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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07. 2021

디지털 & 펜데믹, 소셜 VS 로컬

<소셜 딜레마> 와 <스톤 로컬스>,전혀 다른 이 둘이 바라는 같은 미래

Old School


나비와 별로 친하지 않았을 때, 나비네 자취방에 얹혀 산 적이 있다. 나비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고, 놀랍게도 그때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비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같은 학교의 디자인연구소 연구원이자 내 같은 과 후배의 룸메이트였는데, 그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그가 자신을 나비로 부르니 우리도 그래야 한단 소릴 들었고, 우린 일부러 그를 나방이라 부르곤 했다. 좌우지간, 나와 나비는 전공도 다르고 출신도 달랐지만 이래저래 비슷한 구석이 있었는데, 둘 다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사실대로 말하면 관심사가 아닌 일에는 드럽게 굼뜨거나 초연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 햇살 좋을 때 드러눕는 것과 뜬 눈으로 지새는 밤을 너무나도 편애한다는 것. 말하자면 둘의 생활패턴이나 성격이 찰떡인데, 그러니 사람을 사귀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나도 나비와는 빨리 가까워졌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UFC나 PRIDE, K-1  등의 격투기 경기를 전도했고, 나방은, 아, 나비는, 내게 epl(영국 프리미어  축구 리그)을 전도했다. 놀랍게도 그 때의 나는 축구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놀랄 일은 또 있었는데, 그 때만해도 스마트폰이 있기 전이라, 인터넷 뱅킹이라 함은 컴퓨터를 켜서 하는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은행에 가서 계좌이체를 하는 것보다야 인터넷 뱅킹이 훨씬 편하다는 인식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놀랄 포인트가 뭐냐면, 인터넷 뱅킹이란 게 태초부터 있던 게 아니라 언젠가 새로 생겨난 것이란 사실과 그게 생기기 전에 살던 사람이 아직도 살아 돌아다닌다는 사실. 그러니 라떼아재들을 좀만 덜 나무라자. 그들도 하루가 멀하다고 혼란하다, 혼란해.


나는 나비에게 월세의 일부를 슬쩍 찔러줄 때가 되었다 싶으면, 그가, 빡친 목소리의 연구실 선배의 전화를 받고 마지못해 집 밖을 기어나갈 때 같이 길을 나섰다. (그 빡친 선배는 내가 잘 아는 동생이기도 했는데, 그는 매일같이 수행해야 하는 '연구실 후배놈 모닝콜' 업무에 빡침을 반복하다 급기야 나한테도 빡쳤..) 나비가 출근버스에 실려 가면, 나는 은행에 들러 빳빳한 새 지폐를 뽑아 은행 이름이 적힌 봉투에 담아 그의 빈 책상에 봉투를 올려두었다. 그 땐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글로 쓰고 있자니, 마치 중고등학교 때 읽던 김승옥이나 손창섭의 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먼 과거 같다.


어쨌든, 별로 중요치 않은 옛 이야기를 왜 하냐면, 나는 나비가 좋기 때문이고, 나비가 왜 좋냐면 그가 나에 대해 한 말 때문인데, 그래서 나비가 어떤 앤지 괜히 말해보고 싶었고, 그렇지만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건 나비가 뭐라고 말한 거냐는 것일텐데, 그 말이 바로 저 위의 상황이 벌어진 후에 나왔다.


나비는 그날도 어김없이 내 친한 동생이자 자기 연구실 사수인 L에게 실컷 깨지고 나서 실실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반쯤은 꿈을 꾸고 반쯤은 축구를 보며 한 손엔 리모콘을 들고 격투기 채널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을 더듬고 있었는데, 나비가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형."

"..." (뭘 또 굳이 자꾸 월세에 보태라며 이런 걸 주냐는 말을 할 거니까 자는 척.)

"형. 인터넷 계좌이체란 게 있는 거 알아?"

"알지."

"새 지폐는 어디서 자꾸 나?"

"은행에 가서 새 걸로 달라면 줘."

"일부러 격식 차리는 거야?"

"몰라, 걍 원래 그렇게 하는거야."

"올드스쿨이다, 진짜."


'올드스쿨? 뭐지? 멋진데?'


그 날이 실생활에서 저 단어를 처음으로 들은 날이다. 사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왠지 모르게 세상 딴딴하게 생긴 그 노란색의 미국 스쿨버스가 생각났는데, 지금도 그 버스가 좋은 건지 저 단어가 좋은 건지 헷갈린다. 그렇든 말든, 나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저 단어가 좋다.



