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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13. 2021

오징어게임 봤냐가 인사인 지금,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다 좋기만 할 순 없지 않겠어요?

일단 주의! 스포가 두서없이 출몰할 예정. (아직 안 본 사람 있겠냐만)


그 중에 제일은 '오징어'


오징어.

우린 굳이 '오징어 게임'이라 하지 않고 그냥 '오징어'라고 했다.


골목길 애들 놀이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것이 이 게임이었는데, 우리 동네에선 특정 나이가 되기 전의 어린 애들은 아예 껴주지도 않았다. 애들 게임이라기엔 그만큼 위험하고 전투적인 놀이라 그랬는데, 흙바닥에 그어 놓은 그 동그라미, 세모, 네모 안에서는, 그야말로 형동생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상대편이기만 하면 잡아채건 밀어 넘어뜨리건 걸어 자빠뜨리건, 머리끄댕이를 잡거나 넘어진 녀석을 발로 까거나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지만 않으면 뭐든 상관 없는, 그야말로 나이불문의 평등한 아레나가 펼쳐졌다. 심지어 벨트의 금속 버클에 끼어 손가락이 삐거나 살갗이 찢어질 수 있으니 벨트는 풀고 하자는 로컬 룰도 있었다. 손목이나 목덜미, 정강이에 났던 멍과 상처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내가 그걸 하며 찢어 먹은 옷도 한 박스는 될 것이다.


그러니, 오징어 한 판 하자는 말이 나오면 누구랄 것 없이 전부 운동화 끈을 고쳐매고 결기를 다졌던 것이고, 한 동네 사는 애들끼리는 잘 하지도 않았다. 널찍한 공터가 필요하고, 그렇기에 동네의 홈 어드밴티지가 작용하는 골목길 어딘가가 아니라 중립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운동장에 엄선된 멤버가 모여 시작해야 하는 놀이. 우리는 그렇게 오징어로 다른 동네와 공인된 싸움을 했다.


하여, 내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기대한 건 그런 것이었는데, 마치 흉악한 사형수들을 선발해 철갑과 무기로 중무장된 자동차에 올라타게 하여 그 어떤 폭력도 허락되는 죽음의 경주를 벌이게 하는 '데스 레이스' 같은 영화 말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이정재라니, 그가 '빅매치'에서 풀지 못한 액션을 원 없이 풀었나보다는 생각이 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잔상까지 남아있는 판에, 뭔가 작정하고 펼쳐지겠다며 엄청난 착각을 한 건 그냥 내 잘못이라 하겠다.


아무튼 내게 있어 오징어 게임은, 아이들이 웃으며 상대방을 흙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나서 피가 좀 흘러도, 이건 그냥 놀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싸움이다. 코피를 대충 옷에 닦고 발목이 삐어 집으로 가서 찢어진 티셔츠를 몰래 세탁기에 던져 넣다 엄마에게 걸리면, 차라리 친구와 싸웠다고 하지 오징어를 하다 그 지경이 되었다고 말하진 않았던, 왠지 모르게 오징어를 제대로 즐기면 묘한 죄책감과 흥분감과 동시에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을 주는 무엇.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동네 꼬마가 드디어 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을 드러내도 되는 어엿한 폭력적인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불장난이나 문방구 도둑질 보다는 정정당당한 것 같고 비비탄 총싸움 보다는 야만적인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불량하고 위험한 놀이. 그리고 이 드라마는 얼핏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투명한 무브먼트


일부러 그 작동방식이나 구조가 훤히 보이게 만든 결과물이 더 좋은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시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무브먼트를 예로 들 수 있다. 한 쪽에는 합리적인 가격에 정확한 품질을 자랑하는 쿼츠 무브먼트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복잡하고 정교하기 그지 없는, 태엽을 사용하는 기계식 무브먼트가 있다. 기계식은 다시 수동과 자동으로 나뉜다. 때가 되면 직접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수동식이건, 손목에 차고 움직이는 힘으로 태엽이 감기는 자동식이건, 배터리를 사용하는 쿼츠 방식보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이 기계식 무브먼트는 자랑스레 그 구조를 내보이고 싶어 한다. 기계식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시계 중 시스루백을 적용한 시계를 뒤집어 보면 그 구조가 훤히 보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쿼츠보다 더 번거롭고 덜 정확한데 더 비싼 이 기계식 무브먼트 덕분에, 시계는 실용적인 물건 이상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실용과 미학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을 타는 이런 공예품이 아니라, 실용의 영역보다는 문화적 산물이라 여겨지는 콘텐츠들의 가치를 따지는 경우에는, 잘 감춰진 채로 어느샌가 관객이나 독자의 머리와 가슴에 슬며시 뭔가가 스며들게 만드는 비법을 최고로 친다. 그러니 간혹 콘텐츠에 대한 찬사로 '천의무봉' 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다.


선녀의 옷엔 바느질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 뜻처럼, 도대체 어떤 기교를 부린 것인지 티 안나게 자연스러운 솜씨. 컷 편집이나 촬영 기법 등의 기술적인 영역에서만 그 찬사가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네러티브의 자연스러움, 그 안에 내포된 메세지의 절묘함, 누구나 겪을만한 사건에 누구나 할 법한 자연스런 대사 안에 자리잡은 촌철살인과 위트와 아이러니 등등에 감탄할 때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창작자는 절대 자신의 무브먼트를 들키면 안 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처럼.


