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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pt Oct 15. 2021

네 눈에 훌륭한 건 대체 어떤 건데?

피날레는 GOAT로. 더 와이어 VS 브레이킹 배드, 베터 콜 사울

취향의 문제가 되려면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고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싫은 건 뭔가 꺼림찍하거나 문제의 소지가 있어서이고, 좋은 건 그냥 취향이 맞아떨어져서라는 것일텐데, 난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야구와 골프 중에 취향을 따질 순 있겠지만, 기절놀이와 클라이밍을 두고서는 그럴 수 없듯이, 취향을 따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싫어할 대상이 아니라 지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취향은 옳고 그름이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른 것을 굳이 선택지에 올려두는 것이 좋은 취향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면 어쩔텐가.


그런 의미에서, '그건 내 취향이 아니다.' 라거나 '이건 내 취향이다.' 라고 말하게 되는 대상은, 적어도 그르지 않고 제대로 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호불호는 함량미달과 양품을 가르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어떤 콘텐츠가 '취향의 문제'가 되려면, 일단 그럴듯하고 말이 되고 고유의 장점이 눈에 띄고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하고, 그렇기에 객관적인 흠집이나 품질이 아니라 단지 선호도로 승패가 나뉘는 레벨에 도달한 것이어야 할테니, 무언가를 보고 나서 내가 언제나 바라마지 않는 것이 단 하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단지 내 취향에 의거해서 말을 얹을 수 있는 순간.


게임업계에서는, 수많은 게임 매체에서 각자 1년에 한 번씩 그 해의 게임를 선정하는데, 줄임말로 GOTY (game of the year)라고 한다. 팬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던 게임들은 출시와 동시에 몇 개의 GOTY를 차지했는지 서로 경쟁하곤 한다. 아마도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란, 하나같이 한 해의 GOTY를 독식한 쟁쟁한 게임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게임에 대해 열변을 토하거나, 자신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의 말에 열광적으로 호응하거나, 또 다른 이의 다른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몰랐던 그 게임을 새로 알게 되어 기꺼이 함께 게임을 플레이해보며 즐기는 순간이 아닐까?


그러니, 여기에 다소 아쉽고 문제가 있고 개선이 필요한, 찾아보고 조명해주면 그제서야 좋은 구석이 눈에 띄는 게임이 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GOAT(Greatest of all time). '명실공히'와 '역대 최고'의 필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언제부턴가, 죄다 GOTY의 반열에 올랐기에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콘텐츠들을 줄 세워놓고, 그 중 무엇을 골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 쟁쟁한 리스트들 중에서, '이건 내 취향인데.' 라고 말하며 하나를 집어낼 수 있는 재미를 만끽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단 생각이 들어서다. 아, 물론 게임을 말하는 건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말이다. "죄다 좋은 것 중에 난 이게 더 좋아."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하며 시간을 떼우고 싶은데,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이유이며, 굳이 "너 그거 봤냐?"고 묻는 이유 아니냔 말이다.


기생충이 사상 최초로 유럽과 미국을 동시에 휩쓸고, 전세계인이 깐부를 맺은 시대, 심지어 넷플릭스에서 마틴 스콜세지와 알폰소 쿠아론과 코엔 형제의 오리지널 콘텐츠도 제작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우는 소리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주장에 절반만큼 동조하고 나머지 절반을 직각으로 구부려 한 마디 해보자면 이렇다. 그러니까 우린 언제까지 스콜세지와 코엔과 알폰소 쿠아론의 차기작만 목 빠져라 기다려야 하는 걸까? 혹은, 디즈니의 새로운 유니버스가 끝도 없이 펼쳐질 예정이니 디즈니 플러스도 구독하면 만사오케이인걸까?

기묘한 이야기나 킹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브리저튼, 종이의 집, 워킹데드, 하우스 오브 카드, 나르코스... 이토록 수많은 시즌제 드라마들은 어쩌고 그런 소리냐고? 그러게. 볼 것들 천지인데 말이다. 내 귀에까지 도달한 떠들썩한 소문이나 알고리즘의 추천을 통해 접하게 되는 최신 화제작을 다 보는 속도보다, 또 다른 시즌 하나가 제작되어 세상을 또 다시 떠들썩하게 하는 속도가 더 빠른 요즘이다. 배 부른 소리일지 모른다. 내가 추천 콘텐츠 정주행이나 나만의 걸작 발굴에 소홀히 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게을러서 그 희열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런 기분이 든다.