Digital


한 때는 같이 일 한 스텝들의 페이도 봉투에 담아 현금으로 주는 걸 좋아했다. 1~2천만원 이하 규모의 작업이라면, 프로듀싱을 할 때도 제작비를 몽땅 현금으로 뽑아서, 각 항목을 네임팬으로 적어 둔 봉투에 돈을 담아두고 꺼내 쓸 때마다 영수증도 그 봉투에 함께 넣어두는, 일수가방 같은 파우치를 애용하기도 했다. '라떼는'을 시전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 있다. 기억나는가? '물을 돈 주고 사서 먹는 세상이 오다니..'라며 놀라던 때를?  전생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난 세기의 일이긴 하지만. 수돗물이나 동네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마시거나 이끼가 끼어 가는 정수기(안에 돌도 들었고 나무 프레임에 유리통과 수도꼭지가 달린 그 '올드스쿨' 정수기)를 사용하던 시절에서부터, 어디서나 판매되는 생수를 마시게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르긴 몰라도 보건과 위생상의 획기적 진보가 있었을 것이다.


번거롭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비생산적이던 것들이 혁신하여 새로운 시스템의 기준이 된 일이야 수도 없다. 때 맞게 이뤄진 그런 진보들이 있지 않았다면야, 인류의 운명은 한 편으로는 포화상태에 이르다 폭발했거나 또 한 편으로는 아사 직전의 상태에 이르다가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포화나 사멸로 돌진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모두가 조금 더 번거롭고 다소 불편하고 느린 길을 그냥 감내하는 길도 있을테고, 그것이 진보라고 부르지는 못할지라 해도 후퇴는 아닐 수 있지는 않은지, 최소한 그런 사상이 언제나 배제당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뭐, 이런 이야기야 나보다 수많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검증된 사상들이 서로 공방을 벌이며 또 다른 면의 진보를 향해가고 있을 것이고, 실제의 삶으로 사상을 실천하는 일군의 공동체들의 사례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퀘이커교도라던가, 미니멀리스트들이라던가 등등.


그거야 그렇다치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내 길지 않은 생애 동안에도 믿을 수 없이 변해버린 속도와 스케일이다. 어처구니 없도록 어마어마하기에 도리어 실감이 나지 않고 숫자로만 어렴풋이 인식되는 정보의 양과 전송속도. 킬로도 메가도 아니고, 기가의 단위를 쓰는 분야를, 디지털 데이터 용량 이외의 곳에서 본 적 있나? 내 삶에는 단 한 번도 없다. 하드를 처음 달고 태어난 286컴퓨터의 용량은 40메가였다. 불과 20여 년 전 이야기다.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숫자들. 데이터의 양만 그러한가?  시급이 주급이 되고 주급이 월급이 되어, 강을 거슬러 오른 연어처럼 드디어 내게 당도한 신성한 노동의 보상마저, 주문 밀린 연어초밥이 주방에서 배민 라이더의 가방으로 재빨리 옮겨 담기는 마냥, 이 통장에서 저 통장으로 곧장 스쳐지나가는데, 카드값으로 빠져나갔다는 그 놈의 숫자를 아무리 노려보아도, 우린 그것의 두께와 무게를 도무지 알 수 없다. 가정용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결명자차나 둥글레차 티백을 넣어 냉장고에 냉침해 두곤 했을 시절엔, 누구나 자기 집에 물 담는 병이 몇 개인지 훤히 알았다. 하지만, 요즘 한 해동안 자신이 쓴 페트병의 갯수를 세고 있는 사람이 있나? 혹 있다면 그 숫자에 우리나라 인구를 곱하고 거기에 우리의 평균연령을 곱하면, 단지 생수병을 담는데 쓰인 대한민국의 연간 페트병들의 무게와 부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가늠되는 사람은 혹시 있는지.


삼국지를 읽으며 도대체 백만 대군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상상만 해오다가, 2002년 월드컵 4강 때 광화문에 모인 인파를 보며 비로소 머리가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눈에 보이는 인근의 모든 땅이 바닥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꽉 차서 오로지 붉은 색으로 파도가 치는 듯 했는데, 경이로운 그 광경에 세상 모두가 놀랐고, 당연히 그렇게 놀랄만한 인파였지만, 그 때 숫자도 백만 대군에는 절반 밖에 미치지 못한 50만 명이었다. 그러니, 원래 그 정도 숫자는 가늠이 안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디지털 신호를 거쳐 기호화되면, 이 모든 규모와 속도와 부피와 가치의 증가에는 한계가 없어진다.    


손에 쥘 수도 없고 가까이서 천천히 뜯어볼 수도 없는 것들이 정작 내 실생활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면 한 번씩 덜컥 겁이 나는데, 이런 게 올드스쿨인걸까. 그래서 나는, 월세에 보태라며 건네는 지폐 몇 장의 무게와 나의 고마운 마음을 굳이 느껴보라며, 빳빳한 새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어보라고 강권하듯이 그렇게 봉투에 담아 직접 건넸던 걸까. 그랬을리는 없지. 그냥, 나비가 자주 쓰는 말버릇처럼, '그렇게 살아왔거든.' 말마따나, 내가 그냥 올드스쿨이었던 것 뿐, 세상은 바뀐지 오래다.


