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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Sep 30. 2021

전진하는 서사에 관하여

셀렌 시아마, <걸후드>를 빌미로.

돌파하기 힘든 마음


Y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비를 지원받아 만든 단편영화가 있다. 총 3편이 제작지원을 받았고, 그 3편의 단편은 애초에 느슨한 옴니버스로 기획되었으나, 결국은 각기 독립된 스토리의 단편영화로 완성되었다. (명계남 선생님이 세 편 모두에 잠깐씩 출연한 것으로 최초 기획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다.) 각각의 영화마다 한 명의 상업영화 감독님이 멘토링을 담당했고, 영화들이 완성되었을 때, 세 편의 스텝, 출연진, 멘토들이 함께 모여 내부시사를 진행했다. 나를 포함해서, Y의 영화 스텝들은, 다른 두 편의 스텝과 출연진, 그리고 멘토를 맡은 감독님들을 그 때 처음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완성된 영화도 마찬가지.


상영이 끝나고, 감독의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과 세 명의 멘토의 리뷰가 이어졌다. 홍지영 감독님은 다른 프로젝트의 멘토였다. 그는 Y의 영화를 보고 나서, 짧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Y는 그 단편영화를 만들기 전과 그 이후에도, 업계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요즘 한창 다시 캐스팅 기사가 뜨는 영화의 스크립터를 하기도 했고, (그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다고 한 게 5년 전이다. 그러니까 그 때 일이다. 그 때 그 영화는 엎어졌다. 다시 만들긴 할 모양이다.), 또, 코로나 사태 초기에 개봉을 알리는 기사가 났던 영화의 시나리오를 고치기도 했고, (그 영화의 첫 시나리오는 4-5년 전에 나왔고, Y가 충무로에서 그 시나리오를 고친 것도 그 즈음이다. 상징적 의미의 충무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영화사 사무실은 충무로에 있었다.), 중국에서 거의 도시 하나에 가득한 텅 빈 공장지대를 죄다 오픈세트로 꾸미고 야심차게 진행하던 대형 영화의 CG 코디네이터를 하기도 했고,(그 영화에 급히 투입된 후반작업 전문가 중에는, 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버드맨’의 CG를 담당했던 이도 있었다. 그는 매일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800억인지 900억인지 하는 그 영화도 결국 엎어졌다.) 독립장편영화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업계 1위 OTT 플랫폼과 연계한 드라마의 연출부를 하기도 했고, (그 드라마는 완성되어 방영되었다. 내 단편영화에 나오는 선배님도 출연하셨다.), 이제 곧 방송될 또 다른 드라마의 현장에서도 일했다.


각색, 보조작가, CG 코디네이터, 조연출, 어떨 땐 예고편이나 보도자료 번역,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계속 했던 국내의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의 통역. 그리고 종종 여러 제작사나 후반업체로부터 받은 여러 분야로의 입사 제안.


관련 직종에 관해서만 써 보면 이러하고, 이 외에도 Y에겐 한 때 두 종류의 이력서가 더 있었다. 판촉, 행사 진행 아르바이트와 관련된 이력서와 바이럴 광고 기획에 관련된 이력서. 그나마 첫 번 째 이력서를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 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Y는 꾸준히 오랜 기간 업계에서 다양한 일을 해 왔고 평판이 나쁘지 않으니 일이 나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유일하게 바라던 것, 그러니까 최소 한 시간이 넘는 영화나 단막극의 각본과 연출만 빼고.


다들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퍼가 되려면 서핑을 해야지 파도가 좋은 바닷가에서 아이스크림을 백날 팔아봤자 도움 안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도리 밖에 없다. Y는 아이스크림도 팔고 서핑보드도 깎고, 해가 뜨는 새벽이면 매일같이 직접 깎은 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섰다고.


그럼 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매일같이 해 뜰 녘에 홀로 파도를 탈 수만 있다면야, 서핑 대회에서 우승하든 말든, 남이 자신을 두고 서퍼라고 하든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다.


