 레이첼 커플도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조이와 레이첼의 러브라인은 출연진 전원이 입을 모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프렌즈를 사랑하는 수많은 시청자들도 프렌즈가 드디어 망조가 들었다고 격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전세계인이 바라는 로스와 레이첼의 재결합이 드디어 이뤄지는 것이 라그나로크처럼 정해진 우주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그 피날레를 향해 가기 위해 조이가 평생 처음으로 실연의 아픔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조이와 레이첼이 한 순간이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순간을 만끽하며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던 적이 있다.


절대적으로 압도적인 '쏘 매니 히스토리' 의 장본인들인 로스와 레이첼이지만, 레이첼이 로스에게 돌아온다면, 로스가 끝까지 진심으로 그것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뻔뻔해 보였다. 혹은, 소심한 남자의 첫사랑 서사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때, 그 남자가 소심할지언정 찌질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찌질하고 소심하지 않다면 가슴 아픈 첫사랑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슴 아프면서도 결국엔 행복한 엔딩이 되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기엔, 찌질하고 소심한 주인공을 보는 것은 못내 찝찝하다.


로스의 찌질함을 보고 있는 동안엔, 마치 나 스스로가 나의 모습을 받아달라 세상에 떼 쓰는 것처럼 느껴졌고, 레이첼이 로스에게로 돌아와 품에 안긴다면 로스가 느낄 감정은, 바래서는 안될 것을 바라는 나의 죄책감을 찌르는 듯 했다.


제 때 도착하지 못한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눈 앞의 그녀에겐 날카로운 말을 하며, 마침내 그녀가 마음을 열고 다가왔을 땐 갈팡질팡하면서, 그럼에도 동시에 그녀에게 잊지 못할 유일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로스보다,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하룻밤을 보낸 상대의 이름을 놀랍게도 그 다음 날엔 기억하지 못하곤 하는 조이가 덜 나빠 보였던 걸까. 글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어떤 맘인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낮은 톤으로 진지하게 상대방의 눈을 보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상심했지만 진지한 조이의 면모를 봤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겐, 모두가 욕하던 그 러브라인이 없었다면 프렌즈의 여운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을 것 같다.


아 몰라, 걍, 내가 보기엔 둘이 은근 잘 어울렸다니깐?


그리고, 또 다른 커플이 있다. '브레이크업'의 빈스 본과 제니퍼 애니스톤. '브레이크업'은, 나 홀로 조용히 응원하던 조이와 레이첼 커플이 실제로 이어졌다면 그 이후 여정이 어땠을지를 보여주는 듯한 영화다.


그리고 나는 조이와 레이첼에게 향했던 응원을 다시 철회하기로 했다.


조이는 실재할 수 없다. 그는 생략과 과장이 빚어낸 캐리커쳐로서 존재하는 시트콤의 캐릭터일 뿐이다. 마치 제니퍼 애니스톤이 연기한 레이첼이, 티피컬한 세상물정 모르던 여자애가 센스있고 사랑스런 스윗하트로 공고하게 자리매김했던 것처럼, 진지하고 실험적인 연극무대에 대한 열정과 비범한 재능을 지녔던 배우 데이빗 쉼머가 찌질하고 유식하지만 소심하고 자존심 센 로스 박사로 박제된 것처럼.

 

그나마 프렌즈 속의 섹시가이이자 의리남인 조이는, 'How you doin'?'으로 대표되는 미소가 있었다. 따뜻한 마음씨와 유쾌함과 단순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미녀에 대한 끝없는 관심마저 그를 더 좋아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트콤이 아니라 연애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브레이크업에서 빈스 본이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 게리는, 전혀 조이처럼 재미있게 보고 있어줄 만큼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이 처럼 피자와 콜라 따위 정크푸드를 좋아하며, 조이가 레이지보이에 앉아 TV를 보는 걸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TV에 플레이스테이션을 연결해서 게임을 하는 것을 즐기지만, 조이 처럼 몸매나 미소가 끝내주지는 않은 게리. (아니 사실 지금의 나보다 몸매가 나아보이지 않자나!)


심지어 조이처럼 자기가 그렇게 똑똑하진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마치 챈들러처럼 자신은 재치있고 재미있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는 성격이라 자부하는 게리. 점입가경으로, 게리의 친구(아이언맨의 감독이자 아이언맨의 비서를 연기했던, 그리고 프렌즈에 출연하기도 했던! 존 파브로가 연기했다.)가 게리에게 직접 이렇게 말해주기도 한다. '넌 재치있고, 모두가 널 좋아하지만...' 이라고 말이다. 아이고...진짜? 찐 절친이다, 참말로.


그리고 그의 연인은 아메리칸 스윗하트였으나 브랜젤리나 커플의 희생양이 되고 만 제니퍼 애니스톤이라니. 게다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이 둘이 이미 동거를 하고 있으며, 이 둘의 사이는 삐걱삐걱하며, 제니퍼는 결혼을 원하는데 빈스 본은 아직 그럴 맘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줄평이라는 양식을 빌어, 유식한 척 외래어로 끄적여보자면 이 영화는 다음과 같다.