"너무 많아. 너무 지쳐. 다들 좋다는데도 나는 취향에 기대 호불호를 표명하기 전에 못마땅함에 멈춰버리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알고리즘은 나의 지나 온 궤적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실력 있는 놈이긴 분명하지만, 그래서 내가 단지 클릭하고 재생하고 별 몇 개 중에 몇 개를 색칠했거나 따봉을 날렸거나 노코멘트한 것을 두고 나의 '취향'을 안다고 착각해서 나의 마음과 일치할 확률을 퍼센트까지 표시해가며 나를 가르치려 들지만, 그 놈이 결코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건 나의 '취향' 이전에 본선에도 올리지 않은 수많은 탈락자들에 대한 내 기준이야. 나의 행보는 잘 분석하지만, 내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을 발견해서 선제적으로 선포하는 비평의 영역에서는, 알고리즘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



그나마 즉각적으로 생산되는 비평마저, 한 줄이나 별 색칠하기, 혹은 140자로, 어떨 땐 캡쳐와 합성의 짤로, 신속하게, 실시간으로 재빨리 널리 퍼진다. 그것으로 그 활자와 이미지의 소임은 끝이 난다. 결론 내지 않고 물음표로 끝을 내는 기나긴 글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글들은 빠르게 널리 퍼지는 외침으로써의 야심을 버린지 오래다. 공신력이나 레거시 미디어의 진중함, 정보의 경중은 무의미하다. 얼핏 보면 단지 한 우물을 오래 파 왔다는 것만으로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전문가들이라 불리지만 지금은 유튜브 편집을 스스로 하지 못해 맹렬하게 도태되고 있는 감 떨어진 꼰대들의, 케케묵고 낡은, 그래서 컨템포러리한 히어 앤 나우의 감각적인 트랜드와는 멀어 보이는 인문학적인 콘텍스트 분석은, 그저 관성에 따른 자기복제로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이제 그냥 다들 그 이야길 하면 나도 그 이야길 하려고 그걸 보면 되는 건가. 아니면, 그런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 그건 좋은 거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딱히 나쁠 건 없고 몇 몇 부분은 좋으니 그래서 그건 좋다고 하면 되는 건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며, 그냥 난 이 장면 좋더라고, 짤 만들기 좋거나 연성하기 좋다고 열광하면 되는 것을 뭘 또 진지하게 따지고 재고 있냐고 할 건가. 파편이 전부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제 전체나 맥락이나 흐름이나 예측이나 돌아봄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문제 없는, 단지 순간의 연속으로만 존재하게 된 건가. 각각의 섬과 점과 파편으로 존재하다 때때로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접속 상태 유지가 핵심인 신세계에 익숙해진 건가. 어차피 비슷비슷한 생각과 모습을 지닌 맞팔의 성 안에서 뭐든 부족함 없으니, 알고리즘이 내게서 끊어지지 않는 한 뭐가 문제이겠는가. 그런가? 정말 그런가?


그래서, 오히려 정보와 콘텐츠의 대홍수 시대인 지금에야 말로, 그 의미를 한껏 추켜세워주어 그 어떤 취향을 가진 그 누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역대 최고의 00'라는 왕관이 더더욱 필요하게 된다.

 

역사적 의미로도, 미학적 완성도로도, 메세지의 시의적절함과 날카로움으로도, 기술적 성취로도, 혹은 그 중 어느 한 쪽만 보아도 그 하나의 무게가 너무나 압도적이라는 평가만으로 모두를 수긍하게 만드는, 적어도 마음 속으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는 있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평가의 증거로써의 왕관.