문제는 서핑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다는 데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것이 유의미함을, 하다못해 최소한 인간사에 민폐는 아님을, 줄기차게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뭐, 이 문제는, 연극이나 마임, 댄스 같은, 단체로 함께 하는 또 다른 분야의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겐 어느 정도 동일한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 이건 돌파하면 될 일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영업자든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자기 돈으로나 회사 돈으로나 파 둔 자기 명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해온 일들이나 자신이 속한 회사,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자신의 정체성과 커리어를 의탁할 수 있는 반면, 러닝타임 한 시간을 넘기는 영화나 단막극을 '연출' 하겠다는 맘을 먹고 업계에서 버티며 남는 시간에 자기 시나리오를 쓰며 코피를 쏟고 앉아있으면, 단편영화를 몇 편을 찍었든, 상업영화나 드라마 현장에 얼마나 오래 있었건 간에, 그 사람은 그냥 '감독 지망생'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서핑보드 깎는 장인이 되기도 하고, 서핑보드를 깎다가 아이스크림 체인점을 거느리게 되기도 하고, 서핑을 하다가 민박집을 하기도 하고, 민박집을 하다가 서퍼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는 동안, 배꼽 아래서 서퍼가 되겠다는 마음이 한 번 굳어지고 나면, 그 마음이 단전을 타고 올라와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스스로 서핑 세계의 주변부에서 배회하는 느낌이 들고, 모두가 자신을 꿈만 꾸는 철부지로 여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커진다. 하루를 멀쩡히 잘 보내다가도, 몸에 꽉 차 소화가 안 되는 그 마음이 목구멍까지 넘어올라와 목이 멘다.


이쯤되면, 자신이 그걸 진짜 해낼거라 믿지 못하고, 정말이지 그냥 원하고 바라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실은 계속 이렇게 곁눈질과 먼 산 바라보기에 중독된, 때 늦은 지망생, 혹은 이미 다른 걸 하기엔 너무 늦었고 여태 이룬 건 너무 없는, 바닷가의 행려자가 된 거라 되내인다.


그래, 흔히 이럴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돌파하기 힘든 일이다.



전진하는 사람


Y는 지금 좋아하는 까페에 와서, 반 년 동안 현장에 있느라 손대지 못했던, 자기 아이템들을 정리하고 있다.

Y는 돌파하려는 중이다.


Y의 몇 년간의 이력을 구태여 열거한 것은 , Y의 커리어가 하나의 일자리에서 다음 일자리로 이어지는 사이의 공백, 혹은 다음 시나리오를 쓰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면, 이 글 첫머리에 언급한 내부시사회에서 홍지영 감독님이 Y에게 해준 말이 내게 계속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꼭 Y에게 다시 말해준다.


홍지영 감독님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아이디어가 만들어지죠. 어쩌면 찾아오는 걸지도 모르고. 그리고 나서 그걸 시나리오로 써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기대를 하거나 우려를 해요. 기대를 너무 하면 만들어진 영화에 실망할 수도 있고, 우려를 너무 했다면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안도를 할 수도 있겠죠. 저는 여기 계신 다른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만들어진 세 편의 시나리오를 이미 읽어봤어요. 그리고, 제가 멘토를 맡은 영화를 제외한 두 편의 영화는 오늘 처음 보는 거죠. 아까 아이디어 단계와 시나리오 단계, 그리고 완성된 영화, 이렇게 단계가 있다고 했잖아요? 전 그걸 이렇게 생각해요. 시나리오에서 완성된 영화로 오기까지, 후퇴하는 영화가 있고 전진하는 영화가 있다고.. 오늘 본 Y 감독이 만든 영화가 바로 그 전진하는 영화에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나리오도 마음에 들었어요.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만들어진 영화는 시나리오보다 더 좋아요. 단순히 시나리오보다 완성본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난 이 영화가 전진하는 영화라서 좋아요.


전진하는 영화를 만드는, 전진하는 Y. 나는 그런 Y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좋다.


Y는, 아침 지하철 역에서 한 여자 아이가 긴 롱패딩에 스포츠 백을 매고 모든 사람이 내려서 가는 곳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떠올린 뒤, 그 단편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헤치며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아이를 뒤따라 가보겠다는 심산. 처음부터, 그 영화는 누구 말마따나 전진하는 영화였다.


그 영화는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여러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단편영화 찍으면 한 번은 갔다와야지.’라고 농담처럼 말할 때 등장하곤 하는, ‘끌레르몽 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되었다.  2017년이었다.


Y는, 아직 다음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전진하는 영화를 만든, 전진하는 감독이, 왜 ‘Y씨는 그래서 꿈이 영화감독이야?’라던가, ‘영어 잘하니까 우리 회사 정직원으로 들어와.’ 라던가, 한참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같이 한 영화사 대표에게 ‘회계팀 들어와서 시집 갈 돈 모으라.’ 란 소리를 듣거나, ‘현장에서 그린 매트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생글거리지 않는 걸 보면 넌 적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소리 따윌 들어야 되는 걸까.