가늠할 수 없는 숫자로 모든 것이 치환됨으로 인한 비현실성 뿐만 아니라, 속도와 스케일의 한계없는 증가로 인해 더 부각되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거리감각이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즉시 눈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 그리 놀랍지 않지만, 31년 전,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연합군이 이라크의 본토를 융단폭격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던 CNN 뉴스로 우리가 받은 충격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 이전의 세상은 어떠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개인용 PC가, 인터넷이, DSLR이, 스마트폰이, SNS가, 유튜브가, 그리고 A.I와 머신러닝이, 그리고 마침내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가 나타나더니, 이제 멀티버스가 도래하고 있다. 그 어디의 누구와도 실시간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고, 데이터가 축적되면 무엇이든 예측할 수 있고, 만나는 공간마저 가상과 현실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세상. 개인과 개인의 거리와 각자의 역사가 무의미해진 세상. 뭐든 극복이 가능하고 접속가능한 무한한 확장과 연결의 신대륙, 디지털.



Social


어떤 서비스가 무료라면, 당신은 고객이 아니라 상품이다. - [소셜 딜레마] 중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의 메시지는 자명하다. 우리가 손에 든 스마트 기기로 말미암아, 무한한 확장과 가능성의 신대륙을 항해하게 된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니라 소수의 기업들이란 사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신대륙을 찾아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필요에 의해 대륙을 새로 만들고 있는데 거기 쓰이는 모래와 물은 바로 우리들이다. 모래와 물이 아무리 많아봤자 그건 모두 우리 각자의 손에 쥔 것들인데 그들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 모래와 물을 우리 스스로 그들의 신대륙 해안가로 옮겨놓게 하는 것은 우리의 접속시간이고, 그 접속시간을 관장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알고리즘, 더 쉽게 말하자면 '당신이 좋아할만한 추천 콘텐츠'와 '00가 당신의 피드를 좋아합니다' 알림이라고.


어떤 얼치기 음모론자들이 만든 다큐멘터리의 급진적인 주장이지 않냐고 할 사람들을 위해 이 다큐멘터리의 출연진들 중 일부를 밝혀보자면, 원래는 세상에 없던, 페이스북이란 게 태어나고도 처음엔 없었던(!) '좋아요' 버튼을 만든 사람도 그들 중 하나다.


냉정히 따져보자.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그래,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과 애플, 유튜브의 위력을 말하는 건 알겠는데, 기껏해야 한 손에 꼽을 만한 그 기업들이 세상의 돈을 쓸어간다해도, 우린 그 서비스를 죄다 공짜로 쓰잖냔 말이다. 가끔 호구 잡혀 유료서비스로 전환을 하고 다시 해지를 하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맞다. 우리가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은 공짜여야 한다. 적어도 처음엔. 혹은 겉으로 보이기엔.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쏟아붇고 있는 듯이 보이는 저 기업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구축하고 키워가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그들 각자가 자체 개발하고 있는 알고리즘 시스템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방법에 빗대어 보자면, 한 사람이 살면서 접할 수 있는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바둑 기보를 학습하고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 경우의 수를 연산하고 적용해본 후에 다음 수를 직접 두는 것이 바로 알고리즘이다.


우리가 알파고에게 바둑을 진 이세돌을 본 날 충격을 받았던 것은 왜일까? 아마도, 상대를 앞에 앉혀놓고 같은 룰로 서로 승부를 겨루는 바둑이라는 게임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그랬으리라. 특수목적이 눈에 선명히 보이는 인공적인 것의 위력. 그런데, 바둑의 룰을 학습시킨 알파고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이용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침투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경각심도 느끼지 못할까? 그건 우리의 막연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알파고는 오히려 그 고정관념을 깨는 특이한 예외 사항으로 취급받은 것이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던가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의 단어가 자주 들려온다. 그 단어들이 사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A.I가 보편화되면 없어질 일자리가 몇 개라는 둥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형 안드로이드들이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걸 막연하게 두려워하기 이전에, 그보다 먼저 막연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급해 보인다. [소셜 딜레마]는 이를 지적한다.


문제의 그 고정관념은 무엇인가? A.I는 객관적이고 정확하고, 그래서 인간적이지 않다는 두리뭉실한 생각이 그것이다.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 이전에, 과연 인공지능은, 그 인공지능의 사고체계의 근간이 되는 알고리즘은, 객관적인가? 정말 그런가? 왜 그런가? 신이 만들어서 그런가? 인간이 만들어서? 윤리적인 인간이 만들어서? 인간은 윤리적인가? 완벽한가?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도 결국 인공지능은 스스로 완벽을 향해 갈 것이기에 그런가? 아니, 그렇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목적성, 심지어 편향성과 오류를 지니고 있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알고리즘의 편향성에 대한 심플하고도 탁월한 다큐멘터리 '알고리즘의 편견'의 내용이 바로 그 제목 그대로다.)