창작자의 생각과 이야기 안의 캐릭터의 말과 행동이 드러내는 생각은, 때로 일치하고 때로 반목한다. 이 둘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논박하며 주도권을 뺏고 뺏기고 유기적으로 엮여있을 때 우리는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 재미라는 것은,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거나, 그가 미처 상상해 보지 못한 지점을 끄집어내 타격하는 자극에서 온다. 콘텐츠의 파상공세가 계속되는 동안, 관객은 응원과 야유와 조마조마함과 통쾌함 사이에서 오간다. 이성과 감정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걸 감동이라고도 하고 여운이라고도 하고, 다 퉁 쳐서 그냥 '재미'라고도 한다.


그 반대는? 그러니까, 만들어진 세계와 등장인물의 말이 우회하지 않을 때, 길로 연결될 것 같던 문을 열었더니 막혀있거나, 막힌 벽이라 생각한 틀이 깨지면서 새로운 문이 열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곧장 직선으로 뻗어있는 그 길이 훤히 보이면? 당연히 재미가 없지.


"애들 게임 룰 단순해.", "이런 골목길 놀이는 대부분 남자 애들한테 유리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서울대 수석 '상우'의 말에는 허점이 있다. 애들 게임의 룰이 단순하다고 해서 하기 쉬운 건 아니다. 대부분 남자 애들에게 유리하다는 그 말은 '우월한 신체조건이 승패를 좌우하는 게임'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그리고 그런 게임은 주로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 벌어지고, 아이들 게임은 그런 곳 뿐만 아니라 온갖 곳에서 이뤄지는데, 소꿉놀이, 역할극, 공기놀이, 숨바꼭질, 끝말잇기, 하다 못해 땅에 발 안 닿고 담벼락과 주택 지붕 옥상만 따라 학교에서 출발해 가장 멀리 가기 따위의 별난 짓도, 살벌한 내기를 동반하는 끝내주는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상우의 저 말은, '단순한 룰이지만 이기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라거나, '흙바닥에서 힘으로 하는 게임이라면 남자 애들이 유리하다'고 바꿔 말했어야 신빙성 있는 말이 되는 거지만, 뭐, 그렇다하더라도, 그런 상우의 말에 허점이 있는 것은 괜찮다. 이야기 속에 정답을 아는 사람만이 등장해 정답만을 말하는 건 말이 안되니까. 이야기라는 것의 핵심은 사실은 그 반대다. 오답을 정답이라 확신하는 인물의 고군분투가 이야기의 전부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군분투를 통해서 인물은 변하고 성장하거나, 끝끝내 고집스레 내달리다가 후회와 깨달음 끝에 파멸한다.


그런 운명에 처한 이를 우리는 흔히 주인공이라 하는데, 상우가 주인공인가? 뭐, 이야기의 끝까지 자신의 답을 견지하는 인간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다. 탐정물의 경우가 흔히 그렇다. 뭐 그렇다고 이정재가 연기한 '기훈'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선비마냥 고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물의 고군분투와 내적 갈등 같은 게 아니라, 인물의 허점이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네러티브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등장인물을 고난으로 이끌 저 말들이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면, 그러니까 그 말이 반복해서 네러티브 안에서 긍정된다면, 그 허점있는 말이 허점을 무시하고 계속 실효를 거두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땐 저 말은 캐릭터의 말이 아니라 창작자의 말이 된다. 그러니까, 저것이 사실은 만든 사람 생각이란 게 드러난다. 그 말에 관객이 동의를 할 수 있는지 반대할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창작자의 메세지가 우리에게 스며드는 게 아니라 빛나는 간판처럼 대놓고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영 재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이 드라마의 경우엔, 정말로, 공기놀이나 고무줄 놀이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정치적 중립이나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등장인물이 오류를 말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인생 한 방이야.'가 모토인 주인공이 그걸 견지하기 위해 쌩고생하는 이야기를, 우린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재밌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그가 그 오류 있는 모토 때문에 겪을 고생을 기대한다. 그가 결국 모두의 뒤통수를 치고 행복하게 도피하는데 성공하면 우린 찝찝함을 느낄 것이다.


만약, 일확천금과 각자도생에 경도된,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기적인 소시오패스의 성공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느낄 씁쓸함이 그 이야기의 목적이라면, 찝찝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뒤틀린 현실을 사무치도록 지독하게 그려내는 집요함이 끝까지 유지되어야만 그 메세지가 유효할 것이다. 지금 내 말은, 자고로 모든 이야기는 교훈이 있어야 된다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우리가 선사시대 이래 줄곧 재미를 느낀 이야기들에서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확신에 찬 자신의 말에 반박하며, 다음 게임이 공기놀이나 고무줄이 될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하던 기훈에게, 상우는 소리쳐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지금 우리 목숨 걸고 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의 무게를 충분히 아는 듯, 상우는 결국 계속 살아남는다. 이로써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창작자의 생각이 우회하지 않고 곧장 드러나는 일이 벌어지고 마는데, 그(상우가 아니라 창작자)가 어떤 중요한 순간을 맞닥뜨리면 어떤 이와 팀을 짤지에 대한 사실이 그것이다. 이런 일은 드라마 내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그게, 공기놀이가 나올수도 있잖냐는 기훈의 말에도 공기놀이가 나오지 않고 상우의 말이 적중하는 이유고, 기훈은 착하지만 갑갑한 인간이 되는 이유다.