사실 Y는 이미 20대 초반에, 자신의 첫 단편영화로 대종상 단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포함한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10년 전 일이다. 업계의 프로들이 그 영화를 보고나서 제작비가 적어도 수 천만원은 깨졌을거라 예상했던 세트를,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발품을 팔고 자재를 주워오고 차곡차곡 사서 모아 몇 백만원에 직접 다 만들었고, 스케쥴이 불가능할 거라며 생각을 좀 하고 덤비라고 빈정거리는 촬영감독에게 콘티와 프리비즈와 촬영스케쥴을 프린트해서 손에 쥐여주고 이대로 다 못 찍으면 그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촬영감독의 자질 문제일 거라고, 확인해보고 싶으면 자기 말을 들으라고 일갈할 정도로 강단 있는 감독이다. 그리고 그 촬영은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끝이 났다.


Y가 연출하는 현장에서 한 번이라도 같이 작업해 본 적 있는 스텝이라면, Y의 꿈이 영화감독이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Y를 감독이라 부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적성을 다시 생각해보라거나, 니가 현장을 뭘 잘 몰라서 그런다거나,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는 그런 게 아니라거나, 아무튼 간에 이런저런 하나마나한 조언인지 소음인지를 뱉는 이들이 Y의 수상 경력을 들으면 별 말 하지 않는다. 아, 꼭 하는 말이 있긴 하다. ‘상이 투자 받아오냐?’ ‘장편이랑 단편은 다른거야.’ ‘야, 예술이 밥 먹여주냐?’


누가 뭐랬나. Y에게 밥 먹여줄 사람 없을 것이 걱정이 되서 그런건가. 그래서, 일하러 간 회사에서 그렇게 매일같이 법카로 밥을 빙자한 술을 먹이나.


Y의 전진을 막는 건 무엇일까.

Y는 때때로, 자신의 능력부족, 오기 없음, 만만해 뵈는 인상, 소셜한 대화 스킬의 부족 등등, 한마디로 ‘이래나 저래나 결국 완벽하지는 못한 자신’을 탓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홍지영 감독의 그 말과, 그 말을 듣던 감독 Y의 얼굴과, 그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스텝들이 그 영화를 보며 지은 흐뭇한 표정을 떠올린다.


그래서, Y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꼬장부리는 꼰대들이 하는 말에 자기를 탓해야할만큼? 정말로?



널리고 널린, ‘좋은 게 좋은’


전세계 영화광들에게 한국영화가 핫해진지 오래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용광로처럼 에너지가 끓어 넘친다.' 우리가 극장이나 OTT에서 보는 외국영화들의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자국에서 화제가 되거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 일색일 수 밖에 없듯이, 외국에서 접할 수 있는 한국영화들도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팬들이 접하는 한국영화는 정제되고 산뜻하고 깔끔하면서도 익숙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헐리우드 영화들과는 다른 결이 아우라를 풍긴다는 점이 그들을 열광시키는 것이리라. 소위 'K 씨네마'의 위상이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동안, 올드보이에서 신세계나 부당거래, 아수라, 곡성으로 이어봄직한, 그 '들끓는 용광로' 영화들이 힘에 부쳤다. 가끔은 그냥, '무언가를 열심히 했더니 결국 꿈을 이뤘다'는 식의, 영화 마지막에 성조기가 흩날려야 될 것 같은 뻔하고 착한 영화들이 그리웠다. 꿈의 공장 헐리우드에서 찍어내는 아메리칸 드림 쿠키 같은 영화들. 그 쿠키 같은 영화에 쿠키 영상은 없이! 한 편만으로 충분한 영화들. 너무 달지도 너무 쓰지도 않게. 달콤쌉싸름한 쿠키같이.


그렇게 완성되기에 가장 좋은 장르는 성장영화다. 사실, 모든 좋은 영화는 주인공의 성장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성장영화라는 장르는 어불성설이지만, 이 글에서는 표면적으로 어린 주인공이 특정시기를 거치면서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성장을 이루는, 이를테면 통과의례의 시기를 거치는 이야기를 성장영화로 칭하겠다.


널리 알려진 영화로는 '빌리 엘리어트'나 '작은 아씨들', '레이디 버드', 좀 더 옛날로 가면 '스탠 바이 미',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또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나폴레옹 다이나마이트',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기적', 그리고 말해 무엇하랴 싶은 '굿 윌 헌팅'.


쌉싸름한 맛을 좀 더 한다면, 외피는 비슷한 또래가 등장하는 여느 성장영화와 다름 없어 보이지만 다 보고 나면 서늘하고 씁쓸하기 그지 없는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 아이들이 나오는 아기자기한 소품이라 생각하고 보면 큰 코 다치게 되는, '아무도 모른다.'와 '우리들'. 다르덴 형제가 만든 10대가 등장하는 일련의 영화들.