Greatest of all time. GOAT.  명실공히, 역대최고. 이것은 올해의 게임 중 최고의 인기와 완성도를 구가하는 게임에 수여되는 GOTY와는 무게가 다르다. 일생에 걸쳐 쌓은 스텟과 경력과 우승컵의 숫자로 단순 비교되어 승패를 가르게 되는 자리도 아니다. 이 왕관의 향방은, 그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통해 세상에 끼친 영향력과, 앞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영향력이 미미해질지라도 결코 빛 바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는 상징성이 좌우한다.   


농구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조던보다 르브론 제임스의 통산 득점이 더 많으니 르브론 제임스가 NBA 역사 상의 GOAT가 아니듯. 그 누구도, 그래미 어워드 최다 수상자 퀸시 존스나 그 뒤를 바짝 뒤쫓는 비욘세나 그래미 올해의 앨범 최다 수상자인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팝의 황제라고 말하지 않듯이. (팝의 황제는 그래서 누구? 마이클 조던과 이니셜이 같다. 설마 모르진 않겠지만.) 얼마 전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한 호날두가 펠레나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아직은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듯이. (호날두 팬들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다. 메시 팬들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 당연하고. 즐라탄은 그냥 자기가 뭐든 짱이라고 이미 자서전에 적어두었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 자신조차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메시가 어쩌면 역대 최고일거라고, 또는 월드컵 우승컵이 없다면 그 메시조차 최고가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치면 마라도나가 최고라고, 또 누군가는 챔피언스 리그라는 전쟁터에서의 활약이 훨씬 더 대단한 거라며 호날두의 손을 들어주겠다고, 한도 끝도 없는 주장들이 난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프리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차는 카를로스나, 미치도록 잘 생겼는데 그 미모보다 더한 택배 크로스 능력을 지닌 베컴조차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그래서, 거창하게 GOAT까지 들먹이는 이유가 뭐냐고? 이 왕관 수여식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소위 우리의 잡다한 짧은 단문의 지저귐을 죄다 발라내 버리고, 우선 '적어도 어떤 면으로든 유의미해야함'이라는 본선 경쟁의 최소한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 그러니, 이 글 첫머리에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보자. 싫은 것에 이유가 있고 좋은 것에 이유가 없는 수준 말고, 누가 어디에 손을 들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에 단지 내 취향을 끼얹는 재미 말이다. 그게 무슨 낙이냐고? 이런 장면을 생각해보자. 베컴도 카를로스도, 심지어 즐라탄도, 자신이 감히 낄 자리가 없어져 버린 그 왕좌에 과연 누구를 앉힐지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게 된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같이 모여서 떠드는 낙이 바로 이게 아니라 뭐냔 말이다.



Finalists


"이거 안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엉엉."이란 말이 나오는 게 예선이라면, "야, 이거 내가 DVD 빌려줄게, 지금 집에 가서 봐. 보고 나서 전화해." 정도가 본선일 것이다. 예선 후보가 천 명이라면 본선 후보가 백 명이라 치자.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최종 결선에 오르려면, "그거 안 본 니 눈과 뇌를 사고 싶다." 정도가 되어야 할 텐데, 이 쯤되면 매우 개인적인 사소한 선호도가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장르의 그들만의 전쟁이 진행 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의 개인적인 선호도에 의해, 불세출의 명작에 충분히 오를 것이 당연하지만 배제되는 장르도 명확하고, 어드밴티지를 얻는 장르도 명확하다. 그 중, 한 때 나의 모든 호기심과 관심과 조사와 취재의 대상이 된 영역이 있으니, 공감능력 떨어지는 소시오패스들의 자기합리화와 모순을 박살내고 까발리려는 일념으로 악의 이유와 양상을 자기 능력으로 합리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하는 욕망에 경도되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있어보이는 척 말해보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니체의 말이 좀 폼 나게 느껴져서 였을까. 사실, 폼이 난다기 보다는, 그 개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였을 것이다. 공포와 매혹은 같은 결이라는 것도 이런 말일 것이다.