물론 상우는 주인공이 아니고, 비참하게(라고 쓰지만 사실은 스스로 쿨하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니, 기훈이 주인공이고 드라마가 기훈을 통해 전하는 말은 상우의 말과는 대척점에 있는데 무슨 개소리냐고 물을 사람들에게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은게 있다. 그래서 기훈이 저 게임 안에서 상우처럼 자신의 주장과 능력으로 돌파해낸 것이 있나? 최후의 순간까지, 기훈은 운 좋게도 살아남는다.


마지막 에피소드 제목은 심지어 '운수 좋은 날'인데, (창작자는 이것이 기훈의 모친의 죽음에 대한 복선을 은근히 암시할 것이라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뻔해서 오히려 제목이 뜬 순간부터 보는 사람의 김을 빼버렸고) 결과적으로 그 제목은 문자 그대로 기훈이 사실 단지 운이 좋아 우승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래서 기훈이 상우한테 욕을 먹을때 딱히 달리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도 착하지 않냐고? 그래, 그건 맞습니다, 맞고요. 근데, 우린 왜 이토록 자주, '착한데 무능한', 그래서 '짠한' 주인공과, 똑똑하고 확고한 신념의 악당을 보게 되는 걸까.


단지 내 생각일 뿐인 과대해석을 말해볼까? 그 똑똑하고 신념에 찬 악당이 악당인 건, 그의 신념이 사실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진데, 그런 악당에게 대항하는 주인공이 착하지만 무능한 까닭은, 무능해야 그 악당의 오류를 정확하게 논파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래야 이기기 힘들 게 될테고, 그럼에도 그 악당은 나쁘니까 결국에는 져야 되는데, 그래서 주인공은 악당과 달리 착하니까 이겨야 되는 것이다.


다른 무엇도 없이 착하니까 이기는 것이 말이 되려면, 그 착함이 악당의 지능과 완력을 누를 수 있는 화학작용을 일으켜야 하는데, 만약 이 드라마가 그 화학식을 만드는데 성공하기만 했어도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그 화학식은 어렵지 않다. 좌우 항에 착함에 공감한 조연들의 연대와 예기치 못한 도움을 추가하면 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마저도 스스로 망쳐버리는데, 우리가 흔히 궁극의 절대 공식이라 착각하는 걸 써버려서 그렇다. 그건 바로 '소름 돋는 반전'이라는 공식인데, 그래서 기훈은 착함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착하지만 무능함을 '짠하게' 여기는, '짠'하고 나타난 '알고 보니 절대자'에게 '구원'받는다.

 

이토록 복잡하고 이상하고 균형도 맞지 않는 대립과 승패가 설계되는 이유는, 아까 말했듯 악당의 말이 사실은 만든 이의 속마음이기 때문이고, 하지만 그건 그럼 안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결국 악당은 져야 하지만, 마음으론 일견 악당의 그 말(사실은 자기가 무심코 긍정하며 대놓고 써 버린 나름의 통찰과 본심)에 공감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무심코 드러낸 본심이 아니라면 네러티브의 말미에 악당에 대한 이해의 시간과 그 악당이 스스로 챙기는 예우의 순간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이 드라마의 주장하는 바, 바로 이것이 세상을 해석하는 객관적이고 서늘한 창작자의 시각이라고 말한다면 거기까진 수긍하겠으나, 마침내 궁극의 빌런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가 데우스엑스마키나처럼 '짠함'을 잃지 않은 주인공을 '구원'까지 하고 주인공에게 잠시나마 '이해'받는(사실 주인공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사연을 듣고 이해해줘야 되는 상황이란 게 맞지만) 지경에 이르는 걸 보고 있자면, '다소 악당 같은 생각을 하는 나를 짠하게 여겨줘. 너도 그렇잖아.' 가 이 가게의 간판인가 싶은 것이다.


달리 말해 이 드라마는 한번 씩 만든 이의 생각과 등장하는 인물의 생각이 혼재되어 균형을 이루는 게 아니라 어색함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것이 우리를, 현실을, 호도한다. 그렇게 엇나간 이 드라마의 주장 중에는, 비단 상우의 입을 통해 내뱉어지는 소위 비정한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듯 보이려 애쓰는 시각 말고도 더 큰 것이 있다.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 그리고 생에 대한 이기적이고도 악착같은 의지에 대한 분석이 그것이다. 이 드라마보다 그걸 잘 드러내는 것이 없지 않냐고 하겠지. 아니, 드러내겠다는 야심만은 잘 드러났다고 바꿔 말하겠다.