모두 훌륭한 영화들이다. 하지만 훌륭한 영화는 언제나 드물다.

내가 바라는 달콤쌉싸름한 쿠키같은 맛과는 전혀 다른, 까딱 잘못하면 당쇼크를 부르는 거북한 디저트가 된 영화들이 있다. 노오력하면 다 이뤄진다거나, 세상 모든 고난의 해법이 선남선녀의 연애가 시작되는 것으로 해결된다거나, 자기 앞에 놓인 문제가 세상 어떤 이슈보다 중해져서 주인공이 주변 인물 모두에게 사실은 그토록 무례하게 굴고 있는데도 그를 응원해야 하는 관객이 그 영화를 보다보면 같이 무례해지는 영화들. 진지한 척 하지만 나이브한 영화들.


성장은 좋은 것이다는 말은 대게 옳지만, 그 옳음은 무엇이 성장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되어 있을 때만 성립된다.


첫사랑과의 재회, 꿈꾸고 노력한 결과로 처음부터 꿈꾸던 것을 마침내 얻게 되는 것, 희생한만큼 보상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바를 인정받게 되는 피날레,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세상과 싸우고 주변인들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서사, 지금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대외적인 성과를 내는 것, 싸움에서 이기는 것, 남에게 인정받는 것, 스스로를 위축시키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변화시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것...등등.  이런 것들이 정말 언제나 우릴 성장시키는 올바른 방법일까.


그런 건 널리고 널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영화에서만큼은 내가 못 이루는 것을 대리만족시켜줘야 되지 않냐고 말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당히 달콤쌉싸름한 아메리칸 드림 쿠키 맛 성장영화를 맛보려다 당쇼크 디저트 영화에 중독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면 어찌해야 할까? 어떤 이야기가 우릴 성장시킬까?



그래서 삶은 고통이라고? 니가 날 괴롭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좌절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이뤄지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이에게 오해를 받아 그가 떠나가고, 손해를 보고 내색하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서 익숙한 본향을 떠나게 되고, 누구보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꾸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이들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지만 여전히 힘에 부치고 불안하고 막막하고 억울하고, 하지만 'life goes on.' 이라고 조용히 혼잣말할 수 밖에 없고, 꿈꾸던 것과 다르지만, 전혀 가까워지지도 않았지만, 지금 내 주변을 둘러보면, 나와 비슷한, 불안하고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누군가가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스쳐지나가고, 우리 사이는 우리라 부를 어떤 교감도 없지만, 너도 나와 같구나 싶고, 이 모든 게 슬픈 것인지 체념인지 통달인지, 내가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건지, 충분히 큰 것인지, 자라는 건지 늙는 건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고개를 들고 일단 우선 눈 앞의 한 발을 더.


이 상태가 성장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찌 전할까. 어떻게 표현할까. 이것으로 타인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이것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난제를 잘 풀어내면, 내 기준으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걸작이 된다.


그런데 앞서 말한 '당쇼크 유발 나이브 디저트 무비'가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몸에 좋지도 않고 위장을 통째로 태울 듯이 맵기만 한 야식같은, 성장영화를 빙자한 '고난 전시 포르노' 같은 영화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영화들은 위의 난제에 대한 답을 또 다른 질문으로 퉁쳐버린다.

우린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것 뿐 아닐까? 인생 결국 이게 전부 아니야? 우리한텐 해답이 없는 거 아닐까?

이 질문들을 더 파고들어보면 이런 질문이 더 등장한다. 답 없는 걸 고민해봤자 뇌의 전기신호에 따른 화학작용이 우릴 속이게 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게 없지 않아? 행복한 너는 이런 거 몰랐지? 유물론에 입각해보면 우린 그냥 노화와 부패로 향하는 것 뿐이지 않아?  


이런 태도로 만들어진 영화는 결국, 나이브함을 피하기 위해서, 쿨하게 등장인물에게서 거리유지를 하는 듯 하지만, 등장인물이 고통을 겪거나 고난에 처하면 카메라가 접사렌즈마냥 인물의 벌어진 상처를 클로즈업하고 그 눈에 맺힌 절망을 줌인해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자신과 똑같이 좌절하라고 종용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이 모든 고통과 고난과, 상처입고 망가지고 회복되지 않는 인물들의 심신과, 도저히 타파할 수 없는 절망적이고 폐쇄적인 세계는 모두, 그렇게 밖에 느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이란 것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이는 자신은 짐짓 냉철한 염세주의자이고 싶으나 실상은 외롭고 비겁한 가학주의자의 양상을 띈다. 아마도 그 자신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열살짜리 늦둥이 아들과 여행을 하며 '더 로드'를 썼다는 코맥 메카시처럼 되고 싶겠지만, 코맥 메카시가 그 책의 말미에 자기희생과 아주 작지만 꺼지지 않은 희망을 굳이 써놓았다는 건 모른 채하고 싶다는 듯이.