 

그래서, 한 때 우리나라에 프로파일링이 도입된 초창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은퇴한 1세대 프로파일러와 TV에도 자주 등장하는 저명한 학자,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프로파일러, 프로파일러와 함께 파견을 나가 해외에서 일어난 강력 사건을 해결한 형사, 형사정책연구원 관계자 등을 직접 만났다. 포럼이나 세미나에 참여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각종 자료들도 열람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고, 절판된 서적들도 탐욕적으로 사서 읽었다. 악몽을 자주 꾸고, 자다가도 일어나 문단속을 다시 확인하고, 피해자나 가해자, 사건 파일을 반복해서 떠올리면서 고통스러워 하고, 취조 과정 중의 대화 녹취록을 다시 곱씹고, 자신이 프로파일링하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면 안된다고 조언하던 프로파일러의 말을 다시 떠올리면서도 또 다시 몰두하게 되고, 계속 몰두하다보니 생각보다 아팠다.


실제로 몸이 아파 왔다. 결국 그런 이야기를 반드시 제대로 쓰겠다며 해 오던 모든 시도를 멈췄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을 쓰지 않아도, 그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들은 차고 넘쳤으니, 쓰지 않기로 마음 먹고 나서는, 보는 이로서는 행복한 일이다. 물론, 만듦새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없이 취향으로 줄 세우기만 하면 될 GOTY들에 한해서.


그 결과, 그 영역 안에서도 구분되는 내 취향을 알게 되었는데, 보편적 사회질서와 윤리의식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자신만의 기준을 고집하는 인물, 혹은 애써 아닌 척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직시하기 힘든 어두운 진심을 눌러놓고 있는 인물이, 엉망진창인 자기 삶에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떤 사건에 몰두한 끝에, 소 뒷 걸음으로 쥐 잡듯 어찌어찌 어렵사리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


그러면서 도무지 이해가지 않아 두려움을 느끼게 하던 범죄자의 얼핏 깊어 보이는 어두움과 불가해함과 교묘한 자기합리화를, 주인공이 단순하고 상식적이고 강렬한 이성과 감정으로 논파하고 몰아붙이는 승리의 순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해 그보다 더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경험을 한 뒤 허탈해 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살아남아 또 다시 그 곳으로 걸어 들어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길 바라게 되는 인물의 뒷모습이 잔상으로 남는 일련의 장르물들이 그것이다.


시즌제 드라마로만 한정해보자. 길게 말해 무엇하랴. '트루 디텍티브'가 그러하고, '브로드 쳐치'가, '킬링'이, '맨헌트 유나바머'가, '미스터 메르세데즈'가, 그리고 '마인드 헌터'가 그렇다. 하나같이 엄청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당장 집에 가서 보고 전화해." 부문의 후보들이다. 우린 "그걸 안 본 니 눈과 뇌를 사고 싶다." 부문의 후보를 말해야 한다.



그럼 이제 여러분도 알만한 뻔한 그 제목을 말해야 한다. '브레이킹 배드', 그리고 '베터 콜 사울'

'베터 콜 사울'은 그렇다 치고, OTT 구독자들 중에 '브레이킹 배드'라는 제목을 안 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 


첫 시즌이 세상에 나온지 13년이 넘은 (시즌1이 2008년.) '브레이킹 배드'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아직 안 본 이들을 위해 딱 한 줄로만 말해보자면, 평범한 고등학교 화학교사가 불세출의 마약왕이 되는 점입가경의 난장판이 숨 쉴 새 없이 펼쳐진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시즌1의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는데, 브레이킹 배드를 다 보고 나면, 한동안은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출연한 그 어떤 영화를 보아도 심장이 쫄깃해지며 조마조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실존인물인 헐리우드 작가(심지어 그 유명하고 아름다운 영화 '로마의 휴일'을 쓴 작가) 역할로 나온 영화 '트럼보'를 보면서도, 그가 언성을 높이는 순간에는 상대방이 곧 살해당하지 않을지 걱정했었다. 배우의 커리어에 있어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팬에게는 그에 대한 그보다 더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브레이킹 배드는 그런 드라마다.


실컷 시간을 끌며 한껏 빙빙 돌고 돌더니 결국 '브레이킹 배드'냐고 빡칠 여러분을 위해 얼른 다음 후보를 내세운다. 생소한 제목일지 모른다. '더 와이어'

(참고로, 왓챠에 전 시즌이 다 있다. 그 제작진의 또 다른 시리즈 '더 듀스'도 있다. 거기엔 더 와이어보다 더 유명한 배우들이 몇 명 더 나오지만, 일단 더 와이어를 보고 자신의 취향을 맞춰보시길. 더 듀스는 '더 와이어 스러움'이 한층 더 해진 더 매니악한 드라마다.)