인간이 만든(당연히 그렇겠지.) 가장 탁월하고 광범위하고 위력적인(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아는 회사들이 만든)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공짜로 제공되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해서 접속률을 높이고, 개개인에 대한 서비스의 접근 거리를 더 밀착시키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 개개인에게 밀착하여 분석한 결과를 통해 실제적인 리액션을 불러일으킬만한 대응에까지 이른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의도된 랜덤 새로고침, 간헐적인 자극을 지속시키는 재빠른 피드백, 결코 내 것으로 축적될 수 없는, 그마저도 와이파이가 끊기면 無로 돌아가는 지식인 답변.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사용자는 접속 상태를 중단할 수 없고, 결국 그 상태에 중독된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되게 만들어진 결과다. 오버하지 말라고? 저명한 미국의 통계학자가 한 말을 들어보자.


고객을 ‘사용자(user)’라고 부르는 산업은 단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마약이요, 하나는 소프트웨어 산업이에요." - 에드워드 터프티 -


또 다른 이의 말을 들어보자. 구글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구글을 위시한 IT기업들의 디자인과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우려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이가 있다. 그 보고서가 실리콘벨리를 뒤흔든 뒤, 인터페이스 디자인에도 윤리학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그는 구글에서 디자인 윤리학자로 일하다, 지금은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주창하고 있다. 애초에 디자이너이자 심리학 전공자였고, 이제는 윤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이렇게 말하다.


"자전거가 나타났을 땐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도구라는 것은 쓰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습니다. 뭔가를 당신에게 요구한다면 도구가 아닌 거죠. 소셜 미디어는 사용되길 기다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만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당신을 유혹하고 조종하며 당신에게서 뭔가를 요구해요. 당신의 심리를 역이용해서 말이죠."  - 트리스탄 해리스 -


이런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겐 필요했다. 무엇이? 식기세척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못했으나 있으면 좋을 것을 알았고, 그것을 만들고나니 생각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기세척기는 식기를 세척하는 것을 넘어 가족과 등을 돌려 싱크대에 서 있어야 하는 주부들에게서 고립되어 있던 죽은 시간을 되찾아 주었다. 이것은 단지 식기를 세척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최적화를 마친 단 하나의 식기세척기가, 업데이트를 거듭한 끝에 완성된 가장 궁극의 식기세척기가 탄생했다면? 궁극적이긴 하지만 유일하진 않았던 그 식기세척기가 결국 세계인의 표준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품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것을 쓰는 것이 우월함의 표식은 아닐지언정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은 도태됨을 뜻하는 지경이 되는 것을 상상해보자. 소소한 업데이트가 계속된다. 당연히 우리도 자연스레 식기가 늘어난다. 식기가 늘어나도 세척시간은 줄어든다고 한다. 식기를 세척하던 것이, 삶은 빨래도 처리할지 모른다. 좌우지간 한 번 산 식기세척기는 진화를 거듭하여 우리를 돕는다. 여기까지는 굳이 비약이 필요없다.


그런데, 그 식기세척기가, 우리에게 어떤 식기를 써야할지를 암시하기 시작한다면? 아주 미묘한 교정을 통해 결국 세상엔 단 하나의 브랜드에서 만드는 완벽한 식기세척기와 그에 딱 맞는(그렇게 설계된) 단 하나의 브랜드의 식기만 남게 된다면?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은. 왜? 몇개의 거대 브랜드가 그 유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릴 두고 경쟁할테니까. 누가 이길까? 우리가 우리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려준 상대가 이긴다. 그게 바로 빅데이터와 딥러닝과 인공지능의 세계다. 고객을 응대하는 플랫폼에서, 우리가 고객이 아닌 대상이 되고 우리를 리소스로 또 다른 고객이 확보되는 시스템. 공짜로 시작했기에 우릴 담보로 장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유일한 이상향.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짜로 시작된, 기업을 위한 사업모델은 우리의 확증편향을 더 가속화하고, 이를 통해 분극화를 야기한다. 그것이 이들의 사업수익의 극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러는 것이 카테고리로 나누기 편하기 때문이고,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은 집단의 성격을 더 선명하게 만들수록 예측하기 편하고, 반응을 끌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이 분극화라는 현상은, 마침내 우리가 우려해야할 문제의 핵심으로 향한다. 빠르고 효과적인 피드백을 위하여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이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분석 결과. 그것은 바로, '부정적 반응은 언제나 싸고 효과가 더 크고, 긍정적 반응은 시간이 걸린다'는 결론. 신뢰를 쌓는 것은 오래 걸리고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은 순간이다. 네이버와 다음, JTBC와 채널A, CNN과 FOX, 시사인과 월간 조선을 잠시만 흘겨봐도, 우린 영원히 단절된 확증의 이세계를 간접적으로 교차 경험할 수 있다. 비단 정치적 성향 뿐만이 아니다. 취향과 성향, 성격과 가치관, 이 모든 것이 극단으로 갈린다. 각기 다른 것이 서로 섞이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도리어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이니 우리는 충분히 서로 섞여있다고 착각하는데, 자유롭게 그 담벼락을 넘나드는 행위가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넓혀주진 못한다. 우리 개개인에겐, 우리에 대한 분석을 마친 각기 다른 담벼락이 실시간으로 추천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정치적 의도가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효율성 문제로 그런 일이 발생한다.