투명한 무브먼트가 결코 훤히 드러내지 못한 것


쏜살같이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 드라마는, 한 번씩 급정거하고 나서 급발진한다. 차근차근 빌드업하던 여자 캐릭터를 결정적인 순간에 폐기하는 방법과, 주체 못할 막대한 부를 지닌 이들의 인간성을 져 버린 유흥에 대해 묘사하는 상상력의 빈약함과,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소환되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하던 놀이와 사라진 동심에 대한 회한을 말할 때가 그렇다.


얼핏 아이들 놀이를 빙자하여 인간세계의 저열함과 잔인함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품은 이 드라마는 마치 그것을 이뤄내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와 반대다. 우리 어릴 적 골목에서 일어난 일만큼 편협하고 폭력적이고 두서 없는데, 그조차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실패하여 왜곡시켜 추억하고, 새로운 것 하나 없이 뒤틀린 노스텔지어를 요리도 못한 채 내 놓는다.


이 글 초반에 오징어 게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묘한 흥분감과 비밀스런 죄책감에 대해 뭔가 있어보이는 척 오바해서 말했지만, 사실 그걸 다시 말해보자면, 걍 동네 패싸움 구경 갔다가 덜덜 떨다 와놓고 이제 남자가 된 양 구는 거라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 드라마도 그렇다 하겠다.


그래서, 새벽이와 지윤이가 해질녘 골목길 세트에 사이 좋게 앉아 사연팔이를 하다가 결국 지윤이 대수롭지 않게 사실상의 자살을 하고,(이 장면은 그럼에도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데, 그건 켑사이신이 든 음식을 먹으면 눈물이 나는 것도 결국은 운 것이라는 논리에 반박할 수 없는 거랑 비슷하게 왠지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미녀가 덕수에게 복수를 하는게 아니라 갑분논개가 되고,(정성스런 고속촬영의 이 장면을 볼 때의 나의 무심함은 다행히 내가 이긴 기분이 들게 해준다. 응?) 상우마저 '우리 엄마'를 부르며 자살한다.


나는 이걸, 어떻게든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그보다 더 한 지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465명 각자의 무시무시한 생의 의지를 과소평가한 결과라고 보는데,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 각자의 목숨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면서도 끝끝내 이들을 재미삼아 파괴해버리는 이야기는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한다. 이들이 이런 운명을 맞게 된 것은 창작자가 그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지옥도를 위함인데, 그 지옥은 인간이 타인에게 선사하는 최악의 선물이자 우리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사실 좀 더 점액질의, 찝찝하게 들러붙은, 지저분하고 역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 도저히 핫하거나 팬시해질 수가 없었겠지.  



덕수를 끌어안고 동귀어진 하는 한미녀와, 새벽에게 생명을 갖다 바쳐주는 지영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리고 상우마저 깔끔하게 자살해준다. 인간의 징그럽도록 무시무시한 생의 의지를 무시하는 드라마. 그렇다고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하찮게 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줄거였으면, 이렇게 깔끔 떨면 안되는 거였다. (피가 많이 나오고 대량살상이 마구 일어난다고 그 무게를 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숱한 사망 장면은 오히려 가볍디 가볍게 반복된다.) 완전히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는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을 쉬며 살 길을 도모하는, 결국에는 이기적으로 삶을 욕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심의 무게는 도저히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걸까. 


이미 죽은(죽인) 애꿎은 시체는 온통 헤집어 온갖 장기를 다 파내는 장면을 찍을 순 있지만,(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처절하게 매달리는 인간을 직시할 수는 없으니, 죽을 땐 깔끔하기 그지 없다. 그렇게 손 쉽게 헤드샷으로 이마를 뚫어대지만, 똑같은 츄리닝을 입고 서로 찌르고 패서 죽이는 동안에는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으로 우리 눈을 가리고, 유리 징검다리를 건너다 떨어지는 사람들 중에, 피 칠갑을 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끝까지 매달려 바둥거리는 인간은 한 명 없는 걸 보면, 창작자 자신이 벌려놓고 무엇을 감히 할 수 없는지 명확해진다.


또 다른 예로, 그 대단하신 vip들의 관람석에 오브제처럼 놓인 표범무늬 바디페인팅 아가씨들이 있다. 그들을 발가벗겨 놓을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혹은 그러려고 했지만 그럼 욕 먹을 거 같았을까. 어차피 몸을 사렸어도, 이미 한 편으론 여혐이라고 욕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편에선 그렇게 욕하는 것들은 대가리가 깨진 거냐며 욕지거리를 하고 있다. 이걸 의도한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잠시라도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할만한 자신의 비전을 드러내 보였어야 한다. 혹은 지금의 이 이미지가 애초의 비전이라면, 그 빈약함이 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싸움에 미끼를 던져 준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만약 정말 어떤 이유로 수위 조절을 한 결과가 이것이라면, 그러니까 이런 콘텐츠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별 문제 시 될 것 같지 않은 뻔한 부분에서는 넘치게 자극적이면서, 관객들의 상상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충격이 필요한 곳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 패턴은, 앞서 말한 것처럼, 네러티브 안에 등장한 악과 비윤리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의 주제를 위해 명확하게 복무한다는 확신마저 없을 때 자신이 하는 말과 자신이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거리 유지가 되지 않은 전형적인 사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미술이, 세트가, 조명이 각자의 열심을 뽐내면 뽐낼수록, 그저 도드라지고 어색해진다.  