The Crown goes to...


의미 있는 이야기의 경우, 그 이야기는 시나브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하는데, 이 성공의 관건은 어느 때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촛점을 맞추려는 시도 위에 메세지를 담아내는 것에 달려있다.


좋은 이야기의 경우, 서로의 공통점을 찾고 상식을 되새기게 하는 의미있는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던 인물마저 마침내 이해시키는데 성공하며, 이 과정을 통해 보편적 인간일지라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를 반드시 드러낸다.


훌륭한 이야기의 경우, 각각 하나의 우주라 할 수 있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개개인들이 모였을 때 그 군상이 만들어내는 이 세계를 조망한다. 좋은 이야기가 의례히 그렇듯 인물을 해부하듯 들여다보고 그의 눈을 비추며 우리에게 이해의 의지를 강요하던 유려한 카메라는, 이번에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보다 더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는 동안,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보다 더 큰, 숙명보다는 흐릿하지만 우연보다는 짙은, 우리가 만들어낸 '시스템'이 조금씩 드러낸다. 그제야, 이야기는, 그 시스템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인간을 잠식하는지, 혹은 그것이 바로 인간인지를 묻는다.


그러고 보니, 인간(人間)은 한자로 말 그대로 '사람 사이'를 뜻하는데, 사실 가장 훌륭한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를 뜻하는 단어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이 단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1.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을 쓴 작가, '빈스 길리건'은 쉽게 말하자면 천재다. (그의 드라마 각본 첫 커리어가 그 유명한 'X파일'이다.) 그는 어떤 특정한 인간을 그리는 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듯 하다. 그의 신들린 듯한 필력은 드라마를 돌진시키고 관객들을 휘어잡는다. 시즌이 모두 끝나면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고 인물이 우리를 홀린다.


빈스 길리건이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을 통해 가장 잘 다루는 인물 유형은 심리학 용어로 흔히 '심리조종자(manipulater)'라고 불리는 성격의 소유자들일 것이다. 


성격장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불안해한다. 어린 시절의 환경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고, 성장 과정 중에 불안과 두려움을  타파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도했던 그릇된 방법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경험이 축적되면 부지불식간에 타인과 관계맺는 방법에 어떤 패턴이 고착화된다.


그리고 그 결과, 여전히 불식되지 않는 자신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피해자와 약자에 위치시키고 주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전가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남을 조종한다. 흔히 자기애성 성격장애라 알려진 나르시시즘이나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 성향과 결합되기도 한다. (이 내용들은 아주 정확하진 않다. 내가 아는 바를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이렇다는 얘기. 그러니 궁금하신 분들은 관련 서적을 더 찾아보시길 추천.)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이런 인물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는 한 때 노벨상을 받은 논문에 기여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익히지 못했다. 한 편으로는, 별 문제없는 생활을 잘 영위해나갔지만, 그것은 지극히 통제된 방식의 자기 억압이었음이 드러난다. 고삐가 풀리면 그는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탄로가 나면, 누구보다 비굴하고 절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용서를 구하는데, 이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이고, 모든 행위와 소통은 그 목표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통제 하에 있거나 자기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에게 때때로 연민을 품거나 이타적으로 여겨질만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실 동정이나 연민, 이타성이 아니라, 통제 하에 그런 행위를 함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효능감과 전능감을 느끼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다.