우리는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우리의 길은 여정이 아니라 사격장의 사로다. 목적지가 아니라 과녁을 정확히 겨냥하고 정조준한 그대로 적중한다. 신속정확한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나와 다른 이의 차이점과 나와 비슷한 이와의 동질감이 강화된다. 그 결과, 분노와 차별과 신념이 공고해진다. 분석하기 좋게. 피드백을 얻기 쉽게.


[소셜 딜레마]에는, 페이스북이 미국 대선 기간 중 비밀리에 실험한 데이터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SNS는 분극화를 의도적으로 조장할 수도, 실제 사람들의 집단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증거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급기야, 2020년, 이런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stopHateForProfit

'이익을 위한 증오를 멈추라.'

미국에서 페이스북을 대상으로 전개된  캠페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파별 발언을 방치하고,    동안 sns 상의 각종 차별 발언과 가짜 뉴스의 확산을 묵인했던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러 인권 단체가 시작한  캠페인은, 160 이상의 기업이 함께 참가하였이들 모두 페이스북에서의 광고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소셜 딜레마'에서, 초창기 SNS와 알고리즘 연구에 헌신했던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이 해 온 일의 결과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공지능은 객관적이지 않다. 극도로 수익모델에 편향되어 간다. 그것이 그 입장에선 유일한 당위성이 된다. 그리고 이미 인간은 빅데이터를 통제할 수 없다. 사용자 경험 설계에 윤리학이 시급하게 적용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소셜 딜레마'라는 말은 고객이 리소스가 된다는 의미에서 다큐의 제목이 되었겠지만, 이 다큐를 다 보고 난 뒤엔, 개인을 서로 연결해 준 소셜 네트워크가 우리를 섬처럼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걸 알면서도, 이대로 계속 접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세상에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모든 정보는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한 이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이들은 자신들이 너무 이상주의자였다고 말하지만, 이들이 애초에 그런 주장을 하면서 했던 우려는 오늘날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도, 구글도, 페이스북도, 유튜브도, 애플도, 아마존도 예측 못한 일이 발생했다. 광활한 디지털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꽉 차버린지 오래라 여겨 진 우리가 사는 땅덩어리 위에.



Pandemic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서로 간의 거리와 마주한 상대방의 규모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다르다. 일대일 개인 커뮤니케이션과 1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각각 커뮤니케이션 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른, 그러니까 마이크를 쥐었느냐 쌩목으로 소릴 질러야 되느냐, 방송에 나왔느냐, 무대에 섰느냐 등등의 차이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양상에 구분을 두는 것이 기본인데, 이제 그런 것은 다 무의미해지는 듯하다. 모두가, 집에서, 굳이 필요하다면 상의만 잘 차려입고, 노트북을 열어 '줌'을 켜니까.