"아메리칸 팻 메일'즈 스윗하트 판타지."



두 커플이 이별로 향하는 첫 언쟁을 마치고 난 뒤 여주인공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상심한 채 서 있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벽에 기대고서. 이것은 제니퍼 애니스톤이 숱하게 보여준 그만의 고유한 제스쳐처럼 보인다. 프렌즈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그 실루엣.


남자가 조용히 집을 나설 때, 제니퍼는 허리에 얹은 손을 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울음을 참는다. 그리고 남자는 끝내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우린 또 다시 제니퍼가 허리에서 손을 떼 입을 가리고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을 본다.



제니퍼 애니스톤의 한 손을 벽에 기대고 비스듬히 서서 허리를 다른 손으로 짚고 서 있는 그 실루엣과 그 연기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내가 프렌즈를 다시 보고 프렌즈 리유니언을 보고, 마음이 헛헛하여 결국 찾아보고야 만,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멜로 영화에서 이 장면을 찾아낸 것은, 마치 하늘에서 이 글을 쓰라는 계시가 온 것처럼 느껴진다.  


연달아 교차로 보여지는 저 평범하기 그지 없는 장면들 - 방 안의 여자(a) - 거실에 서 있는 남자가 현관으로 나가고(b) - 다시 방 안의 여자(c) - 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영화는 제니퍼 애니스톤의 독특하고 계산된 그 연기를 반복해서 써먹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두 번의 '방 안의 여자' 장면(a와 c)에서, 영화는 같은 컷의 다른 테이크를 반복해서 편집에 쓴 것으로 보인다. 좋게 해석해서 말해줘서 그렇다는 것이고, 어쩌면 편집자는 그냥 같은 컷을 복사해서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돌려봐도 그냥 같은 테이크로 보인다. 사실, 영화를 보다가 바로 멈춰서 확인했다. 그만큼 내 눈엔 티가 났다. 컷이 진행되는 동안 제니퍼가 연기한 세부 행동까지 그냥 아예 똑같다. 그러니까 a와 c가 똑같은 컷이고 그것이 그냥 반복된 것이다. 감독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극장 개봉에 이르렀거나 알아도 그냥 넘어갔단 소리다.


뭐 무슨 상관이랴. 제니퍼 애니스톤은 우아하게 상심하고, 예쁘게 슬픔을 삼켰고, 그 테이크는 우리 눈엔 너무나도 익숙하며 여전히 아름다우니, 걍 반복되면 좋은거지. 그런 거지, 뭐. 그렇지?


내겐, 이 기본적인 편집 실수로 대표되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메리칸 스윗하트를 우리의 입맛에 맞게 영원히 스윗한 대상으로 대하고 싶어 하는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5. 안녕, 스윗하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결국 헤어진 두 주인공이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짧은 대화 끝에 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던 길을 간다. 둘은 다시 뒤돌아 보고 눈이 마주친다.


아메리칸 펫 메일에서, 스윗하트와 헤어지고 조금은 정신을 차려 좀 더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살 좀 빠진 아메리칸 메일이 된 남자 주인공이, 한 때 자기가 사귄 적 있는 여전히 아름다운 스윗하트가 자신처럼 똑같이 뒤돌아 서서 자길 쳐다보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짐짓 싱그럽게 윙크를 한다. 나는 속이 더부룩해진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게 웃어준다. 그리고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 위로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 영화의 유일하게 잘한 구석.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여자의 걷는 모습으로 끝맺은 것.


나는 자신의 윙크를 스스로 뿌듯해 할 그 남자와 헤어진 그녀를 응원한다.


조이와 이어지지 않았던 레이첼, 브래드 피트와 이혼 한 제니퍼, 빈스 본과 사귀면서 현실판 조이와 헤어지는 여인을 연기를 한 제니퍼, 그러니까 누구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가십란에 오르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던, 우리 모두가 그녀가 로스와 연결되길 간절히 바라는 동시에 데이빗 쉼머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길 바랬던, 그만큼 우리 모두를 들뜨게 한, 아메리칸 스윗하트.


그녀와 사귀면 어떨지 상상하며 설레지 않고서, 그녀가 누구와 사귀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앞길을 응원한다. 문득, 나조차 제니퍼 애니스톤이라는 배우를 두고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덧1.

프렌즈 리유니언에서, 제니퍼 애니스톤과 데이빗 쉼머가 서로에게 가졌던 호감에 대해 깜짝 고백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둘이 드디어 사귄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이것은 우주의 기운이 역사한 것이며 이는 자신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이라는 프렌즈 팬들의 간증이 이어졌는데, 곧, 이 둘은 좋은 친구 관계일 뿐이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쏘 매니 히스토리에 1이 더해진 셈.  


덧2.

제니퍼 애니스톤은, 프렌즈에서 자신의 동생으로 나온 바 있는 리즈 위더스푼과 함께 애플TV+의 오리지널 시리즈 "더 모닝쇼"의 제작과 주연을 도맡았다. 애플TV+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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