일견 너무 도식적으로 보이던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과 비교하면, 브레이킹 배드에서 인상적인 조연으로 활약했던 '사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핀오프 드라마인 '베터 콜 사울'은, 주인공의 이런 '심리조종자'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입체적인 모습을 구축하는 데에는 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가끔씩, 실제로도 정말 약자이고 이해받지 못했고 단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처럼 스스로 뿌듯하게 여길 그 어떤 능력도 없는 듯 보이고, 그래서 이 드라마는 월터가 사실은 타인을 무시하는 것이 이해가 가게 만든 것에 성공한 것처럼, 사울이 순수한 약자이며 피해자로 보이도록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거기에 그쳐서 드라마 자체가 자기 합리화를 하는 데 이르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울을 일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그 즉시 우리의 뒤통수를 세차게 때리며 본심을 드러내는 사울의 행보가 이어진다. 사소하고 귀여운 말들과 장난에서 시작해서, 사울을 위해 진심을 다해 응원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던 주변인들마저 사울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일들이 자행된다. 하지만, 저 나약하고 비겁한 사울을 두려워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주변인들을 보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치밀한 각본으로 쓰여져 있는지 느끼게 된다.


비단 주인공 뿐만이 아니다.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의 주요 배역들 중에는,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심각한 심리적인 문제를 지닌 인물들도 전면에 등장한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인 월터의 동서이자 마약단속국의 형사인 행크가 겪는 문제, 행크의 아내의 도벽, 끝 없이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제시 등등. 심지어 월터의 아내 스카일러에게 정서적으로 균열이 일어나는 과정 또한 이 드라마는 놓치지 않는다. 베터 콜 사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울의 친형이자 대형 로펌의 창립멤버인 저명한 변호사 척 맥길은 드라마의 시작 때부터 이미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척의 말에는 얼핏 한 치의 모순도 없어 보인다. 그는 드라마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 그 누구보다 지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극단으로 치닫는 이들의 상태를 보면서도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급기야, 브레이킹 배드를 보는 동안, 평생을 통 틀어   스스로 '월터 화이트'에 가까운 성격인 줄 알고 살았던 내가,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면 월터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제시 핑크맨'을 보면서는 내가 결코 지니지 않은 성격과 내가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의 전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제시 핑크맨' 캐릭터일 것이라 확신하던 내가, 마지막 시즌까지 다 보고 나니, 나는 '월터'보다 '제시'에 훨씬 더 가깝단 걸 깨달았다. 상담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고 나에 대해 이토록 정확하게 알게 될 줄이야.


다시 한 번, 좋은 이야기는,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보이던 한 인물의, 그 자신도 모르던 밑바닥을 샅샅히 훑고 나서, 마침내 그를 이해하고 인간의 아이러니를 보게 만든다.


2.

또 다른 한 쪽에 '더 와이어'가 있다. 너무 유명하기도 하고 명확하기 그지 없는 로그라인을 가진 '브레이킹 배드'의 내용에 대한 설명을 스킵한 것은 그렇다 치고, 이제 '더 와이어'의 내용을 다룰 순서가 되었지만,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대신 다른 식의 짧은 정보 나열을 통해  드라마에 대한 흥미를 즉각 유발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 하버드 대학교에서 이 드라마를 활용하여 사회학 강의가 개설되었다.

-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들은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 논란이 된 '볼티모어 빈민가'를 전면에 다루었다.

-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신이 본 역대 최고의 드라마로 꼽은 작품이다.

- 공포의 제왕으로 불리는 작가 스티븐 킹은,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스눕'을, 텔레비전 시리즈 역사상 최고로 무서운 여성 빌런으로 꼽았다.


등장인물은 너무 많고,(과장이 아니라, 다 보고 나면 삼국지나 대부를 읽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뒤에 말하겠지만, 삼국지와 대부는 장구한 역사를 관통하며 특정한 시기와 환경과 특정한 사회를 그려보이려 한다는 점에서 더 와이어와 맥락이 닿아있다.) 이들의 은원관계와 이권은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시즌을 거듭할수록 이야기와 사건은 점점 더 확장되고, 보는 이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보여지면서도 흥미를 계속 유지시킨다. 주인공이라 보여졌던 이가 어떤 시즌에서는 자취를 거의 감추다시피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의외의 인물이 예상치 못한 깊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런 전개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 이야기가 결국은 한 명 한 명의 인물의 깊이보다 더 넓고 깊은 것을 다루려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맹세컨데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마약상을 잡으려고 도청과 잠입수사를 하는 경찰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드라마는, 빈부격차, 인종차별, 노동문제, 관습법과 공정한 법집행과 제도개혁의 문제, 교육 문제와 그에 따른 사회실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편성 문제, 정경유착과 정치권 내의 권력다툼,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이야기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룬다. 그것도 제대로, 때론 장르적으로, 어떨 땐 심지어 전위적으로.