사실, 펜데믹 이전에도, 인터넷 채팅과 메신저 앱의 등장으로, 이미 대화의 양상은 달라진 지 오래다. 훅 들어왔다가 휙 나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 채팅창에 치는 말들은 결코 서로 씹히지 않는다. 말이 씹히는 것처럼 표현되려면 서로의 글자가 겹쳐야겠지만, 디지털 신호는 아무리 동시에 근접하더라도 우리가 입력한 정보의 순서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나열한다. 그러니, 말을 끊는다는 의미도 퇴색한지 오래다. (대신 도배가 새로 생겨났..) 언제든 이미 지나가버린 이전 대화에 대한 댓글을 지정해서 다시 달 수도 있고, 대화의 시작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고민하며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필요도 없이 일단 말을 걸면 되고, 답하기 싫으면 읽씹을 하던가, 읽씹으로 보이지 않게 미리보기로 읽고 앱을 열지 않는 방법도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팔로워를 현실 세계에서 맞닥뜨리고 어색해하는 것도, 그 반대로 마침내 서로를 대면하여 그 누구보다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엔 오히려 실생활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이 상호 간에 마음 편하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다. 회식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느니 혼밥, 혼맥을 하며 넷플릭스를 보거나 왓챠파티를 하는 게 낫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그것도 전 지구적으로, '왠만하면 비대면으로의 전환',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를 쓰는 것이 규칙', '모임 제한'의 시대가 와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행성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처음엔,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넘어 갈 해프닝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동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아마존 등지의 야생동물 개체 수가 다시 늘고 있다는 해외 뉴스도 훈훈한 반짝 뉴스처럼 여겨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미세먼지도 수치도 낮아졌다는 뉴스도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큰 교훈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미세먼지를 걱정하거나 교훈을 얻었다며 여유부릴 때가 아니게 되었다. 한적해진 도심의 길거리는 새로운 느낌을 주는 볼거리가 아니다. 마스크를 쓰니 나름 낯선 이를 만날 때 편하다는 이야기도 더는 하지 못한다. 우리는 표정을 잃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존재가 된 지 2년이 지났다. 고립감은 심해져 간다. 우리는 더더욱 서로 연결되길 바라게 되었다. 더 새로울 것이 없어보이던 소셜 네트워크와 인터넷은 새삼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다. 사무실들이 분해되고 상가가 사라지는 동안, 디지털 플랫폼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커뮤니케이션한다. 그 어느때보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비대면으로 이전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잠자코 있던 단톡방에서 더 자주 말을 걸고, 가상공간에서 이전보다 더 자주 만난다. 온라인 쇼핑몰을, 배달 앱을 더 자주 사용한다.


그럴수록, 그러니까, 모니터가 밝게 빛나고 핸드폰이 연신 알림을 울리는 와중에 창 밖으론 택배 트럭과 배달 오토바이 소리만이 들리는 밤을 지새고 있으면, 더 실감이 난다. 당연하게도, 비대면은 대면과 다르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다르고, 공기청정기를 켜두고 유튜브를 보면서 하는 홈트와 마스크를 벗고 숲을 뛰는 조깅은 다르다는 게. 소셜 네트워크는 로컬 릴레이션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게.



Local


느지막히 일어나 커피를 내려 마시고,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의뢰받은 영상을 편집하고, 쉬면서 유튜브를 보고, 청소를 하면서 애플 뮤직을 듣고,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냉동실에 있는 밀키트를 꺼내 근사하게 플레이팅을 해서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밥을 먹고, 단톡방에서 수다를 좀 떨고, 재밌는 밈을 서로 공유하고, 웹툰을 보고, OTT에서 드라마나 예능을 보고, sns를 유랑하다 잠드는 어떤 날을 생각해보자.


굳이 언제일지 떠올릴 필요없이, 요즘 재택근무를 하는 1인가구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일상일 것이다. 말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나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출퇴근 길에 불쾌한 기분에 시달릴 일 없이, 억지로 정해진 것 없고, 마음을 다잡고 굳이 도전해야 할 난제도 없이, 느긋하지만 무리없는 하루를 보낸 뒤 잠자리에 눕는다. 인터넷 포털을 오가다, sns를 다시 한 바퀴 돌아본다. 잠들기 전에 틀어놓기 좋을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인다. 별로 피곤하지 않은 듯,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뭐, 그래도 괜찮다. 출근 준비에 걸리는 한시간 반이 없으니, 내일도 세수만 하고 편한 옷을 입고 익숙한 내 방에서 하루를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와 정반대의 하루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역에 발령받은 영업사원의 하루나, 몇 주간 새로운 팀원들과 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되는 행사현장 책임자의 하루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발바닥도 아프고 머리도 복잡하고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입이 마르고, 대충 한 끼 때우려던 계획과 달리 한 차에 타서 한참을 가야 하는 식당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막상 한 술 뜨니 맛이 기가 막혀 기분이 나아졌다가,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꼬여서 급하게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뛰어야 될지도 모르고, 처음 만난 이의 안 좋은 첫인상이 역시 미팅의 내용을 결정하게 되거나, 그 반대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던 상대가 선뜻 호의를 베풀어 한시름 놓게 된다거나, 버스에서 졸아서 다른 역에서 내렸는데 비까지 오고, 우산을 샀더니 비가 그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에 길냥이와 마주치고, 길냥이를 한참 구경하다 집에 와서야 사진을 찍지 않았단 걸 깨닫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먹고 그냥 잘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기로 한 운동은 가야한다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운동복을 챙겨 나서는데, 오늘따라 컨디션은 너무 안 좋고, 그런데 막상 같이 운동한 이들과 수다를 좀 떨다보니 운동을 오길 잘 했단 생각도 들고, 그러고보니 뭉쳤던 종아리와 발바닥이 좀 나아진 것도 같고, 집으로 와서 씻자마자 곯아떨어지니, 피곤해도 이렇게 피곤한 하루가 있나 싶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건 두 경우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전자는 가능하면 최대한 늘어져 있을 수 있다. 후자는 선택권이 없다. 알람이 울리면 바로 깨어나야 한다. 분 단위로 해야할 루틴이 있고, 그 루틴이 늦춰지면 53분에 출발하는 지하철을 못 타고, 그걸 못 타면 11분 뒤에 다음 지하철이 오는데, 그럼 내려서 뛰어야 된다는 식일테니.