자신의 감정과 시선과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가면을 쓰고 억압적이고도 못된 짓을 자행하는 인물에게 느끼는 공포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가 녹색 츄리닝들 앞에서 총을 난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필요한 것이고, 그 익명성과 더불어 그들마저 누군가의 통제를 받고 있는 시스템의 공포는 차고 넘치게 보여졌다.


그러니, 세상이 너무 따분해서 21세기형 콜로세움을 세워놓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온몸이 떨릴만큼 증오와 역겨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려면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그들은, 세모네모동그라미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대장조차 한낱 서비스 업계 종사자로 부리는 V.I.P들 아닌가. 그러니, 부와 권태와 탐욕과 쾌락의 화신인 그들이 굳이 숨을 필요가 없다.


보석으로 수놓인 가면을 쓴 그의 뒤룩뒤룩한 육중한 육체를 경찰이 골방에서 홀로 마주보게 만들 것이 아니라, 발가벗고 당당히 얼굴도 대놓고 드러낸 그들이 우산과 망원경을 들고 통유리 징검다리 아래서 직관을 하게 만들었어야 한다. 그래야 표현되지 않을까? V.I.P들에게 있어 이 유흥은,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고, 니들이 우리 얼굴을 보든 말든, 니들의 최후에 짓는 공포와 원망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될 것이고, 니들의 곧 죽을 추락하는 육체를 피하는 것을 우리의 오락으로까지 삼기 위해 재미 삼아 이 모든 짓거리를 한 번 벌여봤다는 그 마음이?


나체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개돼지처럼 묶여 있는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표범무늬 여인들을 애매하게 전시해놓고, 술을 마시기엔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동물가면(이것의 상징성도 너무 올드하다.)을 씌운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미치도록 따분해서 정말로 미쳐버린 개객끼들을 정말로 악과 쾌락의 화신으로 조금이라도 더 그럴싸하게 만드는데 시간을 좀 더 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막말로, 내가 보고 들은 바 있는, 콜로세움은 고사하고 기껏해야 '한국관' 같은 룸이나 드나드는 하찮은 동네의 졸부들도, 돈자랑하며 드럽게 놀 땐, 자신들이 마치 인간 위의 인간인 듯, 놀랍도록 부끄러움을 모르고 놀랍도록 당당하게 역겹다. 취재를 하란 소리가 아니다. 상상으로라도 벽에 부딪힐 때까지 가보아야 할 지점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만만한 공도에서 엑셀을 밟아 경차를 추월하는 걸로는 경주에 나서지 못한다. 트랙에서는 누구나, 때가 되면 주저없이 풀악셀을 밟는데, 데스 레이스라며, 이게 뭐야.


하다못해, 극 중 그토록 중요한 키가 되는 인물, '일남'의 사용법에서도 아쉬움이 많다. 문제의 그 투표 장면. 9화짜리 드라마의 이야기 흐름을 한 번 다른 방향으로 꺾는 순간. 그 순간은 흥미로웠다. 그대로 계속 달릴 것 같던 게임을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간 이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챙기는 적절한 방식. 새로웠다. 그렇지만 더 새로웠으려면, 그 때 일남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한 표를 행사하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를 뛰어 넘어, 참가자들이 큰 격차로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런데도, 그들 중 대부분이 다시 돌아왔다는 걸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드라마의 후반부, 우리 모두를 탄식하게 만들었던 악랄한 게임, 구슬치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깍두기로 남은 한미녀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하나도 안 궁금한 방식으로 잠시 사라지게 하지 말고, 모두가 단짝을 찾아 마주 서 있는 그 순간에, 한미녀는 생존을 확정했고, 니들은 서로 죽여야 된다는 룰을 대놓고 설명해주는 것이 더 악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때, 마음이 약해진 상우마저 투표를 하자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는데, 한미녀는 자신은 생존이 확정되었기에 계속하자는 데 표를 던지고, 마지막 한 표로 모든 것이 결정될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에, 일남이 '찬성' 표를 던지면서 기훈을 보며 씨익 웃었다면 어땠을까?


기훈이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일남을 앞에 두고 일관성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사기를 치게 되는 지금의 전개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독을 품고 일남을 처리하고자 마음 먹게 되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맘 착한 기훈이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뜬금없지만 '일남'이 기훈이 마지막까지 생존할 수 있도록 자신의 구슬을 줘서 도와주는 것을 지금보다는 더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그냥 이건 내 생각일 뿐, 뭐가 더 좋은 플롯이었을 거라고까진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나로서는, 어떤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자극적이고 단순한,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리 하지 못했던 용감한 선택으로 보이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음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놓고, (애들이 하는 게임을 시키고 지면 죽이는 거야!) 정작 극중 인물들의 악행으로 자기가 욕 먹을까봐 한 발 빼는 맥빠지는 망설임이 느껴져 못내 아쉽다. 이 드라마가 전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게 만들어 준 제작사 넷플릭스에는, 매우 중요한 회사 내 모토가 있다. "절반의 솔직함은 냉소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를 본 내가 냉소하게 된다.