그도 그럴 것이, ' 와이어' 작가들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도시 '볼티모어'에서 수십년   생생한 현장을 직접 겪은 기자와 형사 출신들이다.  작가들은 오랜 시간을  도시에서 끝끝내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과묵한 목격자이자 끈질긴 기억력의 소유자인지 모른다. 그들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누락된 디테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생생한 그들의 취재현장이나 잠입현장에 동행한  있다는 기분을 느끼며  드라마를 즐기게 된다.


이쯤에서 여러분께 주지시킬 사실이 하나 있는데, 더 와이어의 시즌1이 방영된 것은 2002년 6월, 우리가 월드컵 4강 신화에 열광하던 바로 그때다. 그러니 지금 나는 20년 전 드라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봐도 그 드라마가 재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재밌다고만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드라마는 나의 GOAT의 최종 후보로 여기에 서 있다.


이 드라마의 단 하나의 진입장벽이 있다면, 이 드라마가 탄생한 해를 떠올리면 이해될지도 모를, 조금은 느린 전개다. 그런데, 이 느릿느릿해 보이지만 치밀한 전개는, 지금 만들어졌다면 좀 더 빠르고 다이나믹한 전개와 편집으로 인해 '좀 더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그 때 만들어진 그 상태 그대로 그 속도를 필요로 한다. 그 당시에도, 파격적으로 보일만큼 다큐멘터리 같은 룩과 분위기를 통해 보는 이를 그 배경이 되는 도시 '볼티모어'의 한 가운데로 단숨에 이끈 이 드라마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첨언하자면, 이 드라마는 소위 웰메이드 드라마의 명가로서의 명성을 아직까지도 당당히 지키고 있는 HBO의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을 만들어 낸 그 HBO는 내용에 어울리는 스케일과 룩을 얼마든지 구현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굳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러프한 톤을 한껏 자랑하며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몇 화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 곳의 골목을 느릿느릿하게, 한 치 앞의 미래도 보이지 않아 바로 앞만 보고 걷고 있는, 하지만 어느 순간에 어떤 폭발적인 사건이 터질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무기력한 동시에 있는대로 날이 서 있는 그 동네 인물들과 똑같은 상태가 된다.


매 시즌 마지막 화의 맨 마지막은, 어김없이 볼티모어 구석구석을 비추는 몽타쥬 씬으로 마무리된다. 그 순간 시청자가 느끼는 여운은 상당하다.


시즌이 모두 끝나면, 이야기도, 중요인물도, 사건도 모두 잊힌다. 누가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사건이 해결된 것이 정확하게 누구의 공로였던 것인지 헷갈릴지 모른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고, 각자의 이미 익숙해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린 깨닫는다. 우리가 돌아온 이 곳, 이 집, 이 도시, 이 분야, 그러니까 사회는 이렇게 반복될 것이고, 누군가는 사라진 또 다른 누군가의 역할을 할 것이고, 이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누가 어떤 미친 짓을 하든, 어떤 위험한 결단을 했든, 그것이 끝나면 저것이 시작되고, 이 모든 것은 no suprise. 이 곳에 놀랄 일이란 없다. 모든 걸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더 와이어' 덕후 중 가장 유명인사인 오바마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다. '오마르 리틀'이라는 그 캐릭터의 유명한 대사를 빌어 이 드라마의 정수를 갈무리해보자면,


"It's all in the game, yo."



다시 한 번, 훌륭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우리가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를, 그 선택으로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는, 어찌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 나보다 더 큰 것을 알게 된 느낌이 드는데, 그러고 나면 비로소 나 아닌 남이 보인다. 내 바로 눈 앞만 보고 있던 시야가 넓어져, 내가 세상에서 자리한 위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전 관심에도 없던, 머나먼 타국의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구글 지도로 찾아보고, 이 도시의 역사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온통 뒤져봤으니 말 다했지.  