그런데, 왜 난 후자의 하루가 덜 피곤하게 느껴질까? 이리저리 치이고 시달리고 예상과 다른 일을 맞닥뜨리고 그러다 더 나아지기도 하고 더 나빠지기도 하는 후자의 하루보다, 편한 마음 상태로 느긋하게 할 일을 하는 하루를 보낸 전자가 왜 더 표류하는 느낌이 들까?


격무에 시달리는 것이야,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전자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 없이 며칠 밤이고 샐 수 있다. 후자도 녹초가 될만큼 심신이 지칠 수 있다. 전자는 혼자 명상을 하고, 잠들기 전 전화를 해도 받을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후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부지불식 간에 누군가의 표정과 목소리를 보고 듣고, 어깨에 얹은 손의 감촉을 느끼고, 그 또한 남에게 그렇게 에너지를 쓴다. 말하자면, 손에 쥘 수 있고 가까이서 천천히 뜯어볼 수 있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 정도의 차이.


'줌'을 통한 온라인 화상 회의는 '소셜'한 행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먼 거리를 좁혀주는 온라인의 이점, 모두가 준비된 상태로 정해진 시간에 바로 본론으로 돌입할 수 있는 효율성, 가까이 보이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진 않아 자세히 보이지 않는 서로의 빈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버린 거래처 자판기에서 마주친 담당자와의 대화는 그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인사치레 뒤에 곧이어 서로 공통점을 찾고, 연관성을 찾기 위한 물꼬를 튼다. 본론은 아직 시작할 수 없고, 그 곳에서 만나기 위해 이동한 거리만큼 이마에 맺힌 땀이 바로 코 앞에서 보인다. '소셜'과는 거리가 먼 직접적인 마주침.


물론, 칼로 두부 자르듯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일을 하려면 직접 만나야 된다거나, 일이 잘 되려면 소위 '꽌시'를 잘 해야 된다거나 하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올해 초에 오로지 온라인 회의만으로 진행한 작업이 근래 들어 가장 원활하게 마무리된 일 중 하나였고, 그 때 온라인으로 만난 담당자와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펜데믹 이후로, 대체될 수 있을 것만 같던 것들이, 사실은 대체될 수 없는 거란 게 더 확실해졌다는 이야기다. '소셜'이 아니라면, 그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로컬'?


이를테면, 편의점 알바를 하는 동네 동생 덕에 편의점에서 촬영도 하고, 동네 수퍼에서 전동 드릴을 빌려 쓰기도 하고, 추석 연휴 땐 수퍼에서 명태전도 얻어다 먹고, 단골 순대국밥집 오뎅 반찬이 맛있어 그걸 봉투에 담아 팔라고 한 뒤에 주변에 영업도 해주고, 집주인 아저씨가 택시를 몰아서 급히 밤에 병원에 누굴 데려가야 될 때 초인종을 눌러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며칠이나 몇 달 전에 약속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하고 그 날이 오면 그 장소에 일찍 나가 두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다 멀리서 점차 가까워지는 상대를 웃으며 바라보던, 그런 것들.


좋게 말하면 올드스쿨, 솔직하게 말하면 옛날 사람이 할 법한 소리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명동 거리가 텅 비는 날이 올 줄 몰랐던 우리다. 내가 속한, 인구 30퍼센트에 육박하는 1인가구, 그 중 한창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의 청년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구보다 소셜한 네트워크와 담백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대인관계에 익숙하던 그들이 맞닥뜨린 펜데믹 이후의 일상은, 그들이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을 필요로 한다.


고향은 멀어 가족을 못 만난지는 1년이 지나가고, 친구나 동료와도 온라인으로 소통한지 오래, 굳이 집 밖을 나설 필요도 없이 모든 게 핸드폰 터치 몇 번에 모두 해결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노라면, 밤에 열이 올라 코로나에 감염된 것인지 단지 그냥 몸살인지 헷갈리는 날이라도 오면,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그냥 가까이에 있는 '동네 친한 아무개'가 아닐까? 그게 '로컬 커뮤니티'의 힘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희대의 자유로운 영혼, 이본 쉬나드라는 사람이 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암벽등반, 서핑, 낚시, 등산 등등 온갖 레포츠를 즐기던 이 양반은, 자신이 사랑하는 암벽이 클라이머들의 장비 때문에 훼손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급기야 암벽에 구멍을 내지 않으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클라이밍 장비를 직접 만들어 주변 클라이머들에게 팔기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설립된 '쉬나드 에큅먼트'는 지금의 '파타고니아'가 되었다.