이쯤 말하고 마무리하고 싶은데, 일 년 뒤 만난 일남과 기훈의 대화씬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하고 싶은 걸 죄다 나열 해놓고 알아서 발견해서 의미를 찾아 좋아해달란 태도.


정체를 드러낸 일남이 말한다. '내기에서 이기면 그 모든 것에 답해주겠네.' 그리고 마지막 내기를 건다. 자정이 되면 모든 것이 끝이 날 것이다. 그런데 기훈은 궁금한 걸 계속 물어본다. 근데 그걸 또 다 대답해주고 있는 일남. 그리고 결국 기훈이 내기에 이긴다. 세상은 따뜻하단다, 노인네야. 그런데 노인은 결국 그 순간을 보지 못한다. '당신이 졌어,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당신이 이긴 줄 알았겠지?' 라고 말하기 위해 노인은 자정이 지나자 마자 급사해야 한다. 마치 일부러 결과를 안 보고 죽으려고 마음 먹은 것처럼.


마지막으로 정체를 밝혀야 되고, 마지막까지 내기를 걸어야 되고, 그 내기는 인간성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그 내기에 기훈은 이겨야 하고, 그렇지만  일남은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죽어야 하고, 그렇지만 기훈은 일남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러니 저런 내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어려운 걸 저렇게 해냈으니 된 것 아니냐고? 그 어려운 거라서 제대로 해내야 된다. 다들 그렇게까지 해야되면 누가 시나리오를 쓴다고 덤비겠냐고? 우리가 보고 나서 특별히 별로이거나 말이 안되는 부분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정도의 이야기는, 모두 저 어려운 걸 눈에 안 띄지만 스무스하게 해결하기 위해 머리 깨지는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결과다. 앞서 말했다시피, 티 안나는 무브먼트. 원래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저 장면을 저렇게는 나도 쓴다. 물론 그렇게 써 가면 '니가 하고 싶은게 뭔지 알겠으니 시작으론 나쁘지 않다. 자 이제 고쳐보자.' 라는 말을 듣겠지. (이 말은 괜히 썼다 싶은데, 이미 써버린 거, 그냥 두겠다. 뭐, 우리가 알게 되었다시피 다들 종종 그러는 것 같으니.)



접두사 K의 절묘한 명과 암


내가 앞서 우리 동네 오징어 게임 참가자격이 되는 나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여자 아이들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하고 싶어하는 애들도 드물었지만, 무엇보다 '니들은 다쳐.'라는 논리로 무장한, 동네 놀이터의 아이들에게조차 이미 공고해진 케케묵은 고정관념이 크게 한 몫하는데, 맘 약하고 허약한 니들 여자아이들은 사이 좋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할 수 있는 공기놀이를 하거나 노래솜씨와 유연성을 뽐낼 고무줄을 하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남자애들에게 고무줄은 또 다른 지들만의 놀이가 되는데, 고무줄을 하는 여자애들 무리에 난입하여 고무줄을 끊고 도망하는 게 그것이다. 놀이터 아이들의 동심 운운하는 건 미취학아동들의, 그나마 서로 사이좋은 아이들의, 협동심과 창의성에 기반한 놀이에나 어울리는 소리. 그런데 이 드라마는 애타게 되찾고자 한다. 어릴 때의 순진무구함을.


오히려, 이 드라마가, 애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존재하던 케케묵은 뭔가 구린 면모를 그대로 확대재생산해내는 것이 목표였다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짐짓 그보다 나은 통찰을 한다고 스스로 믿는 것 같다는 인상이 내 맘엔 걸리는데, 더 내 맘에 걸리는 것은 그게 어쩌면 접두사 K로 수사되는 컨텐츠들의 영향력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거다.


챌린지나 밈에 적합한 요소가 많으면 재빨리 글로벌하게 핫해질 수 있는 세상이다. 불과 몇 달 전에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던 D.P는 이제 자취를 감췄다. 모두가 오징어 게임 이야기 뿐이다. 그래, 뭐 유행이란 그런 거니까. 그런데 궁금한 게, 언제부터 콘텐츠가 걍 유행이었던 거야?


유행도 재미가 있으니 가능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소위 K 콘텐츠들에 대한 열광적 반응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 눈에 봐도 눈에 띄는 'K 고유의 것'에 대한 관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숨은 의미 분석' 콘텐츠 파생 현상이다.


이는 모두 친 'K'성향의 최초 소비자들에 의해 호들갑스럽게 널리 퍼트려질만한 것들이다. bts가 되었든 한복이 되었든 비빔밥이 되었든 하다못해 킹덤의 '갓'이 되었든, 아무튼간에 요새 핫한 'K-무엇' 에 호감을 느끼게 된 글로벌한 팬들은 이걸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디테일 하나하나를 짚어 설명해주면서 지금 자신이 접한 이 콘텐츠를 영업한다. 우리도 어릴 적에 그렇게 오타쿠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K매니아들은 그 때의 오타쿠들과 다르다. 이 콘텐츠는, 소수의 매니아들이 실컷 디깅하고 썰 풀며 영업하던 구세대 오타쿠들의 전유물들과는 달리, 글로벌하게 널리 퍼트려지면서도 오타쿠스러운 마이너리티와 시의적절함을 동시에 지녔기에, 이것을 먼저 접하고 난 뒤 후발주자가 될 대중들에게 인기의 파도에 함께 올라타길 강요하는 선도자가 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중요한 일에 앞장서는 느낌을 준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극적인데 개똥철학이 묻어 있어 대단해보이니 이것에 열광하는 건 힙한 것이기도 하고 인텔리하기도 한 거라고 스스로 말하기 좋단 소리. 그 결과가 무엇? '00에 담긴 숨은 의도 분석'영상들이다. 진짜 그것들이 숨겨진 의도라고?