어떤 영화가 도대체 그런 영화냐는 질문에 답하게 되면 심하게 욕할 수 밖에 없으니 여기 굳이 적지는 않겠다. 다만, 십 여 년 전, 지금은 없어진 한 영화제에서(정성일 평론가가 프로그램 디렉터로 있었단 것만 힌트.) 관객심사단으로 참가해서 본 한 편의 영화가 그러했다. 15명의 관객심사단 중 나와 한 두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호평한 영화가 있었다. 발언할 차례가 된 나는 그 영화에 대해 바로 위에 쓴 것과 같은 평가를 내렸고, 토론 이후 진행된 투표 결과, 그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가 상을 받았다. 상금과 함께 부상으로 그 당시 꽤 고가의 디지털 캠코더가 수상자에게 주어졌는데, 그 상을 받은 감독은 다음 해에 또 다른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다시 초청되었다. 아마 전 해에 상으로 받은 캠코더를 매우 잘 사용했으리라.


한편, 관객심사단의 회의 초반에 대다수에게 호평을 받았으나 결국 상을 받지 못한 그 영화의 감독은, 내심 당연히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는 동안 어느 술자리에서 그 감독을 만나게 된 적이 있다. 자연스레 그 때 심사한 영화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나는 한동안 내가 너무 연출자의 의도를 비약해서 생각한 건 아닐지, 너무 독하게 평가했던게 아닐지 걱정했었는데, 그 날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심사 때의 내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단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다른 심사단에게 그 영화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보길 바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일은, 내 일생에 남과 함께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이라 자부한다.


이야기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요는 이렇다. 훌륭한 건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너무 달지도 너무 쓰지도 않은 괜찮은 성장영화는 드물다.



제도권 입성, 고통참기, 성장.


거창하게 무엇이 좋은 성장인가 실컷 떠들어봤지만, 간단히 말하면, 성장은 제도권 입성도, 불필요한 고통참기 내기도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억지로 직시해야 할 것도 있고 반드시 도달해야 할 가치도 있지만, 내게 그러한 것이 남에게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그리고, 동시에 내가 직시해야 할 것과 내가 도달해야 될 곳을 잊지 않기. 그것만 되어도 우린 성장했다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제 드디어 이 글이 영화 리뷰라고 우길 수 있게, 영화 한 편을 말해야겠다. 우리나라에선 줄임말로 '불초상', 원래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유명한, 셀렌 시아마 감독의 2014년 작, '걸후드'.


이 영화는 앞날이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16세 소녀 '마리엠'의 한 때를 비춘다. 혼자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와, 같이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는 폭력적인 오빠(그냥 좀 난폭한 게 아니라 걍 인성이 쓰레기다.), 그리고 두 동생과 함께 사는 마리엠의 일상은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동네 골목골목 불량배들이 진을 치고 있고,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불법적인 일이 널려있고, 약간의 각오만 하면 얼마든지 범죄자가 될 수 있는 환경.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면 자기가 그토록 싫어하는 폭력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오해를 푸느니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계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앞서 말한 '고난전시포르노' 의 길을 가지는 않는다. 마리엠은 즐겁게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동생들과 웃음이 가득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마리엠의 위태로운 삶이 언제 완전히 망가질지 억지로 조마조마하게 만들진 않으면서도 충분히 마리엠이 느끼는 피로감과 긴장된 마음을 표현해낸다. 동시에, 결국 모든 일이 잘 될거라 쉽게 위로하지도 않는다. 잠깐의 후회와 후회하느니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 널 뛰듯 오가고,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무너진 것들이 작은 호의와 용기로 다시 재건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주변은 크게 변치 않는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마리엠은 아주 조금은 변했다.


영화는 마리엠의 주변에 아주 작게 보이는 변화와 성장의 통로를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엠은 그 통로의 문고리를 제 때 발견하고 활짝 열어젖혀 모든 것을 해결해줄 하이웨이로 직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리엠을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선뜻 바른 길이 있다고 억지로 떠밀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 건지, 저 문을 열기 위해선 어떤 열쇠가 있어야 되는 건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을 열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던 일들이 왜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막고 있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지나고 보면 알게 된다. 잘못 들어섰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그럴 때면 지금 나의 무사함에 안도하고 감사를 느끼기도 한다. 마음이 향하는대로 한 일들이 멍청한 짓이었다고 자책하기도 하고, 그것이 훗날 나를 돕기도 한다.