'우리 옷을 사지 마세요.' 라는 문구를 쓴 광고 따위를 만드는 이 별난 회사는, (사지 말고 헤지면 기워 입고 자식들 물려주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여전히 쉬나드 영감의 스피릿이 유지되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파도가 치는 날엔 직원들이 사옥을 뛰쳐나가 서핑을 하는데, 레포츠에만 진심인 게 아니라 환경 문제에도 진심인 것이, 매년 전체 매출의 1%를 지구를 위한 세금이라며 풀뿌리 환경 단체들을 지원하는데 쓴다. (순이익의 1%로 생색을 내는 게 아니라 전체 매출의 1%)    

 


이 회사에선 가끔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 다큐멘터리도 제작을 하는데, 그 중 클라이머들과 클라이밍 커뮤니티에 관한 다큐멘터리, '스톤 로컬스'가 있다. 클라이밍엔 문외한, 언감생심 도전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나에게, 이 다큐멘터리가 흥미로운 지점은, 암벽을 등반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암벽을 등반하면서 삶의 태도가 바뀐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클라이밍 커뮤니티에 대해 말한다. 20대 무렵부터 암벽 아래 공터에 자릴 잡고 화덕에서 구운 피자와 먹거리를 팔며 클라이머들의 아지트를 운영해 온 노인도, 10대 때 천재란 소리를 들었고 누구도 감히 오르지 못한 루트를 매일 같이 도전하고 있는 클라이머도, 어린 시절 집 앞 암벽을 타다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회사원으로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도, 자신이 자연에서, 함께 암벽을 타며 만난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에 대해 말한다. 그로 인해 나아진 자신이, 자신이 얻은 자신보다 더 큰 것을 다른 이와 나눌 때 느끼는 충만함에 대해 말한다.



작지만 친밀한 모임에서 공유하는 경험과 교감이 쌓이고, 그런 모임이 점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다. 이처럼 작지만 단단하게 모여 차근차근 확장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개개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쌓아올린 가치관이 형성된다. 좁게는 친밀감이, 넓게는 큰 사상이 조화를 이룬다. 앞서 말한 급속도의 분극화와는 반대의 길이다. 가까이 있으면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멀리 떨어져 있거나 처음 만나도 자연스레 합심한다. 그러고 보면, 엘리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그러니까, 대중 개개인에게 골고루 가 닿는 가치라는 개념도 이와 닿아있는 면이 있어 보인다.


펜데믹이 어쩌면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같은 생각을 하는, 비슷한 삶을 사는,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이들이, 고립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자신들이 모인 바운더리 이상을 생각하는 탄탄한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지금보다 더 필요한 때가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플랫폼의 효용과 규모가 팽창하고 있는 지금, '플랫폼으로 뭘할 수 있는지 보자.'거나, '일단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들게 하자.' 가 아니라, 작은 모임 고유의 문화과 색, 그리고 그 하나하나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도구로서의 온라인과 네트워크를 기대해본다. 지속적으로 팽창해야만 하는 빅데이터와 그를 위한 규모가 필요치 않을 정도만큼의 욕망, 입소문과 알음알음으로도 충분한 수요와 감당 가능한 공급.


그러니까, 적당한 속도와 스케일. 가까이서 서로 지켜보는 마음.

말하자면, 올드 스쿨 바이브랄까.



덧1.

'소셜 딜레마'를 보다 보면, 범상치 않은 외모로 눈길을 끄는 출연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재런 러니어.' 얼핏 히피 한량 할아버지처럼 보이지만, VR(가상현실)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역사적 인물이다. 인터넷 초창기에, 모든 정보를 모두가 공짜로 공유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이들 중 한 명이기도 한데, 다큐를 보고 나서 그의 생각을 더 알고 싶어 국내에 출판된 모든 책을 사 버렸... 몇 권 안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덧2.

비대면의 시대에 오프라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준 '스톤 로컬스'를 유튜브로 누구나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건 무슨 아이러니? 심지어 한글 자막도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브라보, 인터넷.


덧3.

나비는 지금 캐나다에 산다. 얼굴을 보지 못한지 십 년이 넘었다. 자취방에 같이 살 때 나비가 내게 사 준 화려한 패턴의 반팔 티셔츠를 아직 가지고 있는데, 그 땐 커서 맞지 않던 것이 지금은 딱 맞다. 그는 며칠 전 내가 인스타 게시물을 올린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댓글과 좋아요를 남겼다. 브라보, 소셜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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