465라는 숫자의 비밀. '기훈이 경마에서 딴 돈이 465만원이었는데, 기훈이 번호도 465번이고, 총 상금도 465억이라니, 이걸 다 의도한 거면 대단해.' 라는 반응 같은 것들. 그럼, 경마에서 딴 돈이 823만원이라고 하면 덜 대단한 이야기가 되나?  또 다른 예로, 줄다리기가 끝나고 다들 숨을 몰아쉬는 컷에서, 일남의 손목에만 수갑 자물쇠가 없더라며 소름돋는 디테일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던데, 이 같은 이야길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이스터에그 싫어하는 걸 본 적 없는 이유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소수의 팬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야 눈에 보이도록 해 둔 그 숨겨진 디테일이, 바로 그러한 팬들을 위한 또 하나의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건 모르고 지나가면 그만이고 알게 되면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눈에 뻔히 보이는 건 걍 대충 뭉게고 넘어가는 이야기에서, 한번 더 들쳐보면 뭔가가 보이는 부분을 가지고 뭔가 발견한 냥 감탄해주면, 그건 단지 숨은 의미 분석 페티쉬를 자극하는 리뷰 놀이를 위한 게임이 될 뿐인데, 아 그러고 보니 이건 그냥 그런 게임이었지? '애들 놀이 단순해. 로 시작해서 거기에 우리 인간의 욕망의 정수가 다 담겨있어.'라는 철학으로 끝나는.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이란 별명을 얻게 된 대표적인 예로 자주 찬사를 받는 두 장면이 있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에게 끌려 간 아이들이 물을 퍼먹은 것이 해골이었단 걸 알아차리게 되는 장소가 왜 하필 '원효'대교였겠냐는 분석과 '마더'에 등장한 달력이 불 타는 장면에서 특정 날짜가 보이는 것의 의미에 대한 찬사가 그것인데, 소위 '소름돋는 비밀'로 칭해지는 그 장면에 대해 정작 감독은 '내가 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다 맞추고 그 순간에 그걸 겹쳐놓겠냐.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 이라 답한다.


숨겨진 디테일 찾아내기에 열광하는 동안, 대놓고 그냥 넘어가는 허술함을 지적하는 것은 '힙하지 못한' 불편러의 투덜거림이 된다. (굳이 롱샷으로, 칠흑같은 밤에 항구로 가는 봉고차를 바싹 뒤쫓는 형사의 승용차를 보여준 그 장면은 CG거나 그게 아니면 최소한 후반에서 색보정에 무척 공들인 장면일텐데, 봉고차를 모는 오징어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뒤에서 비치는 그 확연한 헤드라이트가 안 보이는거야? 이 따위 질문을 안 하면서 보고 싶다, 나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의 룰도 다 잘라먹어 전파시킬 판에 뭘 바라겠냐만. (그러나 열광적인 팬들은 새로운 뉴비 팬들에게 그 놀이의 원래의 정확한 룰을 전파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의 파급효과에 대해 실감하며 또 다시 감동할 것인데, 사실 감동받아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만든 이들이어야 한다.)


혹은, 오징어 게임이란 신박한 놀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각 잡고 보여주려면 칼 든 아저씨 두 명이 아니라 노인과 여자아이들을 죄다 포함 한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손에 단도를 쥐고 오징어 게임을 제대로 하는 걸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그리고 이 두 가지 놀이를 당일치기로 진행해서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그것만으로 가득 채웠어도 K문화 전파와 자극적이고 재밌는 이야기 두 마리 토끼 사냥에 무난히 성공했을 것이다.


고른 게임조차 그 정수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이 드라마가 굳이 밀어붙이는 게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하나. 굳이 파키스탄 노동자 캐릭터에게 서울대 나온 캐릭터가 '니들은 이런 게임 안해? 너 이거 룰 모르지?' 내가 알려줄게.'라고 말하게 하는 저 선명한 얄팍함.


하지만, 나의 이 말은 모두 헛되고 헛된 것이니, 오징어 게임의 주연들이 출연한 '지미 펠런의 투나잇쇼'의 조회수만 봐도, 동그라미세모네모 열풍은 바야흐로 전지구적인 대세이며, 이를 한국말 '대박'으로 표현해도 전 지구의 절반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것인데, 이 드라마의 리뷰를 자랑스런 한글로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배 부른 소릴.


우리가 1위 콘텐츠를 서둘러 정주행 하고 거기 나온 장면을 따라하는 틱톡영상을 찍어올리고, 분석 영상을 보고서야 '오~그런 뜻이. 대박!'이라고 서둘러 외치는 것으로 나의 의무를 다해야되는 수준이 된 건, 이 모든 게 하나의 패키지로 묶인 '지금 당장 가장 힙한 선풍적인 유행'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요즘 콘텐츠가 꿀 수 있는 최상의 꿈이라서 그렇다. 이건 누구를 탓해야하나.