이 영화는 우리 실제 삶과 닮았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말하자면, Life goes on.



전진하는 서사


마리엠이 사는 동네와 살아가는 환경은 우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마리엠을 보면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며 나는 그나마 저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라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쟤도 나처럼, 어쨌건 잘 살아가려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더 가깝다. 나보다 불쌍한 인생을 보며 다행이라 여기게 되는 이야기와, 나와 쟤가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연대하고 공감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

전자는 인물이 자신을 둘러 싼 상황과 환경, 자신이 처한 위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고난을 당한다. 그리고, 이처럼 앞으로 닥칠 위기가 얼마나 처절할지 아무 것도 모르되 그 위기가 도래했을 때 보는 이의 몰입감, 혹은 인물이 당하는 고통을 보는 관객의 고통이 극대화되게 하려고, 이야기는 관객을 인물에게 동일시 시키는 연출을 자주 사용한다.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 같달까? 포커스는 일부분에 맞춰져 있고 나머지는 흐릿하다. 전체를 볼 수 없다. 하지만 포커스가 맞춰진 곳에서 눈을 떼기는 쉽지 않다. 관객은 거리유지가 힘들다. 전체를 조망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몰입된다. 상황에 압도된다.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정보나 그로 인한 통찰보다, 디테일과 센 수위나 충격적인 사건과 그 묘사, 이를 돕는 리듬감이나 여러 효과가 우리의 감정을 몰아간다.


이런 이야기에서, 인물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판단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사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알 필요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모든 것을 알고 싶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무엇도 진실인지 아닌지 도무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사실, 스릴러나 추리물, 호러물에는 이런 연출이 더할 나위없이 어울린다. 이런 장르들은 인물이 아니라 상황, 순간의 효과, 이야기의 방향,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사건의 전말이 중요한 이야기라 그러하다.  그러니까 만드는 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 장기말처럼 움직여서 보는 이를 원하는 엔딩까지 끌고 가야 하는 이야기의 숙명이 그러하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드러낸다기 보다 우리의 체험과 감정의 잔상과 닮아있다. 우리는 안전한 극장에 앉아 위험과 짜릿함과 고양감과 안도감을 원 없이 겪고, 극장 문을 나선다. 그리고, 자신과 동일시 했던 영화 속 인물은 금새 잊는다.


예를 들면 '시카리오'가 있다. 두 시간 동안 관객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엄청난 이 영화에서, 우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에밀리 블런트와 일치한다. 우리는 그녀가 아는 것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녀가 느끼는 공포감과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흐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실 그녀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이 정해진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다. 그들 중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원래 계획대로, 원래의 역할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앞으로 달린다.


얼핏 이 영화는 앞으로 돌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쳇바퀴를 돌 뿐이다. 속도감을 보여주기 위한 수행의 일종으로 달리는 것을, 앞으로 향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 영화는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멕시칸 경찰 가족을 통해 이 꽉 닫힌 세계가 우리의 세계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일종의 비유로써의 가치를 충분히 지켜낸다. 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끝난 작전에 안도하고, 그 여운을 충분히 즐기며, 지옥 같은 저 세계에 내가 속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두 시간 동안의 체험적 재미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누구도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 하지 않는다.


2.

반대로, 후자의 경우, 인물은 언제나 자신이 이 세계에 놓인 위치와 자신의 역할을 파악하려 애쓴다. 언제나 인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이 일부러 최악의 상황으로 돌진한다고도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하나,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서 지금 자신이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역할을 절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삶이며, 이로써 이미 인물의 역할은 '주인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서 우린 어떤 의미냐고 묻는 것만큼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있나? 우리 삶에서 우린 그냥 주인공 아닌가? 그런데, 우리에게 해결안되는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 여기 난 왜 있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모르는 우리는, 에러가 난 컴퓨터처럼 멈춰 서 있나? 아니, 오히려 정 반대다. 우린 절대 알 수 없는 그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서, 뭐든 하고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매 순간 정답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답은 다시 바뀐다.