Finale


이 매거진을 쓸 때부터, 사소한 이야기나 아쉬운 이야기만 할 순 없으니,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 속 GOAT를 글로 박제하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영화는 너무 많으니, 드라마로 한정해서 그러기로 마음 먹었었다. 사실 '킬링', '브로드 처치', '트루 디텍티브 시즌1', '마인드 헌터' 도 충분히 물망에 오를 수 있으나, 이 글의 맥락을 위해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이 파이널에 진출했다. (물론 시트콤 장르까지 후보에 올리면 '프렌즈'가 양민학살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게 될 지도...90년대 한국 드라마까지 넣으면 '모래시계', '보고 또 보고'.... 그만하자.)


그러니, 아무튼 이제 다들 눈치챘으리라 싶은데,


난 '더 와이어'에 한 표. 끝!



덧1.

'브레이킹 배드'의 팬들이라면, 혹은 이제 정주행을 할 참이라면, 같은 제작진이 오랜만에 뭉쳐 만든, '제시 핑크맨'의 후일담을 그린 선물 같은 장편영화 '브레이킹 배드 무비 : 엘 카미노' 가 넷플릭스에 있다. 드라마가 종영된 2013년으로부터 6년 만인 2019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직후에서 곧장 이어진다. 제대로 추억 돋게 만드는 전개가 아닐 수 없다.


덧2.

'더 와이어'를 보다 보면, 반가운 얼굴들이 한둘 눈에 띌 것이다. 누군지는 비밀. 직접 확인하시라. 그 중 한 명은 너무 앳된 얼굴이라 못 알아본 이들도 많다더라.  


더 와이어를 다 보고 나면, 분명히 여러분도 오바마와 같은 생각을 할지 모른다. '오마르 리틀' 캐릭터는 그만큼 독보적이다. 그 역할을 맡았던 배우 '마이클 K. 윌리엄스'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

RIP, Omar.


덧3.

심리조종자에 대해 좀 더 관심이 가는 분들에게 추천할 책이 있다. 여러 전공서적들이 있겠지만, 그 어떤 책보다 생생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니, 그 제목은 '나의 살인자에게.'


책의 저자,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가 자신과 그 가족이 직접 겪은 일들을 낱낱히 밝힌 이 책은, 우리가 그저 막연하게 상상만 하고 왜곡하거나 고개 돌려 피한, 교묘한 심리 조종의 실체를 끝까지 뒤쫓는다.

 

이후 약간의 스포. 하지만 이걸 알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책 소개에 이미 다 적혀 있다.


책의 주인공, 그러니까 '아스트리드'의 직업은 변호사다. 그가 법을 공부한 이유는 단 하나다. '아스트리드'는 다수의 살인을 교사한 갱단의 두목이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으로서 네덜란드에서 가장 요주의 범죄자인 자신의 친오빠 '빌럼 홀레이더르'를 직접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 인생을 건다. 아스트리드는 그 과정 중에 결국 빌럼 못지 않은 괴물이 된다. 그래야만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일에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그리하여 자신의 친오빠를 직접 기소하고 감옥에 집어 넣었고, 회고록을 썼으며, 감옥에 갇힌 친오빠의 공공의 적 1위이자 제1의 암살 타겟이 여전히 자신이라 담담히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지 않을 것이다.


덧4.

이렇게 쓰고나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이 있는데, 취향의 결투장에 오른 것들 중에는 불량품이 없다며, 나의 호불호가 퀄리티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호도의 문제라고 했지만, 내 취향의 콘텐츠에 대해 나는 사실 '그건 어떻게 봐도 훌륭한 이야기고, 그러니 걸작이야.' 라고 그토록 핏대 세워가며 말하고 있으니, 이건 그냥 덕질 이후의 포교활동이 아니고 뭔가.


하지만, 여태까지의 이 모든 노가리는 사실 이를 위한 것일테니, 그런 의미가 없다면야 뭐하러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이토록 구구절절 말을 얹겠나.


그러니까 이건 그야 말로 그 말 그대로인데, 말하자면 '엄청나게 하찮고 믿을 수 없이 사적인 리뷰.'


끝까지 읽으며 힘들게 앉아 있던(혹은 다행히 편히 누워있던) 여러분 모두의 지금쯤 충혈되었을 눈동자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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