예전엔 '왜 이런 걸 보고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거야.' 라는 화가 함께 치밀어 올랐었는데, 전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거나 찬사를 받으면 더더욱 그랬었다. 그런데, '애들 게임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이 이야기를 보고 나니 그 분노는 잘못이었단 걸 깨닫는다. 악의적으로 속이고 호도하는 것은, 그걸 보고 열광하는 이들이 아니다. 학교 앞 불량식품을 파는 문방구 앞에 줄 서 있는 학생들을 욕할 게 아니라 그걸 파는 이를 욕해야 하는 것이다. 애들이 게임에 목숨을 거는 게, 애들 잘못은 아니잖아.


난 K예능의 대표 '무한도전'이 한 번씩 보여준, 놀랍도록 감동적이던 김태호 피디의 빅픽쳐의 순간을 사랑한다. 하지만, 걍 배꼽 빠지는 '런닝맨'도 좋다. 예능이 뭘까 싶을 땐 나영석 피디가 불러 온 셀럽들이 서로 밥해먹이는 온갖 힐링 프로그램들을 그저 보게 된다. 무한도전이 다루는 시대정신보다, 런닝맨의 쫄깃함보다, 삼시세끼의 아침 시골 풍경 인서트 컷에 올라 간 자막의 따뜻함보다 더 나은 뭔가를 바라는 건 무리일까. 무한도전, 런닝맨, 삼시세끼를 예능이라고 무시하는 거냐고? 아니면, 그들은 예능계의 탑 오브 탑인데 그걸 바라냐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과대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그 정도를 바란다. 전 세계 90개국에서 1위를 한, 당당한 K를, (사실은 자기 어린 시절 그립고 우리 땐 이러고 놀았는데 세상 무서운 걸 알고나니 나도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세계인에게 이해받고 싶은 것이 그 본질인 '노스텔지어 K 중년'스러움을) 내세운 드라마에 그 정도 바라는 게 욕심은 아니지 않나?



덧1.

이름으로 친 장난을 보니 드립을 치고 싶은데, 그냥 농담이니 웃어 넘겨주시길.


일남의 이름은, 그가 1번이라 일남이었는데 알고보니 석유재벌 만수르 뺨치게 돈이 썩어나는 양반이라 오일남인가.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만수르보다 재산이 14배쯤 더 많은 사우디 국부펀드(자산이 520조라더라.)가 이번에 리버풀 fc를 샀다는데, 걔들 데리고 오징어 한 판?   


한미녀의 이름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직판단이  서는데, 이왕 그랬으면 ' 이름은 한미녀가 아니라 사실 논개야.'라고 농담을 던지고 덕수가 그걸  알아듣고, 기훈이나 새벽이  뜻을 알아채고 '안돼.'라고 안타까워 하는 순간이라도 만들어 줬으면 어땠을까.  미녀는 끝까지 누구에게도 마음을 의탁하지 못하고, 결국은 덕수랑 함께 퇴장해야만 되었을까. 미녀가 아닌  같은 애가 자기가 미녀라고 자꾸 우기니까 애들이 따돌린 거라고 말하는 듯하단 느낌이 드는 , 작중 의도가 그런  아니라 그냥 내가 오바하는 거겠지? 그런 거면 좋겠다.


덧2.

근 십 여년 사이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효험에 대한 간증이 이어지는  용한 시나리오 작법서가 하나 있다. 블레이크 스나이더 경이 쓴 '세이브 더 캣'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를 구하라.'는 말은, 시나리오의 초반부에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호감을 얻는 방법의 한 예로 든 문장인데, 책에 나오는 그 내용을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좀처럼 마음 주기 힘든 놈이지만, 의외로 썩 괜찮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란 걸 알려줘서 관객들이 그 놈을 좋아하게 만들란 말야. 예를 들면, 위험에 처한 길고양이를 구해주는 장면 같은 걸 쓰면 효과적이지 않겠어?'


그리고, 기훈이 어렵게 손에 넣은 만 원으로, 상우네 엄마의 가게에서 고등어를 사서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등장한 길고양이에게 고등어를 주는 것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가 책을 잘 사긴 했다 싶었던가.


덧3.

오징어 게임에 대한 투표가 있다면 아마 가장 심플하게 X를 누른 듯한 셀럽에 관한 최신 뉴스. 나 얘랑 깐부할래.



덧4.

이 말을 안 하고 넘어가긴 도저히 불가능하여, 다 쓴 글을 다시 수정해서 굳이 몇 자 더 남겨야겠다.


배우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훌륭하다.


배우들의 sns 팔로워 수가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은 처음이다. '잘생김' 묻은 그 분 마저 인스타 계정을 파서 셀카를 올리고 있는데, '간절함이 1도 없어 보이는 셀카'라는 평과 '비극적인 얼굴 낭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 찍어도 묻은 그 (잘생)김은 절대 안 떨어지니 다들 얼른 팔로우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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