'걸후드'라는 영화가 바로 그러하다. 마리엠도 우리와 똑같이 살아간다. 그러니, 마리엠이 사는 동네가 어디든, 그녀의 가족관계가 어떻든, 친구들 성격이 어떻든, 나이가 몇 살이든, 그게 무슨 대수일까. 우리는 마리엠과 동질감을 느낀다. 이는, 우리가 '시카리오'를 보며 느끼는 몰입감과는 다른다. 우리는 마리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본다. 마리엠과 나는 다름을 확실히 인지한다. 그리고 마리엠의 주변을 본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 용기 있는 선택,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예상한다. 그녀를 응원하고 그녀를 걱정한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도 그녀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마리엠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녀를 둘러 싼 세상을 본다. 그러는 동안, 나를 돌아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우리는 삶에 대해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은 영화의 처음이나 끝이나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빙빙 돌아 제자리로 오거나 오히려 처음보다 못한 상황에 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영화가 끝이 나도 그녀는 계속 전진할 것이라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렇게 계속 살아갈테니.


여기까지만 말해도, 세심하게 펼쳐진 네러티브와, 인물과의 절묘한 거리유지를 해낸 좋은 성장영화의 미덕을 설명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걸후드'에서 굳이 언급해야 할 몇 장면이 있다. 이를 통해 '걸후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나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는 법


마리엠은 살아낸다. 선택의 기로가 계속되고, 선택의 결과를 피하지 않은 결과로, 연애도 하고 패거리도 생기고 거리에서의 평판도 얻고 일도 잘 해낸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될 때의 자신의 모습과 같은 한 소녀를 거리에서 마주친다. 그 소녀 또한 마리엠이 그러했던 것처럼, 골목에 진을 친 길거리 패거리들을 지날 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마리엠처럼 앞이 막힌다. 애꿎은 시비에 휘말린 그녀에게 패거리들이 위협을 한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그녀라는 것이 우리 모두가 아는 부조리한 이 곳의 암묵적인 룰이다. 한 술 더 떠서, 길을 걷던 소녀의 길을 막고, 위협하고 놀려대던 무리들이, 기분 나쁜 내색을 하던 소녀에게, 호감이 있어 잘 대해주려고 말을 붙인 것에 대해 그 따위로 행동하느냐며, 관심을 준 것에 고마워하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마리엠은 그녀를 돕지 못한다. 아니, 도울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패거리들의 행태가 맘에 들지도 않는다. 지금의 마리엠은 경험과 임기응변과 말빨과 기세가 모두 늘었다. 마리엠의 시야는 넓어졌다. 이 모든 것이 이제 똑똑히 보인다. 얼마 전의 자신과 다르지 않은 소녀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이 소란의 한 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는, 애초에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지금 여기 우두커니 서서 피하지도 맞받아치지도 못하는 소녀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리엠이 말한다. "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얼른 꺼져." 소녀는 마리엠의 말 대로 한다. 패거리들이 낄낄댄다. 소녀는 위기를 모면한다. 얼른 여길 벗어나라며, 돕는답시고, 사실은 갑갑하단 마음으로 내뱉은 말. 놀랍게도, 나는 저 당시의 마리엠과 똑같은 마음이 드는 것을 깨닫는다. 희롱하고 시비를 거는 패거리들에게 고마워하라니. 진심인가? 하지만 이 말을 마리엠에게 말하면 이렇게 되묻겠지. "그럼 어쩌라고?"


마리엠은 이후로도 온갖 일에 휘말린다. 어떤 일은 잘 해결하고 어떤 일은 엉망이 된다. 하지만 대체로 영화가 시작될 때의 위축되어 있던 아이의 모습은 옅어져 간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오빠마저, 이제 마리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리엠이 잘 해내고 있는걸까? 여태 잘 해내 온 거라 생각했던 게 사실은 한심한 자기합리화는 아닐까? 마리엠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계속 그런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마리엠도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것이 확실하다. 위의 저 장면 때문이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렇지만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제 나는 변했고, 변한 나에겐 예전에 내가 지키던 무언가는 사실은 멍청한 짓이었고,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무언가를 지키는 걸 다 관두게 되면 나에겐 뭐가 남는거지?


풀리지 않는 난제가 다시 등장했다. '걸후드'는 이 문제를 저 장면으로 풀어낸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렇지만 너나 나나 뭔가 하고 나서 후회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가만히 있는 것과 오답을 내는 것을, 정답이 아니라고 그저 무시하기엔,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 적다고. 너도 그런 적 있지 않냐고.


대놓고 묻는다. 안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묻고 굳이 오답을 답한다. O,X로 답할 수 없는 문제라며, 짧은 문장력이 모두 탄로날지언정 자신만의 주관식 답안을 써서 제출한다.



보잘 것 없지도, 멋들어지지도 않은


'걸후드'에는 마리엠의 뒷모습을 촬영한 달리숏이 두 컷 있다. 첫 번째 달리숏은 영화의 거의 중간지점에서 사용된다. 마리엠이 늦은 밤, 가족들 몰래 새로 알게 된 패거리들과 어울리기 위해 집을 나서기 직전의 장면이다. 마리엠은 조그만 잭나이프를 바지 뒤춤에 찔러넣고 한동안 싱크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음악이 흐르고, 결심이 선 듯한 마리엠은 휙 하니 화면 밖으로 걸어나간다. 오빠에게 맞고 친구에게 오해받고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고 억울함과 화가 쌓여 폭발 직전에 있는 마리엠이, 이제 이 집을 나서서 거리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드물게 멋지게 연출되어 있다. 음악이 점점 고조되면서 마리엠의 결단의 순간을 한껏 과장시킨다. 천천히 달리 아웃되면서 마리엠의 전신이 보여질 때, 부엌에서 조명을 받고 서 있는 마리엠의 뒷모습은 흡사 전사 같다. 나는 설레임을 느낀다.


두 번째 달리숏은 영화의 마지막 컷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마리엠은 이제 영화의 처음보다 더 지쳐 있다. 많은 일을 겪었고, 이제 다시 전과 같아질 수 없는 삶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주 아주 희미하고 작지만, 그리고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마리엠은 용기를 내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용서를 구하고, 뉘우치고, 다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고 나오는 참이다. 마리엠이 온 힘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그 집에서 돌아서서 현관 밖에 섰을 때, 밖은 화창하다. 환한 햇빛이 그녀를 비추지만, 그녀는 그늘 진 곳에 서 있어 어둡다. 마리엠의 뒷모습은 노쇠한 사람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마리엠이 기둥에 기대 선다. 참고 참던 울음이 터진다. 카메라가 마리엠에게 다가간다. 카메라가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마리엠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꾹꾹 참으며 눈물을 훔친다. 카메라가 더 다가간다. 이제 우리는 마리엠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만큼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엠의 눈물과 표정을 볼 수 없다. 마리엠의 뒷 머리가 화면에 꽉 차는 순간, 마리엠은 울음을 그치고, 몸을 추스린다. 그녀가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든다. 심호흡을 하더니 화면 밖으로 걸어나간다.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때론 멋있고, 때론 보잘 것 없는 순간이 지나간다.

그 인물을 중심에 놓고서, 달리샷으로 멀어지면서, 혹은 바짝 다가서면서, 우리는 그 삶에 증인이 된다.


그렇다해도 우리가 보고 싶어한 것을 다 볼 수는 없다. 때로 우린 증인이지 당사자가 아님을 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주지시킨다. 우린 다 말할 수도,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충분할만큼, 과하지 않게, 전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다. 어두운 곳에서 영사되는 영상과 음향의 조합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게.


영화가 끝이 나도 남는 것은 그런 것이다.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간 인물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나의 마음.  

그런 마음이 남으면, 마치 내가 성장한 것만 같다.



덧1.

이렇게 쓰고보니 '걸후드'가 무슨 세기의 걸작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싶은데, 뭐... 꼭 급을 따져야 할까?

하지만, 아쉬운 김에, 아마 이 글에 영화 제목만 바꿔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만한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셰리베이비] (2006)_로리 콜리어 감독

[피쉬 탱크] (2009)_안드리아 아놀드 감독

[노매드랜드] (2020)_클로이 자오 감독

 


덧2.

이 글 첫머리의 내부시사회를 마치고 마련된 뒤풀이에서, Y의 영화와 함께 상영한 다른 단편영화의 주연을 맡은 여배우가 Y와 담소를 나누었다. 인사치레가 아닌 게 확연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를 너무 잘 봤다며, 계속 좋은 작업을 하길 기대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진심 담긴 응원은 Y가 힘이 들 때마다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여배우 또한 이후로도 좋은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전진하는 배우, 전여빈.



덧3.

이 글은 사실 '걸후드'가 개봉했던 2020년 11월에 쓰여지기 시작했다. Y와 함께 까페에 가서, Y가 자기 일을 하는 동안 옆에서 쓰기 시작한 것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처럼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서랍에 담아두었다가 이제야 마저 쓴다. 지나고보니, 이 글의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 사이의 시간 동안, 나는 예의 그 '돌파하기 힘든' 시기를 보낸 듯 싶다.


그 사이, 우리가 좋아하던 그 까페는 문을 닫았다.

Y는, 그 곳에서 구상하던 아이템이 제작지원을 받아 한창 촬영 중인데, 위에 언급한 단편을 같이 작업한 스턴트우먼과 함께 만드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은 'breakthrough'다. 전진하는 감독,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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